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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노동, 노동 가치, 무인 로봇들 본문

사회주의/사회 공학

인간 노동, 노동 가치, 무인 로봇들

OneTiger 2019. 7. 22. 20:00

사이언스 픽션이 시대적인 격차와 서구적인 근대화를 이야기할 때, 사이언스 픽션은 공학을 예찬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드 SF 장르는 이것을 강조합니다. 하드 SF 장르는 공학을 예찬합니다. SF 장르에게는 여러 하위 장르들이 있으나, 여러 하위 장르들 중에서 하드 SF 장르는 공학을 가장 예찬합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에 수많은 우주선들이 있다고 해도, 스페이스 오페라는 어떻게 사람들이 우주선들을 만드는지 강조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사람들은 우주선들을 건조하겠으나, 스페이스 오페라는 이런 과정을 강조하지 않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어떻게 우주선이 움직이고 어떻게 우주선이 항해하는지 강조하지 않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선들이 신나게 모험하거나 함대 전투를 펼친다고 이야기할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우주 활극과 함대 전투를 예찬합니다. 반면, 하드 SF는 우주선 건조 과정에 치중하거나 우주선 내부를 구석구석 돌아볼 겁니다. 아니면 하드 SF는 어떻게 가혹한 우주에서 우주선이 움직이는지 고찰할 겁니다. 이런 과정은 기계 공학을 예찬할 수 있습니다. 하드 SF 장르는 기계 공학을 예찬하기 위한 장르가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하드 SF 소설들은 뭔가가 무슨 원리로 움직이는지 공학을 예찬하기 원합니다.



하드 SF 소설들이 공학을 예찬한다면, 공학은 사람들이 직접 뭔가를 만든다고 강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를 뚝딱뚝딱 만듭니다. 사실 사람들이 뚝딱뚝딱 만들지 않는다면, 우주선은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하늘에서 갑자기 우주선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뚝딱뚝딱 만들었기 때문에, 우주선은 나타납니다. 하드 SF 소설이 우주선 작동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다면, 하드 SF 소설이 우주선 건조 과정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궤도 조선소 노동자들이 우주선을 뚝딱뚝딱 만든다고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소설 <낙원의 샘>이 강조하는 것처럼, 하드 SF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뭔가를 뚝딱뚝딱 만듭니다. <낙원의 샘>이 궤도 엘리베이터 건설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해도, <낙원의 샘>이 오직 궤도 엘리베이터 작동 원리만 강조했다고 해도, 결국 독자는 사람들이 뚝딱뚝딱 만들었다고 상정할 수 있습니다. 종종 하드 SF들에서 사람들보다 기계들은 훨씬 많은 것들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비디오 게임 <서바이빙 마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엄청나게 많은 무인 로봇들을 운영해야 합니다. 이런 장면은 인간보다 로봇이 뭔가를 만든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갑자기 로봇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로봇들은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로봇들은 나타나고, 이런 로봇들은 외계 개척 도시를 짓습니다. 사람들이 로봇들을 만들었기 때문에, 외계 개척 도시는 나타납니다. <서바이빙 마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오직 무인 로봇들만 이용해 외계 개척 도시를 짓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사람들이 로봇들을 만들었다고 상정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뭔가는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뚝딱뚝딱 만들었기 때문에, 우주선들과 무인 로봇들과 외계 개척 도시는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노동한다면, 노동은 가치를 만들 겁니다. 외계 행성에서 개척자들이 뚝딱뚝딱 노동한다면, 이런 노동은 외계 개척 도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노동은 가치(외계 개척 도시)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늘에서 가치가 뚝 떨어진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하늘에서 가치가 뚝 떨어진다고 믿습니다. 경제학 강의 시간에 경제학 교수라는 작자들은 학생들에게 이런 거짓말을 가르칩니다. 경제학 교수들은 하늘에서 가치가 뚝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학은 어떻게 가치가 가격이 되는지 절대 설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주 탐사 소설은 개척자들이 노동하기 때문에 그들이 외계 도시를 짓는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늘에서 가치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노동해야 합니다. 하드 SF 장르는 사람들이 뚝딱뚝딱 노동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노동 없이, 외계 개척 도시는 없습니다. 하늘에서 외계 개척 도시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늘에서 외계 개척 도시가 뚝 떨어지지 않음에도, 왜 사람들이 하늘에서 가치가 뚝 떨어진다고 믿나요? 왜 사람들이 어떻게 가치가 나타나는지 파악하지 않나요? 왜 자본주의 경제학이 어떻게 가치가 나타나는지 말하지 않나요? 왜 자본주의 경제학이 오직 수요-공급 곡선만 강조하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약 경제학자들이 "인간 노동은 가치를 만든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은 인간 노동에 관심을 기울일 겁니다. 인간 노동이 가치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 노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인간 노동이 중요하다면, 이건 노동자들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건 자본가들보다 노동자들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현실은 이런 것입니다. 자본가들보다 노동자들은 중요합니다. 아무리 자본가가 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하늘에서 가치들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본가가 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하늘에서 상품들은 우르르 떨어지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상품들은 나타납니다. 인간 노동이 가치를 만들기 때문에, 인간 노동은 제대로 댓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인간 노동이 제대로 댓가를 받나요? 아니, 오히려 자본가들은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원합니다. 자본가들은 이른바 인건비를 아끼기 원합니다. 인간 노동이 가치를 만듬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엄청난 가치를 만듬에도, 소수 기업 임원들은 엄청난 수익을 가져갑니다. 인간 노동은 제대로 댓가를 받지 못합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임금 노동자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인간 노동은 가치를 만든다."라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이런 결론(자본가는 임금 노동자를 착취한다)에 도달할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학은 어떻게 가치가 나타나는지 알기 원하지 않습니다. 수요-공급 곡선이 핵심 사항들을 설명하지 못함에도, 자본주의 경제학은 오직 수요-공급 곡선에만 매달립니다. 이른바 4차 혁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하늘에서 4차 혁명이 뚝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4차 혁명이 자동화 과정이기 때문에 인간 노동자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정말 하늘에서 4차 혁명이 뚝 떨어지나요? 그건 아닙니다. 외계 행성에서 무인 로봇들이 개척 도시를 짓는다고 해도, 하늘에서 무인 로봇들은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뚝딱뚝딱 만들었기 때문에, 무인 로봇들은 나타납니다.



4차 혁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들이 첨단 기계들을 뚝딱뚝딱 만들었기 때문에, 인류 사회는 첨단 기계들을 이용해 4차 혁명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첨단 기계들을 뚝딱뚝딱 만들지 않는다면, 4차 혁명은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노동자들이 첨단 기계들을 만들기 때문에, 4차 혁명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4차 혁명이 나타난다면, 4차 혁명 속에서 노동자들은 제대로 댓가들을 받아야 합니다. 4차 혁명이 나타나든, 5차 혁명이 나타나든, 100차 혁명이 나타나든, 뉴로맨서와 코타나가 테크노 댄스를 추든, 결국 인간 노동이 가치를 만들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제대로 댓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건 문학 창작과 비슷합니다. 작가 없이, 문학은 없습니다. 작가가 문학을 썼기 때문에, 독자는 문학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문학을 읽는 동안, 독자는 작가가 무엇을 말하는지 해석합니다. 독자가 작가 미상 소설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작가가 무엇을 말하기 원했는지 해석합니다. 작가가 썼기 때문에, 문학은 나타납니다. 어느 날 거친 해일이 모래 해변에 "아빠, 나는 당신을 죽여야 했어. 내가 죽이기 전에 당신은 죽었어."라고 쓴다고 해도, 평론가들은 이게 문학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겁니다. 작가가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쓰기 때문에 문학이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 노동이 만들기 때문에 가치는 나타납니다.



이게 다소 조야한 비유라고 해도, 독자가 문학을 읽는 동안, 독자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원할 겁니다. 딸이 아빠를 죽이기 원했다고 시인이 쓴다면, 독자는 왜 시인이 아빠를 부정적으로 묘사했는지 알기 원할 겁니다. 독자는 아빠가 가부장 문화를 상징하고 시인이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기 원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문학을 읽는 동안, 독자는 이런 것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치를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인간 노동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4차 혁명, 무인 로봇들, 외계 개척 도시를 바라본다고 해도, 우리는 인간 노동이 그것들을 만들었다고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자본주의 경제학이 하늘에서 가치가 뚝 떨어졌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이 우리를 세뇌시키기 때문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역시 하늘에서 가치가 뚝 떨어졌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버니지아 울프는 묻습니다. 유모는 여덟 아이들을 기르고, 변호사는 10만 파운드를 법니다. 누구에게 훨씬 가치가 있나요?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물음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이게 사실입니까? 이런 물음에 아무 의미가 없나요? 유모가 여덟 아이들을 기르고, 변호사가 10만 파운드를 번다고 해도, 우리가 누구에게 훨씬 가치가 있는지 묻지 못하나요?



간단하게 생각해 보세요. 인간 노동은 가치를 만듭니다. 인간 노동은 의식주를 만듭니다. 인간 노동은 옥수수, 치마, 학교를 만듭니다. 인간 노동 없이, 옥수수, 치마, 학교는 없습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 우리는 노동력을 이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고 해도, 하늘에서 갑자기 노동력이 뚝 떨어지나요? 누가 노동력을 만드나요? 돌봄 노동자들은 노동력들을 만듭니다. 돌봄 노동자들(여자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되고, 어른들은 노동력들을 투입할 수 있습니다. 돌봄 노동이 아이들을 돌보기 때문에, 노동력들은 나타납니다. 돌봄 노동들은 노동력들을 키웁(만듭)니다. 그래서 돌봄 노동들은 필수적입니다.


돌봄 노동들이 없다면, 인류 문명은 무너질 겁니다. 돌봄 노동들이 노동력들을 키운다면, 노동력들은 옥수수를 재배할 겁니다. 그래서 유모가 여덟 아이들을 키운다면, 유모에게는 필수적인 가치가 있을 겁니다. 반면, 변호사는 부차적입니다. 변호사는 물질적인 가치를 만들지 않습니다. 변호사는 의식주를 만들지 않습니다. 인류 사회가 복잡하기 때문에, 변호사는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변호사는 절대 의식주를 만들지 않습니다. 인간 노동이 의식주를 만들기 때문에, 변호사는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보다 유모는 훨씬 필수적입니다. 변호사가 10만 파운드를 벌든 100만 파운드를 벌든, 유모는 훨씬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유모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10만 파운드를 벌기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는 가격에 혹했습니다. 변호사가 10만 파운드를 벌기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는 변호사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어떻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가치(인간 노동)가 10만 파운드로 바뀌는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초월적인 시공간 속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유모와 변호사를 비교합니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는 "나에게는 가치를 측정하기 위한 잣대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이건 망상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본주의 경제학을 추구하고 돌봄 노동을 무시합니다.


물론 버니지아 울프는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지배적인 것을 믿고 망상을 떠든다고 해도, 버지니아 울프 개인에게는 잘못이 없을 겁니다. 지배적인 관념 속에서 어떻게 개인이 쉽게 모순을 깨달을 수 있나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외계 행성의 무인 로봇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인간 노동이 무인 로봇들을 만들었다고 상정해야 할 겁니다. 뉴로맨서와 코타나가 테크노 댄스를 춘다고 해도, 우리는 인간 노동이 뉴로맨서와 코타나를 만든다고 상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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