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프랑켄슈타인>과 자본주의라는 피조물 본문
"우리는 기계로 만들어진 괴물의 몸집이 온통 공장 전체를 가득 채우는 광경을 본다. 처음에는 거대한 수족의 움직임이 느리고 정교하기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하나, 결국 세지 못할 수많은 기관들의 빠르고 열광적인 회전 때문에 우리는 이 괴물을 더 이상 부인하지 못한다." 이 문구는 SF 소설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언뜻 이 문구는 SF 소설처럼 보이나,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자본론>에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기계를 저렇게 묘사하는 이유는 공장 기계가 인간 노동자들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공장 기계들과 떨어지지 못하는 관계라고 생각했어요. 비록 인간 노동은 가치를 만드나, 혁신과 비용 때문에 자본가들은 계속 기계들을 도입하고 기계들은 인간 노동자들을 내쫓죠. 그래서 노동자들은 산업 예비군이 되고, 먹고 살기 위해 산업 예비군들은 자본가들에게 매달립니다. 마르크스는 공장 기계가 자본주의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고, <자본론>에서 기계 이야기를 빼먹지 않았어요. 그래서 19세기 고딕 호러 같은 느낌을 풍기는 문체로 마르크스는 기계가 거대한 괴물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런 내용들은 21세기 기술적 특이점이나 4차 혁명을 예고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마르크스에게는 로봇이나 인공 지능을 알 방법이 없었으나, 마르크스는 분명히 공장 기계들이 뭔가 사고를 칠 거라고 예감했고 어둡고 무시무시한 전조를 묘사했습니다. 이건 <자본론>이 4차 혁명이나 기술적 특이점을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19세기 SF 작가들조차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카를 마르크스는 죽은 노동(공장 기계)이 살아있는 노동(인간 노동자)을 몰아내는 광경에서 뭔가를 느꼈고, 그걸 <자본론>에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자본론>을 읽을 때, 독자는 뭔가 SF 소설을 읽는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아있을 때, 유럽에서 이미 SF 소설은 커다란 인기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사이언스 픽션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지 몰라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이언스 픽션을 싫어했다고 해도, 공장 기계를 괴물이라고 묘사했기 때문에 <자본론>은 암울한 기술적 디스토피아를 예감하는 듯합니다. 이런 기술적 디스토피아는 <자본론>이 주장하는 핵심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부분들에서 독자는 첨단 기계들이 쿵쾅거리며 사람들을 내쫓는 부분을 상상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끔 <자본론>은 암울한 19세기 스팀펑크 같은 느낌을 자아냅니다.
어느 짧은 마르크스 전기에서 프랜시스 윈은 카를 마르크스가 <프랑켄슈타인>을 좋아했다고 말했습니다. 마르크스가 <프랑켄슈타인>을 좋아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피조물이 주인을 공격하는 장면을 <프랑켄슈타인>이 그리기 때문입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인조인간을 만듭니다. 하지만 인조인간은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을 공격하고, 결국 프랑켄슈타인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자본론>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스스로 무덤을 팔 거라고 경고했습니다.
자본주의는 필요가 아니라 이윤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무분별하게 과다 생산하고, 임금 노동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습니다. 하지만 임금 노동자들이 소비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들은 이윤을 벌지 못해요. 여기에 신용 문제는 끼어들고, 이런 모순적인 관계는 엄청난 경제 공황을 터뜨리죠. 자본주의는 자신이 저지른 짓거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침내 무너집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런 붕괴 이론을 고안했고, 마침내 자본주의가 사라질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자신이 만든 생산 관계 때문에 자본주의는 무너집니다. 자신이 만든 인조인간 때문에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최후를 맞이한 것처럼.
프랜시스 윈이 말한 것처럼 정말 마르크스가 <프랑켄슈타인>을 좋아했을까요.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마르크스는 정말 자본주의 붕괴 이론이 <프랑켄슈타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프랜시스 윈은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자본주의를 경고하는 비유가 된다고 해도, 저는 그게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메리 셸리는 자본주의를 별로 고려하지 않았겠으나, <프랑켄슈타인>은 자본주의를 비유하는 소설이 될 수 있겠죠.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만들었으나, 오히려 엄청난 경제 공황은 사람들을 습격합니다. 경제 공황은 지옥을 만들고, 불구덩이에서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합니다.
기후 변화 역시 자본주의에서 비롯한 문제죠. 이윤을 위해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상품으로 만들기 때문에 자연 환경은 파괴됩니다. 기후 변화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다면,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인류 사회에 어마어마한 피해를 미칠 겁니다. 기후 변화 때문에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더욱 의심할지 모릅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숱한 재해석들을 낳을 수 있는 원본입니다. 창조자가 그릇된 뭔가를 만들고, 그것이 창조자를 습격한다면, 그런 현상은 <프랑켄슈타인>에게 들어맞을 테고요. 어쩌면 카를 마르크스 역시 그런 가능성을 알아봤을지 모르죠.
물론 이런 붕괴 이론이 정말 맞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겁니다. 전통적인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붕괴 이론을 확신하나, 여러 반대 의견들은 만만하지 않겠죠. 하지만 경제 공황이 터졌을 때, 숱한 사람들은 "그 사람(마르크스)이 돌아왔다!"고 외쳤습니다. 기후 변화 때문에 사람들은 정말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는지 의심하기 시작하고, 기본 소득을 지지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우파 지식인들조차 자본주의가 심각한 위기나 종말에 봉착했을지 모른다고 걱정하죠. 설사 붕괴 이론이 틀리다고 해도, 자본주의는 부메랑 효과에 얻어맞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얻어맞습니다. 그게 치명적인 강타가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이런 모순을 관찰할 수 있을 겁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인조인간에게 공격을 받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