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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휴스턴, 들리는가?>와 <뮬란>이 성 차별을 바라보는가 본문

사회주의/사회 공학

어떻게 <휴스턴, 들리는가?>와 <뮬란>이 성 차별을 바라보는가

OneTiger 2019. 8. 3. 23:29

※ 이 게시글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과 <포카혼타스>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쓴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의 결말을 누설합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은 여자 병사 파뮬란을 보여줍니다. 파뮬란은 여자이나, 군대에 들어가고, 적들과 싸우고, 나라를 구합니다. 뮬란은 현모양처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한때 가문을 빛내기 위해 뮬란은 자신이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왈가닥 아가씨 뮬란은 현모양처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중매쟁이는 퇴짜를 놓고, 뮬란은 현모양처가 되지 못합니다. 대신 뮬란은 군대에 들어가고 남자들과 어울립니다. 뮬란이 거칠게 남자들과 어울리는 동안, 뮬란은 군대에 적응하고, 어엿한 병사가 되고, 적들과 싸우고, 나라를 구합니다.


다른 남자 병사들과 남자 장교 역시 동료로서 뮬란을 인정합니다. 이런 파뮬란은 꽤나 진취적입니다. 파뮬란은 소극적이지 않고, 현모양처가 되지 않고, 남자들과 어울리고, 적들과 싸우고, 나라를 구합니다. 그래서 파뮬란은 진취적인 여자 등장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파뮬란이 수동적인 여자가 아니라 당당한 여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을 볼 때, 그저 수동적이고 예쁜 여자 등장인물들보다 파뮬란은 훨씬 나을 겁니다. 현모양처를 상징하는 숱한 여자 등장인물들보다 파뮬란은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을 훨씬 크게 외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을 크게 외친 이후, 파뮬란이 무엇을 하나요? 애니메이션 <뮬란>은 가부장적인 사회를 보여줍니다. 사회 구조는 아주 전형적인 가부장 문화입니다. 사회 분위기는 여자들이 결혼하고, 남편을 떠받들고, 아이를 낳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뮬란>은 법률들과 정책들을 보여주지 않으나, 법률들과 정책들 역시 여자들이 사회 활동에 참가할 수 있다고 보장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얼마든지 사회 활동에 참가할 수 있다면, 구태여 가문을 빛내기 위해 아가씨들은 요란하게 치장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자들이 얼마든지 사회 활동에 참가할 수 있다면,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뮬란은 남자로 변장하지 않았을 겁니다. 애니메이션 <뮬란>은 사회 활동에 참가하는 여자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사회 활동에 참가하는 여자 등장인물은 오직 뮬란뿐입니다. 게다가 뮬란이 남자로 변장하지 않았다면, 뮬란 역시 사회 활동에 참가하지 못했을 겁니다. 파뮬란은 이런 사회 구조가 문제라고 느끼지 않고 사회 구조를 바꾸기 원하지 않습니다. <뮬란>에서 파뮬란은 '개인적으로'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을 외칩니다. 이런 목소리는 사회 구조를 뒤흔들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을 외친 이후, 파뮬란은 다시 가부장적인 사회에 돌아갑니다.



애니메이션 <뮬란>이 보여주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이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개인적으로 당당해져야 합니다. 여자들은 사회적으로 당당해져서는 안 됩니다. 여자들은 개인적으로 당당해질 수 있으나, 사회 구조를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여자들의 당당한 정체성인가요? 아무리 여자가 개인적으로 당당해지고 싶다고 해도, 사회 구조가 가부장적이라면, 여자들은 쉽게 사회 활동에 참가하지 못할 겁니다. 여자들이 사회 활동에 참가하기 원한다면, 사회 제도는 여자들을 처벌할지 모릅니다. 20세기 초반 서구 사회에서 보편 선거 권리가 뜨거운 논쟁이 되었다고 해도, 여자들은 정당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들은 투표하지 못했습니다. 여자들은 시민이 아니었고, 여자들에게는 투표하기 위한 권리가 없었습니다. 여자들이 국회 의원이나 대통령에게 투표했다면, 경찰들은 여자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집어넣었을 겁니다. 그래서 20세기 초반 사회주의 세력들에게 여자 투표 권리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진 웹스터가 쓴 <키다리 아저씨>는 아무 이유 없이 사회주의와 여자 투표 권리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제루샤 애벗은 "여자들이 투표하지 못한다면, 이건 너무 인력 낭비이다."라고 말했으나,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여자가 시민이 아니라고 간주했습니다.



제루샤 애벗은 당당한 여자가 되고 싶었으나, 20세기 초반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자는 시민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이건 불가능했습니다. 아무리 제루샤 애벗이 개인적으로 똑똑하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제루샤 애벗은 투표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루샤 애벗이 개인적으로 당당한 여자가 된다고 해도, 이건 그저 보기 좋은 허울에 불과합니다. 사회 구조가 바뀔 때, 제루샤 애벗은 당당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 <키다리 아저씨>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평등한 사회 구조를 바랍니다. 비록 <키다리 아저씨>가 그저 온건 좌파 성향에 불과하다고 해도, <키다리 아저씨>는 여자 권리 문제가 개인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만약 창작물들이 정말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을 외치고 싶다면, 창작물들은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 뒤집을 수 있어야 합니다. 창작물들이 사회 구조를 뒤집지 않는다면, 아무리 창작물들이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을 외친다고 해도, 이건 그저 생색내기에 불과할 겁니다. 애니메이션 <뮬란>은 어떤가요? <뮬란>이 사회 구조를 뒤집나요? <뮬란>에서 파뮬란이 사람들을 모으고, 가부장적인 사회에 저항하고, 사회 구조를 전복하기 원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디즈니 가족 애니메이션에게 혁명은 위험하고 불온한 단어입니다. 파뮬란은 개인적으로 당당해지고 사회적으로 지배 계급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파뮬란은 결혼해야 합니다.



흔한 디즈니 여자 주인공들이 결혼에 골인하는 것처럼, <뮬란>에서 파뮬란은 결혼에 골인하는 것 같습니다. 뭐, 애니메이션 <포카혼타스>에서 포카혼타스는 존 스미스와 결혼하지 못합니다. <인어 공주>에서 아리엘은 에릭과 결혼하고, <미녀와 야수>에서 벨은 프린스 차밍과 결혼하고, <알라딘>에서 쟈스민은 알라딘과 결혼하고, <라이온 킹>에서 날라는 심바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포카혼타스>는 이런 전철을 깹니다. <포카혼타스>에서 포카혼타스와 존 스미스는 결혼하지 못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포카혼타스와 영국 백인 존 스미스는 결혼하지 못합니다. 디즈니 가족 애니메이션에서 (인종에서 비롯하는) 계급을 넘어서는 결혼이 불가능한가요?


이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뮬란>에는 계급 구조를 전복하는 결혼이 없고, 파뮬란은 리 샹과 결혼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파뮬란이 개인적으로 당당하다고 해도, 결국 파뮬란은 아내가 되어야 하고, 며느리가 되어야 하고,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이건 결혼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연인이 서로 좋아한다면, 왜 결혼이 나쁘겠습니까. 문제는 가부장 문화가 오직 이런 결혼만이 삶의 목표라고 왜곡한다는 사실입니다. 파뮬란은 자유분방하게 연애하고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파뮬란은 결혼할 겁니다. 결혼 이후, 파뮬란은 가부장 문화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소가 될 겁니다. 애니메이션 <뮬란>은 이런 결말로 흘러갑니다.



창작물이 여자의 당당한 정체성을 외친다고 해도, 창작물이 이런 진부한 결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나요? 만약 창작물이 이런 결말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창작물은 사회 구조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제시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건 쉽지 않습니다. 근대 도시 문명이 가부장적인 사회를 타파한다면, 이게 무슨 모습일까요? 소설 <키다리 아저씨>는 여자들이 투표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새로운 세상을 그리지 못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키다리 아저씨>에게 여자들이 투표하는 세상은 미래입니다.


<키다리 아저씨>에게 가부장적인 구조가 완전히 무너지는 사회는 훨씬 머나먼 미래입니다. <키다리 아저씨> 같은 주류 문학은 이런 머나먼 미래를 그리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이 머나먼 미래를 그리고 싶다면, 주류 문학은 SF 소설이 되어야 합니다. 주류 문학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싶지 않다고 해도, 주류 문학은 슬립스트림이 되거나 경계 문학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제임스 팁트리가 쓴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는 모범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소설 <휴스턴, 들리는가?>는 가부장 사회를 완전히 날려버립니다. 미래 사회에는 오직 여자들만 있습니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결혼 풍습 따위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남자들이 회사로 출근하는 장면 따위가 없습니다. <뮬란>에서 파뮬란은 국가를 구한 영웅이나, <휴스턴, 들리는가?>는 국가와 민족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성 차별을 은폐하기 위해 지배 계급은 국가와 민족 문제 같은 부차적인 요소를 강조합니다. 최근에 국내에서 일본 불매 주장이 엄청나게 인기를 끄는 것처럼, 지배적인 관념은 국가 및 민족 문제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정말 민족 문제가 중요한가요? 정말 일본 제국주의가 국가 및 민족 문제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남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것 같으나, 사실 남한 사회 역시 상당한 수구 꼴통 사회입니다. 남한 사회는 서구 제국주의에 찬성합니다. 일본 사회와 남한 사회 모두 서구 제국주의에 찬성합니다. 일본과 남한 같은 자본주의 사회는 제국주의로 흘러가야 합니다. 남한 사회가 일본 사회를 욕할 때, 이건 그저 제국주의 다툼에 불과합니다. 이런 제국주의 다툼은 제대로 착취와 수탈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런 제국주의 다툼은 1차 세계 대전 같은 끔찍한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끔찍한 전쟁 속에서 여자들은 온갖 성 폭력들에 시달릴 겁니다.



그래서 성 해방 운동에게 국가 및 민족 문제는 부차적입니다. 이건 국가 및 민족 문제가 완전히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국가 및 민족 문제는 커다란 난관입니다. 하지만 성 해방 운동이 국가 및 민족 문제가 근본적이라고 오해한다면, 성 해방 운동은 평등한 사회 구조보다 삐뚤어진 애국심으로 기울 겁니다. 자본주의 국가 정부가 여자들(돌봄 노동자들)을 착취한다고 해도, 성 해방 운동은 이런 착취에 찬성할 겁니다. 성 해방 운동은 국가 및 민족을 넘고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해야 합니다. 박문영 작가가 쓴 <지상의 여자들>을 보세요. 이 소설에서 국가 및 민족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자본주의 남한 사회에서 여자들은 지옥을 견뎌야 합니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돌봄 노동들을 착취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돌봄 노동자들은 여자들이고, 그래서 자본주의는 여자들을 착취해야 합니다. 남한 사회 속의 제3세계 여자에게도 자본주의 남한은 지옥입니다. 남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욕하나, 제3세계 여자에게 남한 역시 지옥입니다. 여자들에게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지옥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극단적으로 저항하고 헬조선을 외친다고 해도, 여자들에게는 정당한 명분이 있습니다. 물론 맹목적인 분노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헤치지 못합니다. 맹목적인 분노는 엉뚱한 표적을 조준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지옥이기 때문에, 맹목적인 분노에는 명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회 구조가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성 해방은 사회 구조를 전복시켜야 합니다. 창작물이 근본적으로 성 해방을 추구하고 싶다면, 창작물은 가부장 문화가 무너지는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휴스턴, 들리는가?>에는 비단 가부장 문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가부장 문화를 강력하게 질타합니다. <휴스턴, 들리는가?>에는 사회 구조 전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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