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상흔>에서 지식 노동과 육체 노동, 돌봄 노동 문제 본문
스팀펑크 판타지 <상흔>에서 배경 무대는 해상 도시 아르마다입니다. 수많은 선박들은 아르마다를 구성합니다. 여기는 다소 요절복통 기상천외한 도시입니다. 여기에는 온갖 크고 작은 선박들이 있습니다. 거대한 전함부터 작은 보트까지, 수면 위의 어선부터 심해의 잠수함까지, 다양한 선박들은 해상 도시를 구성합니다. 심지어 거대 바다 괴수 역시 선단 도시에 속할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육상 도시와 달리, 이런 해상 선단 도시는 상당히 혼란스럽습니다. 그 자체로서 해상 도시는 무질서인 것 같습니다. 소설 주연 등장인물 벨리스 콜드와인은 해상 도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합니다.
벨리스 콜드와인은 끊임없이 육상 도시 뉴크로부존을 그리워합니다. 해상 도시는 너무 이질적이고 잡다합니다. 전함과 어선과 잠수함과 보트가 뒤죽박죽 도시를 구성한다면, 어떻게 이런 도시에서 시민들이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나요? 돛대가 탑이 되고, 선실이 아파트가 되고, 선박 창고가 지하 주점이 되고, 갑판이 공원이 된다면, 이건 너무 혼란스러울 겁니다. 바다 위에서 해상 도시가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아르마다에서는 심지어 계절조차 주기적이지 않습니다. 달력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달력이 여름을 가리킨다고 해도, 선단 도시 아르마다는 북방 해역을 항해할지 모릅니다.
아르마다에서 비단 공간적인 구성만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온갖 난민들, 천민들, 빈민들이 있습니다. 아르마다는 노예 수송선을 기습하고 노예들을 풀어줍니다. 노예들은 시민들이 됩니다. 아르마다에서 미천한 유사 인간 종족들과 개조 인간들 역시 시민들이 됩니다. 소설 주연 등장인물 태너 색은 죄수이고, 개조 인간(리메이드)이고, 노예입니다. 식민지 노바 에스페리움에서 태너 색은 가혹한 운명과 부딪힐지 모릅니다. 현실 속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식민지를 끔찍하게 수탈한 것처럼, 서구 자본주의가 인디언, 흑인, 원주민 노예들을 끔찍하게 부려먹고 착취한 것처럼, 태너 색은 끔찍한 운명에 부딪혀야 할지 모릅니다. 다행히 아르마다는 노예 수송선을 기습했고, 테너 색은 당당한 시민이 됩니다.
더 이상 태너 색은 노예가 아닙니다. 이건 아르마다가 이상적인 천국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르마다는 그저 천민들, 난민들, 빈민들을 받아줄 뿐입니다. 아무리 아르마다 선단 도시가 밑바닥 계급을 받아준다고 해도, 밑바닥 계급이 당당한 시민이 된다고 해도, 오직 이것만으로 공동체가 유토피아로 승화할 수 있나요? 밑바닥 계급이 해방된다고 해도, 수직적인 계급 구조가 당장 사라지나요? 한때 19세기 아나키즘은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건 너무 낭만적인 망상입니다. 여전히 선단 도시에는 부패와 탐욕과 폭력과 오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천민들, 난민들, 빈민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개조 여자들은 성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극심한 성 차별을 피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산주의 문명과 자본주의 문명이 별로 다르지 않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여전히 공산주의 문명에도 부패와 탐욕과 폭력과 오염이 있을 겁니다. 인간이 다른 생물종이 되지 않는다면, 유토피아는 영원히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만약 공산주의 문명과 자본주의 문명이 별로 다르지 않다면, 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나요? 이유는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이유는 밑바닥 계급입니다. 적어도 밑바닥 계급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밑바닥 계급이 성 노예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세 수도원 운동부터 오늘날의 남아메리카 좌파까지, 언제나 가난 사상은 코뮤니즘의 전유물에 가까웠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코뮤니즘은 가난 사상을 대표합니다. 아무리 공산주의 문명이 부패하고 탐욕스럽고 폭력적이고 불결하다고 해도, 밑바닥 사람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밑바닥 사람들은 성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합니다. 이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상 도시 아르마다를 본다면, 그들은 고개들을 끄덕일지 모릅니다. 아르마다는 절대 천국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르마다에서 시민으로서 태너 색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선단 도시에서 태너 색은 노예가 아닙니다.
그래서 동물학자 요하네스 티어플라이는 뉴크로부존보다 아르마다를 지지합니다. 벨리스 콜드와인은 아르마다보다 뉴크로부존이 낫다고 주장하나, 요하네스 티어플라이는 노예 해방을 지지합니다. 벨리스 콜드와인은 아르마다 선단 도시가 해적 소굴이라고 조롱하나, 사실 뉴크로부존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아르마다보다 뉴크로부존은 훨씬 폭력적인 해적 소굴입니다. 심지어 뉴크로부존은 전략 병기(?)를 실험하고, 실험 결과는 참혹합니다. 위험하고 무모한 실험은 온갖 혐오스러운 돌연변이들을 만들고, 이것 때문에, 심지어 지옥 악마들조차 기겁합니다. 전작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에서 뉴크로부존 시장은 지옥 악마 대사와 면담했으나, 악마 대사는 뉴크로부존을 거절했습니다.
뉴크로부존이 위험하고 무모한 실험에 도전했기 때문에, 심지어 지옥 악마들조차 뉴크로부존을 거부합니다. 폭력적인 관점에서 아르마다는 뉴크로부존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사실 뉴크로부존은 너무 강대한 세력입니다. 만약 뉴크로부존이 어디에 아르마다가 있는지 안다면, 뉴크로부존은 아르마다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뉴크로부존 함대는 아르마다를 침략하고 침몰시킬 겁니다. 그래서 아르마다는 바다 위를 떠돌아야 합니다. 이게 고생스럽다고 해도, 육지에서 아르마다는 정착하지 못합니다. 아르마다가 선단 도시가 아니라면, 강대한 세력들은 아르마다를 침략하고 짓밟을지 모릅니다. 네모 선장과 노틸러스가 바다를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아르마다는 바다를 떠나지 못합니다.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가 노동자 계급 국가를 선포했을 때,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소비에트 정부를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 정부는 도망치지 못했습니다. 어디로 소비에트 정부가 도망칠 수 있습니까? 반면, 아르마다는 도망칠 수 있습니다. 드넓은 바다 위에서 아르마다는 자신을 숨길 수 있습니다. 뉴크로부존은 어디에 아르마다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르마다는 너무 느립니다. 아무리 아르마다가 떠돌아다닐 수 있다고 해도, 아르마다는 너무 느립니다. 아르마다에게는 이런 한계가 있습니다. 아르마다가 정말 유토피아를 이룩하고 싶다고 해도, 다른 강대한 세력들은 아르마다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뉴크로부존은 식민지 노예 제도를 유지하나, 아르마다는 노예들을 풀어줍니다. 뉴크로부존이 이런 사실을 안다면, 뉴크로부존은 당장 아르마다를 침몰시키기 원할 겁니다. 뉴크로부존 군사 정부는 노예 해방 사상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아르마다가 천민들, 난민들, 빈민들을 받아주기 때문에, 아르마다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야 합니다. 아르마다는 빨리 도망치지 못합니다. 느린 도망자 신세는 유토피아가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아르마다가 노예들을 풀어준다고 해도, 아르마다는 느릿느릿한 도망자 신세이고, 이건 유토피아가 되지 못합니다. 선단 도시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어떻게 이런 선단 도시가 유토피아가 될 수 있나요?
아르마다에는 온갖 모순들이 있습니다. 도망자는 온갖 모순들을 품어야 합니다. 지식 노동과 육체 노동 역시 이런 모순들에 속합니다. 요하네스 티어플라이와 태너 색은 아르마다 시민입니다. 두 사람은 아르마다를 지지합니다. 하지만 요하네스 티어플라이는 동물학자, 지식 노동자입니다. 태너 색은 부두 노동자, 육체 노동자입니다. 등골이 부러지는 것처럼, 태너 색은 힘들게 일해야 합니다. 심지어 거대 포식 판피어류 둔클레오스테우스가 아르마다 부두를 습격하는 동안, 태너 색은 거대 포식 판피어류가 자신을 잡아먹을 거라고 두려워합니다. 태너 색은 부두 노동자이나, 태너 색은 바다를 두려워합니다.
심해에서 언제 거대 포식자가 올라오고 부두 노동자들을 습격할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상흔>은 메갈로돈이나 모사사우루스를 언급하지 않으나, 바닷속에 둔클레오스테우스가 있다면, 어딘가에는 메갈로돈이나 모사사우루스가 있을지 모릅니다. 누가 아나요? 만약 15m짜리 메갈로돈이 부두를 습격한다면, 부두 노동자들은 정말 난리법석을 겪어야 할 겁니다. 심해에서 거대 포식자가 올라올지 모름에도, 도시 지도부는 무장 잠수함이나 무장 해병들을 제대로 배치하지 않습니다. 만약 둔클레오스테우스가 부두 노동자들을 기습할지 모른다면, 무장 잠수함이 어뢰들을 갖추고 대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소설 <상흔>은 얼마나 자주 거대 심해 포식자들이 아르마다를 습격하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아르마다가 거대 선단 도시이기 때문에, 바닷속에 모사사우루스가 있다고 해도, 모사사우루스는 쉽게 아르마다에 다가가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둔클레오스테우스 습격 사건은 아주 드물고 우연한 사고인지 모릅니다. 만약 자주 둔클레오스테우스가 아르마다 부두를 습격했다면, 부두 노동자들은 부두 방어를 건의했을 테고, 도시 지도부는 부두 방어를 강화했을 겁니다. 아무리 아르마다가 어수선하다고 해도, 밑바닥 계급은 엄연한 시민이고, 도시 지도부는 시민 건의를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아르마다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와 다를 겁니다.
남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은 슬프고 안타까운 사건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든 말든, 남한 지배 계급은 민영화를 나불거립니다. 아르마다 사회는 이런 남한 사회와 다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바닷속에는 둔클레오스테우스를 비롯해 여러 거대 괴수들이 있고, 부두 노동자들은 바닷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부두 노동자들에게는 무장 잠수함 같은 방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부두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어쩌면 어떤 독자들은 아르마다 선단 도시가 위선적이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아르마다는 노예 수송선을 습격했으나, 이건 그저 인력 보충 과정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흥, 아르마다는 위선적이야. 아무리 아르마다가 노예들을 풀어줬다고 해도, 아르마다 경비대는 둔클레오스테우스를 막지 못했어. 도시 지도부는 무장 어뢰 잠수함을 배치해야 했으나, 바닷속에는 무장 잠수함이 없었어. 적어도 무장 잠수함은 부두 노동자들을 지키지 못했어. 선단 도시 지도부는 안전한 작업 환경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만약 둔클레오스테우스보다 훨씬 커다란 메갈로돈이나 모사사우루스나 다른 바다 괴수들이 기습했다면, 부두 노동자들은 훨씬 많이 죽거나 다쳤을 거야. 아르마다는 밑바닥 계급을 지지하지 않아. 아르마다는 노예 수송선을 기습했으나, 아르마다는 그저 인력을 보충하기 원했을 뿐이야." 이렇게 어떤 독자들은 아르마다를 비판할지 모릅니다.
반면, 어떤 독자들은 다르게 판단할 겁니다. "어휴, 아무리 아르마다가 밑바닥 계급을 지지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요절복통 선단 도시가 완전하게 밑바닥 계급을 지지할 수 있지? 아르마다에게는 한계가 있어. 아르마다는 잘못하지 않았어. 뉴크로부존 같은 강대한 자본주의 도시 때문에, 아르마다는 밑바닥 계급을 제대로 지지하지 못해. 그렇다고 해도 뉴크로부존보다 아르마다는 훨씬 낫지. 만약 둔클레오스테우스가 뉴크로부존 부두를 습격했다면, 노동자들이 끔찍하게 죽었다고 해도, 뉴크로부존 자본가들은 눈꼽만큼도 상관하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어떤 독자들은 아르마다를 옹호할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 해석이 두 가지로 갈라진다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이 옳은가요?
아르마다가 정말 그저 노예들을 이용해 인력을 보충하기 원할 뿐인가요? 아니면 자본주의 도시들이 압박하기 때문에, 아르마다가 밑바닥 계급을 제대로 지지하지 못하나요? 문제는 현실에 아르마다 선단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상흔>은 그저 소설에 불과합니다. 독자들은 바스-라그 세상을 제한적으로 압니다. 독자들은 그저 뭐라고 차이나 미에빌이 썼는지 읽을 뿐입니다. 독자들이 아르마다를 비판하거나 옹호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둔클레오스테우스 습격 사고를 해석한다면, 독자들은 현실을 이용해야 할 겁니다.
지식 노동과 육체 노동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르마다에서 부두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해도, 육체 노동자들은 별로 존중을 받지 못합니다. 반면, 요하네스 티어플라이는 지식 노동자입니다. 요하네스는 번듯하게 양복을 걸치고 지식을 연구합니다. 육체 노동자로서 태너 색은 지식 노동자들을 경멸합니다. 소설 <상흔>은 이런 부정적인 갈등 관계를 자세히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르마다에는 지식 노동자들과 육체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지식 노동자들이 편안하게 연구하는 동안, 육체 노동자들은 힘들게 헤엄칩니다.
요하네스가 동물학자이고, 바스-라그에 온갖 기괴한 야생 동물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야생 동물들을 연구하기 위해 현장 답사 과정에서 요하네스는 목숨을 걸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하네스와 태너 색이 똑같이 위험한 업무를 맡는다고 해도, 진짜 문제는 위험한 업무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계급 구조입니다. 지식 노동자로서 요하네스는 존중을 받습니다. 요하네스와 달리, 태너 색은 육체 노동자입니다. 아무도 육체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도 이건 심각한 갈등 관계가 됩니다.
수직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 지식 노동자는 지배 계급에 가깝고, 육체 노동자는 피지배 계급에 가깝습니다. 지식 노동자는 존경을 받으나, 육체 노동자는 무시를 당합니다. 하지만 지식 노동자는 뭔가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식 노동자가 뭔가를 연구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연구는 생산이 아닙니다. SF 평론가가 수 만 권의 SF 비평 서적들을 쓴다고 해도, 수 만 권의 SF 비평 서적들은 의식주가 아닙니다. 육체 노동자들이 자연을 가공하기 때문에, 육체 노동은 재화를 만듭니다. 이런 재화들은 인류 문명을 뒷받침합니다. 육체 노동자들이 재화들을 생산하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먹고 삽니다.
게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육체 노동자들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갑자기 하늘에서 지식 노동자들 역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자들이 아이들을 키우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라고 지식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가 됩니다. 돌봄 노동자들은 많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쏟아야 합니다. 숱한 돌봄 노동자들은 여유를 찾지 못합니다. 엄마가 육아에 매달리기 때문에, 엄마는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엄마는 그저 육아 기계에 불과합니다. 엄마가 자신의 인생을 살기 원한다고 해도, 아이가 발목을 잡기 때문에, 엄마는 육아에 매달려야 합니다. 이렇게 엄마들이 인생을 포기하고 육아들을 맡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노동들은 불공평합니다. 지식 노동은 지배적인 위치가 되고, 육체 노동과 돌봄 노동은 피지배적인 위치가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지식 노동자들을 존중합니다. 지식 노동이 지배적인 위치이기 때문에, 우리는 육체 노동과 돌봄 노동보다 지식 노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이 옳은가요? 정말 지식 노동이 지배적인 위치가 되어야 하나요? 중국 문화 대혁명은 이것을 고치고 싶어했으나, 문화 대혁명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식 노동, 육체 노동, 돌봄 노동 분리는 너무 고질적인 문제이고, 이것을 고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태너 색이 요하네스 티어플라이를 경멸하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지식 노동, 육체 노동, 돌봄 노동은 불공평합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은 노동 사회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이 이런 불공평한 분리를 막고 싶다면, 노동 사회화 이외에 다른 대안들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정말 노동 사회화를 추구한다고 해도, 완벽한 노동 사회화가 가능한가요? 마이클 앨버트는 파레콘(참여 계획 경제)을 주장하나, 이런 파레콘이 불공평한 노동 분리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나요? 소설 <상흔>은 이런 문제를 자세하게 파악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소설 전반부는 이런 문제를 자세하게 파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르마다에 수많은 천민들, 난민들, 빈민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물음(노동 사회화)은 중요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