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유령 여단> - 우주 전쟁 속의 신체 변화와 정체성 변화 본문
존 스칼지가 쓴 <유령 여단>은 <노인의 전쟁>에서 이어지는 속편입니다. <노인의 전쟁>에서 백발 할아버지 존 페리는 치열한 전장에 참가합니다. 제목 그대로 <유령 여단>은 하얀 머리카락과 늙은 몸을 휘날리는 노인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소설입니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이런 설정은 곧바로 호기심으로 이어질 겁니다. 아니, 어떻게 백발 할아버지들이 전장에 참가할 수 있는가? 꼰대 장성들이 아닌 이상, 전장에서 뛰고 구르고 쏘는 병사들은 젊은이들이 아닌가? 전장에서 적어도 중년을 넘긴 남자가 격렬하게 싸우기가 어렵지 않은가?
게다가 이 소설에서 오직 할아버지들만 전장으로 달려가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들처럼 할머니들 역시 열심히 싸우죠. 할머니들이 전장으로 달려간다? 그게 가능한가? 이런 물음들로서 <노인의 전쟁>은 시작하고, 사건을 진행하는 동안 <노인의 전쟁>은 계속 이런 물음들을 놓치지 않습니다. 종종 이런 물음들은 희미해질 때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존 페리와 다른 병사들이 노인이기 때문입니다. 숱한 전쟁 소설들과 달리, 병사들이 늙었음에도, 다들 열심히 전장으로 달려가기 때문이죠. 주인공이 젊은 병사가 아니기 때문에 전쟁 역시 뭔가 달라 보입니다. <유령 여단>은 이런 설정에서 한 단계 더 나갑니다.
즉, <유령 여단>에서 주인공 병사 역시 보통 젊은이가 아닙니다. 아니, 독자가 주인공 병사를 젊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존 페리는 젊은이처럼 생생한 노인이나, <유령 여단>에서 소설 주인공을 맡은 자레드 디랙은 젊은이입니다. 자레드 디랙은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두운 젊은이죠. <노인의 전쟁>에서 병사의 정체성이 소설의 매력을 결정한 것처럼 <유령 여단>에서도 병사의 정체성이 소설의 매력을 결정합니다. <노인의 전쟁>에서 존 페리는 산전수전을 겪는 노인입니다. 존 페리는 험난한 풍파를 헤쳐오지 않았으나, 나름대로 인생에서 여러 사건들을 겪었고, 그 덕분에 존 페리는 젊은 병사들과 다릅니다.
존 페리에게는 뭔가 여유가 넘치고 성숙한 측면이 있어요. 적어도 죽음을 바라보는 시기에서 존 페리는 인생을 반추할 줄 알죠. 그래서 존 페리가 첨단 병사로 만들어질 때, 다른 노인들과 함께 늙은이 모임을 결성했을 때, 헤어진 아내를 다시 만났을 때, 두근거리는 연애 시절을 생각할 때, 소설은 아련한 감성을 풍깁니다. 이런 감성은 다른 전쟁 소설들이 풍기지 못하는 <노인의 전쟁>을 구성하는 고유한 매력입니다. 자레드 디랙은 다릅니다. 자레드 디랙은 청년처럼 보이나, 일반적인 젊은이보다 훨씬 어리숙하고 세상을 모릅니다. 자레드 디랙에게는 아예 세상 경험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레드 디랙은 모든 것을 새롭고 낯설게 받아들입니다. 자레드 디랙의 관념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그것과 아주 달라요. 사소한 농담, 예의범절, 일상, 손짓, 기타 등등은 자레드 디랙에게 남다른 경험들로 다가옵니다. 군대 규율 역시 다르게 다가오죠. 만약 디랙이 평범한 젊은이였다면, 전장에서 온갖 부조리들을 씁쓸하게 맛보거나 맹목적인 애국심에 심취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디랙에게는 그런 감성을 느낄 경험이 부족하고, 그래서 디랙은 기계적으로 전장에 참가합니다. 이건 그저 순진하거나 어리숙한 것과 다릅니다. 디랙에게는 아예 경험이 부재합니다.
일반적인 젊은이 병사가 아니기 때문에 디랙에게는 뭔가를 경험할 시간이 없었고, 그래서 기계처럼 디랙은 모든 것을 수행합니다. 디랙이 속한 부대가 특수 부대임을 감안한다고 해도, 독자는 이런 상황이 지극히 불친절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설의 분위기 역시 불친절합니다. 디랙은 모든 것을 새롭게 경험하는 등장인물이고, 독자 역시 그런 디랙을 낯설게 바라볼 겁니다. 언제나 여유롭게 만담을 건네는 존 페리와 디렉은 완전히 다르죠. 유령 여단이라는 불길한 제목처럼 소설은 불길한 분위기를 계속 퍼뜨립니다. <노인의 전쟁>에서 여유로운 만담에 반한 독자는 이 소설이 성에 차지 않을지 모르겠어요. 만담들이 등장한다고 해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달라요.
그래서 작가는 자레드 디랙을 주인공으로 삼으나, 다른 인물들의 시점을 내보내는 것 같습니다. <노인의 전쟁>에서 존 페리는 1인칭 주인공이었습니다. 인생을 충분히 경험한 노인이기 때문에 존 페리는 1인칭 주인공이고 동시에 1인칭 화자가 될 수 있었죠. 하지만 디랙에게는 세상 경험이 부재하고, 소설 작가는 이런 인물을 1인칭 화자로 삼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소설에는 우주 전쟁을 다채롭게 보여줄 수 있는 여러 인간들 및 외계인이 등장합니다. 전반적으로 소설은 디랙을 따라가나, 소설의 첫머리를 여는 등장인물은 디랙이 아닙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주기적으로 등장하고 디랙이 경험하지 못한 부분들을 채우죠.
그 덕분에 전편과 달리 <유령 여단>은 좀 더 시각들을 키울 수 있습니다. <노인의 전쟁>에는 장교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일개 보병이 바라보는 시각은 전부였어요. 독자는 오직 존 페리의 시각으로만 소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령 여단>에는 (비록 디랙 본인에게는 아무 경험이 없으나) 장성들 역시 등장하기 때문에 독자는 어떻게 우주 전쟁이 굴러가는지 파악할 수 있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전투 규모는 작습니다. 우주선들은 많이 등장하나, 우주 함대가 서로 싸우는 장면은 나오지 않아요. 그저 분대 전술만 줄창 이어집니다. 온갖 외계 행성들과 온갖 외계인들이 설치는 상황에서 우주 함대 전투가 없다니.
뭐, 디랙이 속한 부대는 특수 부대이고, 특수 부대는 대규모 전장과 인연이 없죠. 대규모 전장 뒤에서 특수 부대는 은밀하게 첩보나 침투, 암살, 모의, 폭파를 담당해야 하죠. 특수 부대가 우주 함대 전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면, 오히려 그건 이상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감안한다고 해도, 어떤 독자들은 우주 함대 전투가 없다고 많이 아쉬워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영원한 전쟁>처럼 이 소설이 우주 함대 전투를 부분적으로 묘사했다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보병들과 특수 부대는 중요하나, 작가가 우주 전쟁을 묘사한다면, 결국 우주 함대는 중요할 비중을 차지해야 할 겁니다. 우주선이 첨단 기술을 상징하는 병기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선은 우주라는 혹독한 공간을 이동할 수 있고, 광대한 거리에서 목표를 공격할 수 있고, 수많은 사람들과 물자들을 태울 수 있고, 심지어 초공간으로 건너뛸 수 있죠. 만약 SF 소설에서 첨단 기술을 상징하는 요소를 하나 꼽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우주선을 꼽을 겁니다. 따라서 우주 함대를 묘사한다면, 밀리터리 SF 소설들은 미덕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우주 밀리터리 SF 소설의 미덕일 겁니다. 하지만 많은 소설들은 보병에 집중하고 우주 함선들을 외면합니다. 보병에게 초점을 맞추기가 더 쉽기 때문이겠죠. 어떤 독자들은 이런 점이 다소 불만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첨단 우주 함선들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특이한 병사들은 불만을 잠재울지 모릅니다. 병사들에게 첨단 기술을 덧붙이는 소설로서 <유령 여단>은 훨씬 특이한 병사들을 보여줍니다. 이건 소설이 제기하는 전반적인 주제 및 설정과 이어졌고 동시에 여러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것 같습니다. <노인의 전쟁>은 어느 정도 바이오펑크 설정을 보여줬고, <유령 여단>은 그걸 훨씬 넓게 확장합니다. 이런 설정은 고전적인 물음을 던지죠. 어디까지 우리 자신이고, 어디까지 인간성일까요. 병사에게 첨단 기술을 덧붙인다면, 산만한 전장에서 노인이나 새파란 애송이 역시 치열하게 싸울 수 있습니다. 기술력은 놀랍죠.
여자는 남자보다 육체적으로 강해질 수 있거나 우주 전투기를 더 잘 조종할 수 있어요. 역사적으로 남자들은 전쟁을 독차지하고 여자들을 폭행했으나, 첨단 기술들이 있다면, 남자들처럼 여자들 역시 동등하게 싸울 수 있어요. 아니면 남자들보다 여자들은 훨씬 잘 싸울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이 자신에게 계속 첨단 기술들을 덧붙인다면, 원래 모습은 아주 희미해질지 모릅니다. 이건 전형적인 철학 고민입니다. 목수가 망가진 배를 수리한다면, 그 배는 원래 배와 똑같을까요. 우리가 이런 개조 병사들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철학적인 정체성을 대충 넘어간다고 해도, 개조 병사들이 독립성이나 생존권을 찾을 수 있을까요. <유령 여단>은 이런 물음들을 던질 것 같으나, 별로 멀리 가지 않습니다. 분위기는 전편보다 훨씬 묵직하나, 고민은 별로 깊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설이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고 해도, 설정 그 자체는 매력적입니다. <유령 여단>이 깊은 담론들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고민할 수 있겠죠. 우리가 한쪽 팔을 개조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우리일 겁니다. 우리가 다른 팔을 개조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우리일 겁니다. 하지만 점차 우리가 다른 부분들을 개조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인지 회의할지 모릅니다. 마침내 우리가 모든 부분을 개조한다면, 심지어 우리가 우리의 뇌를 개조한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가 이전과 똑같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똑같은 인간이라고 대할까요?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달라진다고 해도 우리의 영혼(성격, 세계관, 사상, 인간성, 기타 등등)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확신이 옳을까요? 흔히 사람들은 쉽게 관념론에 빠집니다. 아무리 21세기 초반이 첨단 과학 시대라고 해도, 사람들은 유물론적인 해석보다 관념론적인 해석을 선호하죠. 이건 유물론과 관념론이 무조건 대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사람들이 관념적이고 초역사적인 해석에 쉽게 물든다는 뜻입니다. 그 자체로서 우리의 영혼(성격, 세계관, 사상, 인간성)이 존재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특정한 육체가 있기 때문에, 특정한 사회 속에서 특정한 육체가 활동하기 때문에, 그런 환경들은 우리의 영혼을 형성했을 겁니다. 따라서 육체가 바뀐다면, 우리의 영혼은 바뀔 겁니다.
흔히 우리는 도덕이 절대적이라고 간주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자체로서 도덕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건 크나큰 오해이고 크나큰 착각입니다. 언제나 도덕은 바뀌었습니다. 불과 200년 전에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를 강간한다고 해도, 그건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법정에서 흑인 여자는 백인 남자에게 불리하게 진술하지 못했습니다. 흑인 여자를 강간한 백인 남자는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흑인들을 찢어죽인다고 해도, 백인 남자는 떳떳하고 당당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이었습니다. 환경(사회 구조)이 그걸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흑인 여자를 강간한 이후, 백인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교회로 가고 기도할 수 있었을 겁니다. 도덕이나 윤리나 관념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우리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신이 절대적인 영혼을 하사했다면, 그 자체로서 성격, 세계관, 사상, 인간성은 존재하겠죠. 하지만 그것들은 물리적인 환경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습니다. 물리적인 환경은 사회 구조가 될 수 있고 육체가 될 수 있습니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는 속담처럼, 육체 상태가 바뀐다면, 정신 역시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외면하고 도덕, 윤리, 영혼, 인간성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고 간주하죠.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성을 숭배하기 원합니다. 사회가 어떤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린다면, 우리는 그런 지배적인 관념이 모든 역사와 문명을 관통할 거라고 믿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헌법을 숭배합니다. 경전처럼 사람들은 헌법을 떠받듭니다. 그들은 태초에 이 우주가 탄생했을 때부터 헌법이 이미 존재했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특정한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그저 헌법은 나타났을 뿐입니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 계몽적이고 근대적인 (부르주아) 사상은 헌법에 많은 영향을 미쳤죠. 사람들은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그 자체로서 헌법이 신성하다고 믿어요.
이건 종교입니다. 이건 신앙이죠. 21세기 초반의 첨단 과학 시대를 살아감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과학자들조차 이런 초역사적이고 초문명적인 신앙을 고수합니다. 이건 망상입니다. 자레드 디랙의 인간성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관계들 속에서 점차 디랙의 인간성은 형성되었습니다. 관념은 형성됩니다. 도덕과 윤리와 영혼과 관념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태초에 이미 존재하거나 초월자가 하사한 뭔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와 신앙에서 깨어나야 할지 모릅니다. <유령 여단>은 생체 개조를 이용해 그런 사례를 보여줍니다. 비록 이 소설은 깊이 들어가지 않으나, 설정은 꽤나 매력적이고, 독자는 이런 설정으로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자레드 디랙은 이런저런 경험들을 쌓고 자아를 형성합니다. 그것들 중에서 자레드 디랙에게 가장 기이한 경험은 애정일 겁니다. 그건 이성과 나누는 애정입니다. 세상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에 디랙에게 밀고 당기고 썸을 타는 과정은 꽤나 흐릿한 안개 같을 겁니다. (심지어 세상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밀고 당기고 썸을 타는 과정은 꽤나 흐릿한 안개입니다.) 여러 사람들은 디랙을 호의적으로 대하나, 디랙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 덕분에 누군가는 디랙을 성심껏 돌봐줘야 해요. 디랙은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죠. 비록 디랙 본인이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고 해도, 사랑은 디랙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노인의 전쟁>에서 존 페리와 아내가 독특하고 새로운 반려 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유령 여단>에서 디랙 역시 독특한 반려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건 두근거리는 첫사랑이라고 표현하기에 많이 애매한 상황이나, 그런 두근거림 역시 소설을 지탱하는 하나의 축인 것 같습니다. 디랙에게 너무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애정은 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지 않고, 이 점은 아쉽습니다. 아니, 애초에 디랙이라는 등장인물을 좀 더 부각하기 위해 그렇게 작가는 연애 이야기를 설정했겠죠. 디랙 이외에 다른 주연 등장인물들 역시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고, 그런 관계들은 시너지를 자아내고 소설을 훨씬 돋보이게 합니다. 오직 존 페리만 쫓아다녔기 때문에 <노인의 전쟁>에서 이런 관계 형성은 부족했죠. 인간과 적대적인 외계인의 건너지 못할 우정이나 호의 같은 감성들 역시 인상적입니다.
어쩌면 어떤 독자는 소설 속의 설정을 현실의 국제 관계에 반영할지 모르겠습니다. 인류를 포함한 수많은 세력들이 재편되고, 어떤 독자는 이것을 현실 속의 국제 관계에 대입할지 모르겠어요. 특히, 장성들이 등장하고 우주 세력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점차 우주 전쟁물에서 우주 정치물로 변모합니다. 따라서 독자는 현실의 정치 구도를 소설 속에서 찾아볼 수 있겠죠. 그건 나쁘지 않은 시도이나, 그건 근본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해석일 겁니다. 소설 속에서 나오는 수많은 변수들이 현실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죠.
현실 속에서 국제 관계는 오직 인간들로만 이루어졌습니다. 아무리 문화와 풍습과 생활이 다르다고 해도 인류는 모두 똑같습니다. 알을 낳는 인간이 있나요? 인간이 개미나 꿀벌처럼 태생적으로 다르게 태어나나요? 뭐,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등한 민족과 열등한 인종과 열등한 계급과 열등한 성별이 우월한 민족과 인종과 계급과 성별을 떠받들어야 한다고 믿을 겁니다. 그건 사실과 다르죠.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는 전쟁을 묘사하기에 좋은 장르입니다. 위기 상황을 조성하기는 너무 쉽죠. 작가가 태생적으로 악독한 외계인을 내보낸다면, 작가는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어요. 독자가 이런 상상 과학을 현실과 너무 연동한다면, 그건 오류겠죠.
<유령 여단>은 <노인의 전쟁>을 이용해 좀 더 멀리까지 나가는 소설입니다. 좀 더 파격적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싶은 아쉬움은 없지 않으나, 존 스칼지는 묵직한 주제와 하드한 설정 속에서 능수능란함을 잃지 않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