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울창한 숲의 어두운 이미지들 본문
[인류 문명에게 울창한 숲들은 위험하고 적대적이고 낯설고 어둡고… 신비롭습니다.]
소설 <미사고의 숲>은 말 그대로 숲이 주된 무대입니다. 어딘지 신비롭고 위험하고 야생적인 태고의 숲입니다. 어찌 보면,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작가인 로버트 홀드스톡이 다른 배경도 아니고 하필 숲을 고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시 문명과 대착점에 서있는 장소니까요. 현대적인 도시와 반대되는 곳이 무성한 숲이고, 그래서 강렬한 원시성을 잉태할 수 있죠. 사실 작중에 나오는 거대한 원시림이 아니라 뒷산만 올라가봐도 숲이 얼마나 음험한지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온통 가려서 빛이 안 들어옵니다. 주변은 컴컴하고, 빽빽한 줄기 때문에 시야가 멀리까지 닿지 않죠. 어떤 인류학자는 인간이 본래 평원에서 살던 동물이라 숲이 익숙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목가적인 풍경은 널찍한 풀밭이지, 빽빽하고 검은 숲이 아니죠. 요즘에는 도시화에 질린 사람들이 오히려 숲을 찾지만, 본래 숲은 인간에게 그리 친숙한 장소가 아닐 겁니다. 차라리 호랑이나 마녀한테 어울리죠.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들이 인간에게 지친 나머지 숲을 찾는다고 말했어요. 이 말을 뒤집어보면, 숲은 비인간적인 장소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인류 문명과 대비되는 숲의 속성을 여러 창작물들은 자주 반복합니다. 특히, 비일상적인 풍경을 강조하는 장르 창작물에서 애용하죠. 가령, 예전에도 말한 것처럼 비경 탐험물의 주된 탐사 장소 중 하나는 열대 밀림입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의 거대한 밀림은 유럽과 북미의 도시 문명과 대조적입니다. 거기에 뭐가 살지 알 수 없습니다. 독침을 날리는 식인종이 살거나, 거대한 육식공룡이 도사리거나, 위험한 마귀할멈이 은신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오래 전에 멸망한 외계 유적이 인적 없는 수해에 묻혔을 수 있죠.
밀림은 이른바 문명인에게 살벌한 장소이고, 그래서 모험 장소로 더없이 알맞습니다. 사방에 나무가 들어차서 함부로 들어가거나 나갈 수도 없습니다. 거의 야외 던전이라고 해도 무방할 겁니다. 19세기에도 그랬지만, 20세기가 지나고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밀림은 비경 탐험의 대상으로 각광을 받습니다. <콩고> 같은 테크노 스릴러도 그랬고, 왜 <소멸의 땅> 같은 소설이 그토록 숲에 집착했겠어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도 도시를 침범하는 숲이 종종 나옵니다. 이런 걸 자연의 귀환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인류가 사라지니까 더 이상 벌목을 당하지 않는 자연 환경이 빈자리를 채웁니다. 이는 <미사고의 숲>에서 떡갈나무들이 집을 밀어내는 거랑 비슷하게 보입니다. 원인은 다르지만, 자연 환경이 인류를 밀어낸다는 점에서 똑같죠. 특히, 초기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이런 게 자주 나왔습니다. <애프터 런던> 같은 작품은 야생적으로 변한 영국을 그립니다. 요즘에는 질병이나 좀비 아포칼립스 때문에 사람이 사라지면, 숲이 번성하는 묘사가 유행입니다. 영화 <나는 전설이다>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이 그런 풍경을 보여줍니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도 유명하고요. 이 게임의 각종 스크린샷은 정말 '숲이 밀고 들어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단적으로 보여주죠. 리처드 제프리 같은 작가가 이런 게임을 본다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군요.
하지만 자연 환경이 도시에 침투한다고 해서 항상 나쁘게 보는 것만은 아닙니다. 인류가 자연을 망친다는 인식이 널리 알려졌기에 이런 숲의 무성함을 침투가 아니라 복원으로 보는 시각도 생겼거든요. 호랑이와 늑대를 더 이상 피에 굶주린 악마로 보지 않는 시각이랑 비슷합니다. <물에 잠긴 세계> 같은 소설은 숲의 번성을 낯설게 바라보지만, <라스트 오브 어스>는 똑같은 상황을 아름답게 치장하죠. 하지만 숲의 번성을 낯설게 바라보는 창작물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만적인 사냥꾼으로서 프레데터는 밀림이라는 자연 환경을 무시무시하게 이용하죠.]
스페이스 오페라와 행성 로맨스도 밀림을 자주 써먹습니다. 특히, 외계 생태계와 생물학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작품에서 그런 면모가 두드러집니다. 밀림에는 수많은 생명이 서식하는데, 대부분 그들은 복잡한 생존 경쟁 속에서 진화했습니다. 그래서 인류가 상상 못할 별별 괴물들이 숱하고, 행성을 개척하는 인간이 곤경에 처합니다. 이런 밀림에 감히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알타이르의 바람> 같은 소설처럼. 현대 도시인이 아무런 준비 없이 아마존 우림에 낙오되는 격입니다. 엄정하게 훈련한 해병대라도 식인식물, 괴상한 포식자들, 흉측한 독충, 잔인한 파충류를 감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는 19세기 백인 탐험대의 험난했던 여정을 반영한 설정이죠.
물론 외계 밀림에는 양면성이 존재합니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여러 생명을 품은 모성애도 간직합니다. 이렇게 모성애를 강조하는 작품에서 위기에 처한 쪽은 인간이 아니라 밀림입니다. 인류는 숲을 밀어내려고 애쓰고, 숲의 거주민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죠. (예전에도 삼림 벌채의 사례는 수두룩했으나) 20세기 이후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삼림 벌채를 비유하는 설정입니다.
특히 생태주의 쪽에서는 인류가 가해자이고, 숲이 피해자라고 내세우는 편입니다. 물론 생태주의 창작물이 무조건 상황을 단순하게 도식화하는 건 아닙니다. 숲을 아낄 필요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걸 대놓고 써먹는 것도 식상한 주제니까요. 그렇다고 해도 온갖 생명들이 가득한 숲은 생태주의 가치를 호소할만한 근거로 충분하고 매혹적입니다. 그렇기에 외계 행성에서 인류가 온갖 못된 짓을 저지르고, 외계 동물들이 신음한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나오죠.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이런 소설의 대표 주자일 겁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나 행성 로맨스를 전반적으로 비교한다면, 아마 숲을 적대적이거나 낯선 장소로 표현하는 창작물들이 훨씬 많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지키고 꾸려가야 하는 자원이자 또 다른 생명체들의 삶터가 아니라…. 살인적인 야생 괴수가 설치는 장소이죠.
종종 적대적인 침략 외계인들이 자기네 숲을 인간들 사이에 퍼뜨릴 수 있습니다. 외계인이 지구를 포섭하면, 그냥 눌러앉지 않고 자기네 환경에 맞게 고칠 수도 있습니다. 고향별에서 가져온 종자를 적당히 뿌려서 생태계 변화를 일으키는 거죠. 그래서 좀 희한하게 생긴 식물이 자라나기도 하고…. 인류 입장에서는 이렇게 자라나는 숲이 재앙으로 보일 겁니다. 일반적인 지구의 숲도 적대적일 수 있으나, 외계의 숲은 그보다 훨씬 더하겠죠. <우주 전쟁>에서 화성인들의 환경을 상징하는 요소는 불길하고 혐오스러운 붉은 식물입니다.
게다가 숲은 문명과 멀리 떨어졌다는 특성상 무인도와 같습니다. 주인공을 외딴 곳에 고립시키기 딱 알맞습니다. 덕분에 고전적인 하워드 러브크래프트 소설부터 3류 영화까지 여러 공포물이 자주 써먹습니다. 무장한 특수부대부터 지나가는 한량까지 괜히 숲에 들어왔다가 험한 꼴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철부지 여행자들이 숲 속 오두막에 놀러갔다가 괴물들에게 쫓긴다는 플롯은 아주 전형적이죠. 아예 이걸 소재로 삼아 노골적인 비틀기를 시도하는 영화까지 나오지 않습니까. <숲 속 오두막>에 괜히 그런 제목이 붙은 게 아니겠죠.
또한 스티븐 킹이 쓴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는 이런 공포물을 어린 소녀의 생존기와 결합시킨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어리기 때문에 숲이 더욱 무섭게 느껴지는 것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삼림은 인간을 압도하기 쉽습니다. 가끔은 유령이나 괴물만 아니라 적대적인 외계인이 깊은 숲에서 활동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외계인은 활동 배경에 알맞도록 다소 원시적이거나 야만적인 모습입니다. <프레데터>에 나오는 프레데터는 항성 여행이 가능한 초고도 기술을 보유했지만, 정작 외모는 추레하고 야성적인 정글 사냥꾼이죠.
[숲은 또 다른 공간입니다. 울창한 숲은 또 다른 차원이고, 어쩌면 이건 살아있을지 모르죠.]
때때로 이러한 숲 자체가 어떤 지성체일 수도 있습니다. 생물이 아니라 지형에게 의식이 존재한다는 장르 소설도 많죠. 가치관의 전복을 시도하는 게 SF 장르의 특기니까요. 예를 들어, 플라즈마 바다로 이루어진 행성을 찾았다고 하죠. 그런데 그 바다는 어딘지 자의식이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드물게 인간과 소통을 시도합니다. <솔라리스>는 이런 발상으로 출발한 작품이죠. 개개의 나무뿐만 아니라 숲이라는 지형 자체도 얼마든지 그런 자의식을 보유할 수 있어요. 인류가 예전부터 숲을 마주한 두려움이나 신비함 때문에 그런 설정은 낯설지 않습니다. 동화책만 봐도 무시무시하게 생긴 나무 정령이 쫓아오는 장면이나 우아한 숲의 요정이 도와주는 장면은 흔하게 나오잖아요. 사람들이 어두운 숲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드러내는 장면이죠.
SF 설정에서는 한 단계 더 나가서 진정한 자의식을 부여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인상적인 소설이 <플레이보이 SF 걸작선>에 실렸던 <여신 마이라>입니다. 인간이 외계 행성 밀림에 동화되는 과정을 의식의 흐름으로 나타냈는데, 뉴웨이브 SF 소설다운 경탄을 일으킵니다.
이와 같이 장르 창작물에서 울창한 숲은 적대적이나 위협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비경 탐험물은 숲을 신나고 위험한 모험 장소라고 여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숲은 도시로 밀고 들어오고, 인간이 사라진 세상임을 증명합니다. 외계 행성의 밀림은 괴수들의 은신처가 되고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입니다. 공포물도 숲을 유용하게 써먹고, 울창한 숲은 그 자체로 하나의 지성체가 되고 인간을 압박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울창한 숲이 장르 창작물에서 항상 위협적인 장소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이나 그 외에 다양한 작품들처럼 숲을 아름답고 싱그럽고 성스러운 장소로 이야기하는 창작물들도 많습니다. 본문의 사례는 그저 일부에 불과하죠.
그럼에도 적대적인 숲을 묘사한 창작물들을 늘어놓은 이유는 여전히 많은 현대 (문명)인들이 숲을 문명의 대척점으로 여기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실 속의 인류 역시 숲과 다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도시를 세우기 원하는 문명은 숲을 방해물처럼 볼 겁니다. 거기에 온갖 맹수와 야생 동물이 살면 더욱 그렇고요. 시대가 흐르고 도시화가 심해지면서 인류 문명이 숲과 대치한 건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군함을 건조하거나 집을 짓거나 홍수를 예방하거나 혼합 농작을 위해 숲을 보존하자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숲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생각이 달랐죠. 누군가는 과실수를 심었고, 누군가는 관목을 가꾸었고, 누군가는 혼합림을 선호했습니다.)
환경 사회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는 숲과 적대적이거나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그런 관계는 시대와 지역과 경제 구조에 따라 수시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숲이나 밀림은 상당히 줄어들었고, 여전히 각종 위협에 시달립니다. 진보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에 숲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그게 성장이나 문명의 발전을 뜻한다고 생각하죠. 문명의 발전을 위해 숲은 사라져야 합니다. 거꾸로 말해 만약 숲이 그대로 남아있는다면 그건 문명의 발전을 가로막는 상징입니다. <미사고의 숲>이 암시했듯 어쩌면 그런 시각이 각종 장르 창작물에 반영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현대 인류가 더 이상 숲을 적대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무분별한 개발이 대규모 환경 오염을 초래하는 이상,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숲을 밀어내려는 시도에 저항해야죠. 저는 외계 괴수들이 우글거리는 울창한 숲을 좋아하지만, 이런 설정이나 이미지는 그저 17세기나 18세기 사상의 반영이 아닌가 합니다. 숲을 공포의 대상, 낯선 장소로 바라보는 시각보다 인류의 안녕과 자연적 유산을 가꿔주는 장소로 바라보는 시각이 늘어났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