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우주 탐사물이라는 하위 장르 본문
[이런 이야기는 우주 탐사에 속할 수 있겠죠. 하지만 우주 탐사라는 하위 장르는 없어요.]
영문 위키피디아는 '사이언스 픽션' 항목에서 사이언스 픽션의 하위 장르를 여러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똑같이 SF 소설로 불린다고 해도 하위 장르는 다를 수 있죠. <유년기의 끝>과 <쿼런틴>과 <유령 여단>과 <마션>이 서로 다른 것처럼. 아마 누군가는 <마션>이 SF 소설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아마 듀나가 예전에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를 SF 영화가 아니라고 평가했죠. 그것처럼 누군가는 <마션>이 SF 소설이 아니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이 소설이 정말 사이언스 픽션인지 논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군요.)
아무튼 영문 위키피디아는 사이언스 픽션의 하위 장르를 여러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사이버펑크, 시간 여행, 대체 역사, 밀리터리 SF, 초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스페이스 오페라, 사이언스 판타지, 사변 소설, 기후 변화, 바이오펑크 등등. 흠, 기후 변화도 사이언스 픽션의 하위 장르가 되는군요. 이건 차라리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이렇듯 SF 소설들은 다양한 갈래로 나뉩니다. 어쩌면 앞으로 누군가가 새로운 하위 장르를 만들지 모릅니다. 이미 SF 작가들은 수많은 미래를 상상했고, 더 이상 다른 하위 장르가 나올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첨단 기술은 꾸준히 발달하는 중입니다. 지금도 해외 SF 시장에는 쉽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별별 소설들이 있겠죠.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저런 하위 장르 속에서 <라마와의 랑데부> 같은 소설은 어디에 속할까요. <라마와의 랑데부>는 우주 탐사대를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지구의 우주 탐사대는 초거대 외계 우주선을 탐험하고, 어마어마한 경외에 사로잡힙니다. 독자 또한 경외에 사로잡힙니다. 우주의 무중무진함 덕분에 아서 클라크의 소설을 읽는 독자는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고 하죠. <라마와의 랑데부>는 인간이 너무 작아보이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영문 위키피디아가 분류한 하위 장르에 속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사이버펑크, 시간 여행, 대체 역사, 밀리터리 SF, 초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스페이스 오페라, 사이언스 판타지, 바이오펑크, 사변 소설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음, 어쩌면 누군가는 이 소설을 그냥 하드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부를지 모르겠습니다. 네, 그 말은 맞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대표적인 하드 SF 소설입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쿼런틴> 또한 하드 SF 소설입니다. 그리고 <쿼런틴>은 <라마와의 랑데부>와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차라리 <중력의 임무>나 <블라인드 사이트> 같은 소설이 <라마와의 랑데부>에 훨씬 가까울 겁니다.
혹은 <별을 쫓는 사람들> 같은 소설이 <쿼런틴>보다 <라마와의 랑데부>에 가까울 수 있죠. <별을 쫓는 사람들>은 하드 SF 소설이 아니지만, 역시 우주 탐사대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SF 소설의 통속적인 이미지, 우주 탐험이 주된 소재입니다. 그렇다면 <라마와의 랑데부>를 비롯해 <중력의 임무>, <블라인드 사이트>, <별을 쫓는 사람들> 같은 소설들은 '우주 탐사 소설' 혹은 '우주 탐험 소설'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겁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네메시스>, 론 허바드의 <투 더 스타>, 제임스 팁트리의 <마지막으로 할 만한 멋진 일>, 이재창의 <기시감>도 이런 우주 탐사 소설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죠.
<별을 쫓는 사람들>과 달리 저런 소설들에는 진지한 우주 탐사대가 나오지 않으나, 주인공은 외계 환경을 탐사하고 그 과정에서 모험을 겪기 때문입니다. 사실 <투 더 스타>는 탐사도 아니고 그저 여행이나 항해만을 말하지만, 그렇다면 이 소설을 '우주 항해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주 탐사 소설이든 우주 항해 소설이든, 이런 하위 장르는 위키피디아 항목에 나오지 않습니다. 영문 위키피디아는 우주 여행(스페이스 트래블)이 사이언스 픽션의 주된 기술적 소재라고 말했을 뿐이고, 우주 여행을 하나의 장르로 분류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주 탐사와 우주 항해는 SF 소설의 대표적이고 고색창연하고 통속적이고 제일 유명한 이미지일 겁니다. 심연의 검은 우주와 화려한 성운과 낯선 외계 생태계와 최첨단 우주선과 엘리트 승무원들…. 이게 진짜 SF 소설이 아니겠습니까. 다른 하위 장르를 무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류는 우주에 아직 닿지 못했고, 그만큼 우주 탐사는 로망을 자극한다는 뜻입니다. 솔직히 저는 사이버펑크, 시간 여행, 포스트 아포칼립스, 대체 역사, 초인보다 우주 탐사야말로 진짜 SF 이미지를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좀 재미가 없더라도 우주 탐사 소설은 그 자체로 로망을 물씬 풍깁니다. 하지만 의외로 우주 탐사는 하위 장르 명칭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사이버펑크, 시간 여행, 포스트 아포칼립스, 대체 역사와 달리 우주 탐사는 하위 장르 명칭이 아닙니다. 기술적 소재라면 몰라도…. 저는 왜 이 장대한 소재가 하위 장르로 분류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다못해 괴수물 같은 쌈마이한(?) 하위 장르도 분류되는 마당에…. 해외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우주 탐사물'이라는 장르 명칭은 그리 흔히 쓰이지 않는 듯합니다. 우주 탐사물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이건 좀 아쉬운 현상입니다.
저는 '우주 탐사물'이라는 용어를 널리 퍼뜨리고 싶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군요. 공상 과학이라는 용어를 과학 소설이나 과학적 상상력으로 바꾸자고 운동하는 것처럼 우주 탐사물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