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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탐험이 SF 소설을 이끌어내다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탐험이 SF 소설을 이끌어내다

OneTiger 2017. 6. 7. 20:00

[이런 이야기는 모험보다 탐험에 가깝겠죠. 문자 그대로 비경 탐험은 탐험입니다.]



모험은 검마 판타지 소설의 꽃일 겁니다. 검마 판타지 소설이 진지하거나 유쾌하거나 동화거나 성인 소설이거나 어쨌거나 모험은 검마 판타지 소설의 꽃인 것 같습니다. 소설 <반지 전쟁>에서 하플링, 인간, 엘프, 드워프는 무리를 이루고 암흑 군주의 무시무시한 마법 장비를 파괴하기 위해 모험을 떠납니다. 소설 <은색의 강>에서 날렵한 다크 엘프, 묵직한 드워프, 교활한 하플링, 북방의 야만 전사는 무리를 이루고 깊고 깊은 미스랄 왕국으로 모험을 떠납니다.


소설 <에라곤>에서 주인공과 주인공의 스승과 용 한 마리는 저항군의 알려지지 않은 은신처를 찾아 모험을 떠납니다. 이처럼 수많은 검마 판타지 소설들은 모험을 이야기합니다. 주인공들은 무리를 이루고,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세계와 낯선 종족과 낯선 문화를 마주합니다. '머나먼 타지를 향해 고향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검마 판타지에서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건 검마 판타지의 초석을 이룹니다. 프로도 배긴스가 그랬고, 드리즈트 도우덴이 그랬고, 에라곤이 그랬던 것처럼.



한편으로 '머나먼 타지를 향해 고향을 떠나는 주인공'은 SF 비경 탐험 소설에서도 서두를 장식합니다. <잃어버린 세계>, <해저 2만리>, <지구 속 여행>, <광기의 산맥>, <콩고>, <멸종>, <라마와의 랑데부>, <별을 쫓는 사람들>, <중력의 임무>, 기타 등등…. 이런 소설들 속에서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고 낯선 세계와 낯선 종족과 낯선 생태계를 마주합니다. 따라서 검마 판타지 소설과 비경 탐험 소설은 모두 '고향을 떠나고 낯선 세계를 떠도는 주인공'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잃어버린 세계>나 <지구 속 여행>, <멸종>, <라마와의 랑데부>, <중력의 임무>가 검마 판타지 소설처럼 '모험'을 노래할까요. 모험이 비경 탐험 소설의 꽃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글쎄요, 분명히 <잃어버린 세계>나 <멸종>이나 <중력의 임무>는 어드벤처 소설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하지만 모험(어드벤처)는 저런 소설들의 핵심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런 소설들은 모험 소설이 아니라 '탐험 소설'이라고 불려야 할 겁니다. 익스플로어든 익스페디션이든 뭐든 <잃어버린 세계>나 <멸종>이나 <중력의 임무>에서 중요한 것은 탐험이지 모험이 아닙니다.



모험과 탐험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모험가와 탐험가는 똑같이 고향을 떠나고 낯선 세계를 방황합니다. 하지만 모험가와 달리 탐험가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지식의 습득이죠. 현실 속의 전형적인 탐험가, 알렉산더 훔볼트나 알프레드 윌리스 같은 사람은 다른 대륙의 동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박물학자로서 명성을 남겼죠. <잃어버린 세계>나 <멸종>이나 <중력의 임무>의 주인공들도 알렉산더 훔볼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세계>에서 주인공들은 남아메리카 열대 밀림의 고대 생태계를 조사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멸종>에서 주인공들은 고대 생태계를 조사하기 위해 아예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중력의 임무>에서 주인공들은 우주선의 자료를 회수하고 지리를 탐색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물론 낯선 세계는 낯선 위험들로 가득하고, 탐험은 곧잘 모험으로 변하곤 합니다. 주인공들은 온갖 괴수나 적대적 종족과 마주치고, 급기야 커다란 싸움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저런 소설들의 핵심은 지식 습득이나 학술 답사이고, 전투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저는 SF 비경 탐험 소설들이 알렉산더 훔볼트나 알프레드 윌리스의 정신적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SF 비경 탐험 소설들은 저런 과학자들의 탐험과 비슷해 보입니다. 비경 탐험 소설들도 검마 판타지 소설처럼 모험을 노래할 수 있으나, 주인공들의 우선적인 목적은 과학 연구입니다. 과학 연구가 탐험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겠죠. 뭔가 신비롭고 이질적이고 기이한 것들이 '문명 밖'에 있기 때문에.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경 탐험물이 항상 과학 연구에만 매달린다고 볼 수 없을 겁니다. 탐험은 모험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저 모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탐험을 집어넣는 소설들도 많겠죠. 중요한 것은 과학 연구가 사람들을 '문명 밖'으로 끌어내는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과학 연구는 비경 탐험과 필연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겠죠.



저는 SF 소설이 19세기 유럽에서 탄생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발달이 탐험을 이끌었고, 그 당시 유럽은 제일 잘 나가는 탐험 문명이었죠. (그래서 수많은 정복과 수탈과 학살을 저질렀고요.) 유럽 작가들은 이런 탐험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프랑켄슈타인>은 최초의 본격적인 SF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소설의 서두는 극지방 탐험이고요. 이는 그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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