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노래하던 새들도 사라지고>의 비경 탐험 본문
소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복제인간들이 등장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죠. 인류 문명은 붕괴했고, 인류는 사라졌고, 복제인간들만 살아남았습니다. 이 복제인간들은 작은 마을에서 오손도손 살아가지만, 이내 더 이상 작은 마을에만 머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은 더 많은 물품이 필요합니다. 과학자들은 복제 기술을 더 향상시키고 싶어합니다. 기존 장비들이 고장이 나거나 마모가 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물품이나 장비를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미 인류 문명은 붕괴했다는 사실입니다. 작은 마을 외부는 모두 폐허이고, 거기에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복제인간들은 그저 마을 안에서만 살았고, 따라서 마을 밖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이 복제인간들은 일종의 암흑기에 사는 중입니다. 중세 사람들이 바다 건너 세상을 잘 몰랐던 것처럼 복제인간들 역시 마을 외부의 지리나 상황을 전혀 모릅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마을 밖으로 나가고, 낯선 도시와 지형을 파악하고, 쓸만한 물품을 탐색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탐사라는 행위에 많은 비중을 쏟습니다. 소설 속에서 탐사 과정은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복제인간들은 탐사대를 조직하고, 탐사대는 배를 타고 마을 밖으로 나가고, 낯선 도시와 낯선 숲을 둘러봅니다. 대재앙 탓에 도시는 이미 무너졌고 아무도 살지 않으나, 탐사대는 귀중한 정보와 각종 자료, 여러 물품들과 장비들을 얻습니다. 탐사대는 그것들을 가지고 작은 마을로 돌아가고, 커다란 환영을 받습니다. 문제는 이게 전혀 쉽지 않은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제인간들은 탐사를 두려워하고 거부합니다.
아, 물론 탐험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모험 소설들은 탐험을 낭만적으로 포장하곤 하지만, 그건 소설 속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집을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처럼 탐험가들은 낯선 세상에서 죽도록 고생해야 합니다. 하지만 복제인간들은 그저 그런 이유 때문에 탐사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복제인간들이 공동체에 너무 익숙하다는 사실입니다. 복제인간들은 이름 그대로 복제인간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그들은 자매들이나 형제들과 함께 자랍니다.
따라서 그들은 공동체에 익숙합니다. 그들은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립니다. 복제인간들은 그런 공동체를 떠난다고 상상하지 못합니다. 만약 어떤 복제인간이 자신의 자매들이나 형제들과 떨어진다면, 그 복제인간은 즉시 정신병에 걸립니다. 미치거나 발광하거나 기절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홀로 낯선 건물에 들어가거나 숲 속에서 야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작은 마을을 떠나지 못합니다. 복제인간들은 작은 마을 안에 살고 자매들과 형제들과 계속 어울리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자아는 무너집니다.
그래서 복제인간들은 탐사대를 꾸리지 못합니다. 탐사대는 자주 실패하고, 탐사대원들은 미치거나 죽거나 기절합니다. 원래 탐험은 쉽지 않으나, 복제인간 탐사대는 고독과 적막이라는 낯선 장애물에 부딪혔죠. 하지만 기이하게도 누군가는 이런 상황에 적응합니다. 그 사람은 고독과 적막을 즐깁니다. 그 사람은 다른 자매들이나 형제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독창적으로 생각하거나 낯선 길을 찾거나 숲 속에서 야영하는 행위에 기쁨을 느낍니다. 이 사람은 탐사대의 길잡이로 적격이죠.
그래서 이 길잡이는 탐사대를 이끕니다. 탐사대가 낯선 지역으로 들어서기 전에 길잡이는 홀로 무너지 도시를 헤매고, 숲을 돌아다니고, 강물을 거스릅니다. 길잡이는 곳곳을 살피고, 지도를 만들고, 어디가 오염되었거나 위험한지 살핍니다. 이 길잡이의 여정은 마치 비경 탐험처럼 보입니다. 사실 비경 탐험일 겁니다. 복제인간들은 무너진 도시와 낯선 숲이 비경이라고 생각하죠. 작은 마을은 안락한 장소이고, 그 외부의 도시들과 숲들은 비경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의 탐사 과정은 독특하게 보입니다. 탐사 과정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형제들이나 자매들과 달리 이 길잡이는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고독은 이 길잡이에게 기쁨입니다. 그래서 소설의 고독과 적막은 꽤나 두드러집니다.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고독과 적막을 강조하지만,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적막과 고독은 좀 더 특별합니다. 그 적막과 고독이 함께 하는 탐사는 더 특별합니다. 그 길잡이가 복제인간임에도 적막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의 탐사 과정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편으로 이 길잡이는 검마 판타지의 모험가 일행과 닮았습니다. 모험가 일행은 낯선 던전 속을 헤매고, 지도를 만들고, 위험을 파악하고, 보물을 얻습니다. 그것처럼 이 길잡이는 낯선 도시를 헤매고, 지도를 만들고, 위험을 파악하고, 중요한 자료나 장비를 얻습니다. 한편으로 이 길잡이를 스토커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노변의 피크닉>에서 스토커들은 이상 구역에 들어가고, 위험을 무릅쓰고, 귀중한 물품을 얻죠.
그것처럼 길잡이는 이상한 도시로 들어가고, 위험을 무릅쓰고, 귀중한 물품들을 얻습니다. 어쩌면 이건 너무 비약적인 비유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탐사라는 행위가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탐사대는 낯선 지역을 돌아다니고, 위험을 파악하고, 지도를 작성하고, 뭔가 새롭거나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게 탐사나 탐험의 본질이죠. 그래서 저는 저 길잡이와 모험가 일행과 스토커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좀 엉뚱한 비유일지 모르나, 비약은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