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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물에 잠긴 세계>와 <드라운드 어스>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물에 잠긴 세계>와 <드라운드 어스>

OneTiger 2017. 8. 30. 20:00

[물에 잠긴 폐허. 포스트 아포칼립스. 거대한 공룡들. 이런 분위기는 <물에 잠긴 세계>와 비슷합니다.]



<드라운드 어스>라는 미니어쳐 게임이 있습니다. 제목처럼 지구 곳곳은 물에 잠긴 듯합니다. 덕분에 기존의 문명 세계는 멸망했고, 원시 시대가 다시 찾아왔고 자연은 도시를 침범했습니다. 울창한 밀림들은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도시 역시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도시는 밀림과 건물들의 조합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거대한 공룡들이 물에 잠긴 지역들과 빽빽한 밀림 속을 돌아다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몇몇 탐사대가 밀림과 버려진 도시와 야생을 떠돕니다. 그들은 뭔가 중요한 물건들이 밀림과 도시와 기타 다른 장소들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발견하기 위해 위험한 세상으로 들어왔습니다. 때때로 탐사대는 공룡과 싸우거나 다른 폭력 조직과 싸우거나 낯선 지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줄거리를 읽었을 때, 어쩐지 <물에 잠긴 세계>가 떠올랐습니다. <물에 잠긴 세계>의 영어 제목은 <드라운드 월드>죠. <드라운드 어스>와 <드라운드 월드>. 흠, 서로 비슷하지 않나요. 비단 제목만 아니라 설정과 줄거리 역시 비슷합니다. <물에 잠긴 세계>에서 말 그대로 지구 곳곳은 물에 잠겼고, 덕분에 기존의 문명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원시 시대가 다시 찾아왔고 자연은 도시를 침범했습니다. 울창한 밀림들은 곳곳에 자리를 잡았고, 도시 역시 예외가 되지 못합니다. 물론 <물에 잠긴 세계>에서 공룡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룡들 대신 바다 이구아나들과 바다 악어들이 공룡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소설 주인공은 해양 파충류들에게 둘러싸이고, 자신이 원시 파충류 시대로 돌아갔다고 느낍니다. 비록 이 소설은 공룡 소설이 아니지만, 그 어떤 공룡 소설에도 뒤쳐지지 않을 만큼 강렬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잃어버린 세계>나 <쥬라기 공원>이나 <공룡과 춤을> 같은 소설이 공룡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물에 잠긴 세계> 역시 공룡 소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꽤나 독특한 공룡 소설이죠. 이 소설에도 탐사대가 등장하고, 폭력 조직이 등장하고, 주인공은 뭔가 귀중한 물건을 찾아 깊고 깊은 물 속으로 잠수합니다. 물에 잠긴 도시는 상상력을 아련하게 자극하고, 뭔가 멀고 아득한 심연을 건드리는 듯합니다. 덕분에 몇몇 탐사대원들은 울창한 밀림 속을 방황합니다. 자연 환경은 사람들의 심상을 장악하고 통제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드라운드 어스>가 <물에 잠긴 세계>를 오마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설정과 줄거리와 개요를 읽었으나, 저는 게임 제작진이 제임스 발라드를 오마쥬한다는 내용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임스 발라드 이후 저런 설정은 진부한 유형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제임스 발라드 이전에 이미 그런 소설들이 등장했습니다. <애프터 런던> 같은 소설이 그렇습니다. 게다가 이건 19세기 소설이죠. <애프터 런던>의 부제는 <야생의 잉글랜드>입니다. 자연이 런던을 장악했고, 그래서 사람들은 울창한 삼림 도시(?)를 돌아다니죠.


따라서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도시가 물에 잠기거나 삼림이 도시를 장악한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롭지 않을 겁니다. <드라운드 어스>를 구상했을 때, 게임 제작진은 그런 상투적인 설정을 따랐을 뿐이겠죠. 하지만 <드라운드 어스>가 <물에 잠긴 세계>를 오마쥬하지 않았다고 해도 제임스 발라드의 소설과 보드 게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분명히 어떤 공통점들이 있겠죠.



(보드 게임들과 비디오 게임들을 비롯해) 여러 SF 게임들을 볼 때마다 저는 소설과 게임의 관계를 생각하곤 합니다. 저는 SF 소설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제가 읽은 SF 소설들은 전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SF 게임들을 볼 때마다 그 속에서 SF 소설들의 흔적을 느끼곤 합니다. 설사 게임 제작진들이 SF 작가들을 오마쥬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SF 소설들을 참고했을 겁니다. 19세기부터 SF 작가들이 꾸준히 설정을 쌓고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SF 게임 역시 등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애프터 런던>과 <물에 잠긴 세계>가 없었다면, <드라운드 어스> 역시 등장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소설과 게임은 서로 다른 매체이나, SF 소설들이 오래 전부터 상상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SF 게임은 그걸 이용할 수 있었죠. 저는 이런 관계를 살펴볼 때마다 문화가 다른 유형으로 재생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재생산이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그래서 19세기 소설들이 낡았다고 해도 함부로 골동품으로 취급하지 못하겠더군요. 그 속에는 아직 우리가 재생산할 수 있는 요소들이 담겼기 때문입니다.



※ <드라운드 어스>는 비록 상투적인 설정을 이용했으나, 저는 이 게임이 꽤나 근사하다고 느꼈습니다. 울창하고 낯설고 위험한 자연 환경. 그 자연 환경을 떠도는 탐사대. 공룡 같은 괴수들. 추격과 총격전과 기습. 이야~, 이거 진짜 로망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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