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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아서 클라크와 이반 예프레모프의 시선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아서 클라크와 이반 예프레모프의 시선

OneTiger 2017. 4. 11. 20:00

[우주 진출은 장엄합니다. 인류는 평등하게, 함께 우주로 진출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아서 클라크의 단편 소설 전집을 보면, 장대한 우주 항해가 자주 등장합니다. <달을 향한 모험>, <하늘의 저편>, <머나먼 지구의 노래> 등이 그렇습니다. 모두 인류의 웅장한 우주적 확장을 찬미합니다. 지구는 생명의 보금자리지만, 인류는 지구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달에 정착하고, 화성을 개척하고, 태양계에 각종 식민지를 세우고, 기어코 다른 항성계로 향합니다. 바야흐로 인류는 여기저기에 퍼지고, 더 머나먼 우주로 계속 진출합니다.


아마 SF 독자들이 아서 클라크에게 바라는 장면은 이런 것들이겠죠. 광대한 우주, 인류의 진출, 장엄한 항해, 무한한 확장. 아서 클라크는 겨우 지구에 시선을 두지 않습니다. 이 작가의 시선은 훨씬 먼 곳을 바라봅니다. 만약 <하늘의 저편>이나 <머나먼 지구의 노래>를 읽으면, 지구가 너무 좁다거나 자신이 너무 작아 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서 클라크의 소설을 읽으면, 너무 경외적이기 때문에 죽음조차 경건해 보인다고 하죠. 뭐, 클라크를 너무 과대 평가할 수 있겠으나, 어쨌든 이 작가가 경외적인 우주 진출을 묘사한다는 점에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시선이 우주로 올라가면, 지구로 내려오지 않아요.



하지만 저런 우주적 소설들을 읽으면,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너무 머나먼 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주변을 미처 둘러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무한한 확장과 장엄한 항해. 네,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 떠나기 전에 우리 주변부터 둘러보면 어떨까요. 우리 주변에 모순적인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착취와 수탈과 오염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십 억 명이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자연 환경은 오염되었고, 생물 다양성은 급속하게 줄어듭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그저 마음 편히 우주에 눈을 돌릴 수 없습니다. 미세 먼지들이 우주를 가리기 때문에 우주를 볼 수 없습니다. 굶주리는 사람들과 멸종되는 동물들을 쳐다보기 바빠서 우주에 시선을 돌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왕 우주 진출을 노래하고 싶다면, 하늘만 쳐다볼 게 아니라 주변도 둘러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기 머나먼 외계 항성보다 당장 우리 주변의 자연 환경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아서 클라크도 회의적인 시선을 던지거나 인류 문명을 곧잘 비판합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 전체를 무턱대고 비판하면, 너무 대책이 없는 행위일 겁니다.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지 명료하게 밝히고, 그런 착취 구조를 끝내도록 기득권을 비판해야죠.



그래서 저는 아서 클라크를 읽으면, 이반 예프레모프가 동시에 떠오릅니다. 이반 예프레모프도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아서 클라크만큼 웅장한 우주 항해를 노래합니다. 이 소설은 인류의 무한한 확장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반 예프레모프는 그저 우주만 바라보지 않습니다. 우주로 진출하기 이전에 인류는 우선 하나로 통합해야 합니다. 밑바닥 사람들이 없도록, 인종과 성별과 국경 때문에 차별을 받지 않도록, 자연 환경이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프레모프는 우주 진출을 논하기 이전에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그렸습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우주 진출을 위한 밑거름입니다. 저는 아서 클라크보다 이반 예프레모프의 시각이 더 마음에 듭니다. 아서 클라크가 너무 하늘만 바라본다면, 이반 예프레모프는 우리 주변부터 하늘까지 단계적으로 바라봅니다. 예프레모프도 왕년의 빨갱이(?)답게 자연 생태계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이건 분명히 강하게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저는 예프레모프의 시선이 마음에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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