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금단의 세계를 항해하는 로망 본문
[영화 <딥 임팩트>의 한 장면. 미래에도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는 로망은 사라지지 않겠죠.]
소설 <스타타이드 라이징>에는 토시오라는 우주 승무원이 나옵니다. 항해를 동경하는 소년이죠. 이 소년은 자신이 언제나 항해를 원했다고 생각하고, 한 번은 수상선을 타는 꿈을 꿉니다. 희한하죠. 우주선 승무원이 수상선을 타는 꿈을 꾸다니요. 하지만 우주선과 수상선은 똑같은 배입니다. 사실 SF 창작물을 살펴보면, 우주선과 수상선의 비유를 곧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마와의 랑데부>에는 인데버 우주 탐사선이 나오는데, 원래 인데버는 제임스 쿡 선장의 탐사선이죠. 소설 속의 우주 탐사대 대장은 자신을 제임스 쿡과 비교하고요.
<우주의 개척자>를 보면, 사람들은 메이플라워 우주선을 타고 가니메데로 날아갑니다. 메이플라워는 미국 이주의 첫 발을 장식한 배입니다. 가니메데 개척자들을 항해자에 비유한 셈입니다. 영화 <딥 임팩트>를 보면, 원정대 우주선 대장이 자신을 미시시피 강의 선장들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반 보그트는 우주 탐사선 스페이스 비글이 여러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는 소설을 썼는데, 왜 낯선 생명체들을 조사하는 우주선을 '비글'이라고 불렀겠어요. 저는 이게 그냥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다양한 SF 창작물들은 우주 탐사를 항해와 비교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수상 탐사선을 보면, 우주 탐사선을 떠올립니다. 칼 세이건도 <백경>의 대사를 인용했고 우주 탐사가 항해와 비슷하다고 비유한 적이 있잖아요. 아마 <창백한 푸른 점>에서 그랬을 겁니다.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기 원한다 운운했죠. 이 대사는 원래 <백경>에서 주인공 선원 이스마엘이 바다로 나갈 때 읊조렸던 대사입니다. 미지의 바다로 나가는 선박은 깊고 깊은 우주로 날아가는 우주선과 비슷할 겁니다. 설사 그게 19세기 범선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가령, <테러 호의 악몽>을 보면, 낯선 외계 행성에 불시착하고 우주 괴수와 싸우는 승무원들이 떠오릅니다. <테러 호의 악몽>은 프랭클린 탐사대의 이야기이지만, 탐사선의 좌초, 혹독하고 기이한 공간, 정체 불명의 하얀 괴수, 장엄하고 처절한 여정 등은 우주 탐사물의 구조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테러 호의 악몽>을 <우주의 개척자>, <라마와의 랑데부>, <스타타이드 라이징> 같은 우주 탐사물과 비교할 수 없겠죠. 비유는 그저 비유일 뿐이니까요. 19세기 범선과 미래의 최첨단 우주선이 똑같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미지를 향해 배를 몰아가는 탐험가'라는 관점에서 볼 때, 프랭클린 탐사대와 우주 승무원은 비슷하지 않을까요. 언젠가 웹진 알트 SF가 언급했듯 바다는 또 다른 우주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적어도 금단의 세계를 항해하는 로망은 비슷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