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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선이라는 기이한 미궁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우주선이라는 기이한 미궁

OneTiger 2017. 10. 18. 20:00

[게임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의 한 장면. 거대 우주선은 기이한 미궁이 될 수 있습니다.]

 

 

<진홍빛의 불협화음>이나 <라마와의 랑데부>, <조던의 아이들> 같은 소설은 우주 탐사물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설들은 좀 특이합니다. 이런 소설들 속에서 우주선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나의 거대한 세계이고, 폐쇄적이지만 드넓은 공간이고, 일종의 미궁과 같습니다. <진홍빛의 불협화음>에서 외계 괴물 익스톨은 스페이스 비글에 침투합니다. 이 괴물은 벽을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사방에서 승무원들을 납치합니다. 승무원들은 이 괴물에게 쫓기거나 이 괴물을 쫓습니다. 마치 미궁에서 인간들과 괴물이 추격을 벌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마와의 랑데부>에서 인데버 탐사대는 장대한 라마 우주선 내부를 여행합니다. 인데버 탐사대는 라마 우주선을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로 바라봅니다. 사실 생물들(그걸 생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이 돌아다니고 그것들은 라마 우주선 내부와 뭔가 상호작용하는 듯합니다. <조던의 아이들>에서 승무원들은 우주선이 안전한 장소이자 그들의 고향이라고 착각합니다. 우주선은 그야말로 너무 넓기 때문에 복잡하고 폐쇄적인 공간도 있고, 인간 승무원들은 그런 공간을 미로처럼 누빕니다.

 

 

이처럼 우주선은 이동 수단만 아니라 일종의 미궁이 될 수 있습니다. 우주선은 폐쇄적인 공간이고, 사람들은 우주선 밖으로 쉽게 나가지 못합니다. 우주선을 나가는 사람들은 광막하고 가혹한 공간과 직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주선에서 탈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주선 내부에 뭔가 이상이 생겨도 사람들은 쉽게 탈출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우주선은 너무 먼 거리를 여행하기 때문에 그만큼 거대해야 합니다. 만약 우주선이 다른 항성계로 여행하거나 수많은 사람들을 태웠다면, 우주선은 어마어마한 공간을 자랑해야 할 겁니다. 그런 공간은 미궁으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조던의 아이들>에서 인간 승무원이 돌연변이 구역을 떠돌아다니는 장면은 정말 미궁 탐험처럼 보입니다. 비슷한 사례들을 계속 열거할 수 있겠죠. 소설 <기시감>에서 주인공 아찬이 누군가와 접선하기 위해 우주선 지하로 내려갔을 때, 그 장면은 미궁 탐험처럼 보였습니다. 소설 <첫숨>에서 주인공 탐정이 첫숨과 들숨 우주선을 몰래 돌아다니는 장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주선은 폐쇄적인 공간인 동시에 어마어마하고 복잡한 공간입니다. 그런 공간은 미궁으로서 적격이고, 그래서 여러 작가들은 이런 특징을 놓치지 않습니다.

 

 

<진홍빛의 불협화음>이 그런 것처럼 좀 더 자극적인 모험을 추구하는 작가는 괴물들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겁니다. 우주선 속에서 괴물들과 쫓고 쫓기는 승무원들은 아주 상투적인 소재입니다. 온갖 3류 SF 소설들에서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드 SF 소설부터 3류 액션 게임까지, 수많은 창작가들이 이런 내용에 애정을 쏟습니다. 덕분에 영화 제작자나 비디오 게임 제작자도 우주선이라는 미궁을 놓치지 않습니다. 다이달로스의 미궁 속에서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루스에게 쫓기는 것처럼 거대한 우주선 속에서 승무원들은 외계 괴물에게 쫓깁니다.

 

솔직히 누가 이런 이야기를 처음 시도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진홍빛의 불협화음>은 대표적인 사례이고, 그런 관점에서 알프레드 반보트는 두고두고 명예의 전당에 올라갈 자격이 충분할 겁니다. 때때로 어떤 창작물들은 폐쇄적인 우주선에서 시선을 돌리고, 우주 정거장이나 해저 기지에 주목합니다. 저는 우주선이나 우주 정거장이나 해저 기지나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극지 연구소 또한 다르지 않겠죠. 어떤 폐쇄적이고 넓은 공간을 조성하고, 그 속에서 사람들과 괴물이 숨박꼭질을 벌일 수 있다면, 우주선이나 우주 정거장이나 해저 기지나 극지 연구소는 비슷한 감성을 풍기겠죠.

 

 

하지만 우주선은 우주라는 미지의 환경 속을 누비고, 그래서 우주선은 제일 기이한 미궁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아무리 해저 기지나 극지 연구소가 혹독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해저나 극지를 우주에 비하지 못할 겁니다. 설사 해저가 우주보다 훨씬 혹독한 공간이라고 해도 우주는 해저보다 더욱 신비롭습니다. 우리 인류가 쉽게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주는 그야말로 열린 공간이기 때문에. 그런 특성들은 우주선을 더욱 기이한 미궁으로 연출할 수 있어요. 그래서 해저 기지나 극지 연구소를 방황하는 창작물보다 우주선 속을 방황하는 창작물들이 더 유명하겠죠.

 

게다가 우주는 너무 광활하기 때문에 작가가 뻥을 치기 좋습니다. 만약 우주선이 다른 차원을 건너가고, 그래서 우주선에 뭔가 불경한 사고가 터졌다면…. 우주선은 던전에 못지않은 모험 무대가 될 수 있겠죠. 고전적인 던전 탐험가들처럼 승무원들은 이 위험하고 기괴한 우주선 속을 모험할 수 있겠죠. 창작가와 독자 모두 이런 기괴하고 위험한 모험에 열광할 테고, 우주선은 이동 수단만 아니라 위험한 던전이라는 정체성을 계속 유지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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