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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소설 <물에 잠긴 세계>와 게임 <서브머지드>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소설 <물에 잠긴 세계>와 게임 <서브머지드>

OneTiger 2017. 11. 4. 20:00

[물에 잠긴 도시와 도시를 뒤덮은 녹색 밀림, 각종 해양 동물들. 이건 <물에 잠긴 세계>와 꽤나 비슷합니다.]



<서브머지드>는 바다에 잠긴 도시를 둘러보는 비디오 게임입니다. 주인공은 어느 소녀입니다. 소녀는 아픈 동생과 함께 쪽배를 타고 정체 모를 도시에 도달해요. 사방은 출렁이는 바다이고, 바다는 도시를 뒤덮었습니다. 높은 건물들은 수면 위로 불쑥 솟았으나, 다른 건물들은 깊고 깊은 물 속에 잠겼죠. 아픈 동생을 구하기 위해 소녀는 이 도시에서 여러 물품들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녀는 쪽배를 타고 높다란 건물들 사이를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깊은 물 속에는 또 다른 생명체들이 존재합니다. 거대한 고래가 솟구치거나 작은 물고기들이 활공합니다. 이런 동물들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칙칙한 녹색 수포들이 동물들의 표면을 뒤덮었기 때문입니다. 항해 도중 소녀는 그런 동물들을 목격해요. 비록 녹색 수포들이 뒤덮었다고 해도 거대한 고래가 솟구치는 장면은 정말 웅장합니다. 분명히 소녀는 한때 대도시였던 지역을 돌아다니나, 이제 야생이 이 지역을 점령한 것 같습니다. 어느 누가 도시에서 장대한 고래를 볼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예전에 수많은 자동차들이 건물들 사이를 돌아다녔겠으나, 이제 그것들은 사라지고 거대한 고래가 유유히 돌아다닙니다.



비단 고래만 대도시를 점령하지 않았습니다. 약품이나 도구를 구하기 위해 소녀는 여러 고층 건물들을 올라갑니다. 당연히 건물들은 멀쩡하지 않습니다. 모든 건물은 폐허가 되었고 재난 속에서 침전하는 중입니다. 창문들은 깨졌고 담벼락들은 금이 갔고 장식물들은 부서졌습니다. 어떤 건물들은 수면을 향해 기울었습니다. 금속판들은 녹슬었고 광택을 잃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쓸쓸한 고대 유적 같습니다. 한때 이 도시는 굉장히 찬란하고 웅성거렸겠으나, 이제 사방은 상처투성이입니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닙니다.


건물들은 부서지는 중이나, 녹색 생명들은 곳곳에 자리잡았습니다. 이끼나 지의류 같은 다양한 녹색 생명들은 건물들을 뒤덮었습니다. 건물 옥상은 치렁치렁한 덩굴들을 늘어뜨립니다. 마치 건물들이 녹색 가발을 쓴 것 같습니다. 다양한 녹색 잡초들은 여기저기에서 돋아나고, 열대 나무들 역시 사방을 장식합니다. 해양 동물들이 건물들 사이를 점령했다면, 녹색 식물들은 건물들을 점령했습니다. 소녀는 대도시가 아니라 어느 열대 밀림에 들어온 것 같습니다. 열대 밀림 속에서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거대한 유적이나 잔재 같습니다. 소녀는 그런 공간을 돌아다닙니다.



이 게임을 볼 때, 아마 많은 SF 독자들은 제임스 발라드와 <물에 잠긴 세계>를 떠올릴 것 같습니다. 도시가 바다에 잠겼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비단 <물에 잠긴 세계>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분야에서 이 소설이 제일 유명하고, 그래서 제임스 발라드는 정말 기가 막힌 소설을 쓴 듯하군요. 흔히 평론가들과 독자들은 <크리스털 세계>를 최고라고 평가하나, 홍수는 결정화보다 훨씬 대중적인 재난이죠. 그래서 <물에 잠긴 세계> 같은 게임을 훨씬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듯합니다. 스크린샷들을 보면, 정말 <물에 잠긴 세계>를 비디오 게임으로 옮긴 듯한 기분이 듭니다. 게다가 그 무성한 열대 식물들과 기이한 동물들….


하지만 저는 게임 제작진이 <물에 잠긴 세계>를 읽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홍수 아포칼립스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게임 제작진은 제임스 발라드나 <물에 잠긴 세계>를 들어본 적이 없을지 모르죠. 설사 게임 제작진이 저 소설을 읽었다고 해도 저 소설이 비디오 게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게임 제작진은 인터뷰나 개발 일지에서 그런 설정을 밝혔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게임 제작진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고 해도 별로 상관이 없을 겁니다.



예전에 <드라운드 어스>를 이야기할 때, 저는 <물에 잠긴 세계>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좋든 싫든, SF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런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을 겁니다. 제임스 발라드를 비롯해 수많은 작가들이 그런 홍수 아포칼립스를 썼기 때문에 <서브머지드> 같은 게임이 나올 수 있었겠죠. 게임 제작진이 뭐라고 말하든 <서브머지드>는 <물에 잠긴 세계>의 간접적인 후손입니다. 물론 게임 제작진이 저 소설을 안다면, 그런 사실을 기쁘게 인정하겠죠.


그래서 저는 SF 창작물을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SF 소설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배 작가들이 기상천외한 발상들과 설정들을 이미 썼기 때문에. SF 소설들에는 비디오 게임으로 옮길 수 있는 다양한 설정들이 숨어있겠죠. 아, 물론 단순히 그런 목적 때문에 SF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 다양한 작가들이 다양한 설정들을 상상했고, 그것들이 영화나 게임을 재생산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SF 세계가 그렇게 넓어지는 과정이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거대한 나무로 비유한다면, SF 소설들은 수많은 뿌리들에 해당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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