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비경 탐험이 만나면… 본문
[게임 <서브머지드> 예고편의 한 장면. 이건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비경 탐험의 조합입니다.]
예전에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를 이용해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비경 탐험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케이트 윌헬름이 쓴 <노래하던 새들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입니다. 원인 모를 대재앙 때문에 인류는 사라지고, 대신 복제인간들만 남았습니다. 유전적인 결함과 부족한 물품 때문에 복제인간들은 작은 마을에서 삶을 지속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외부로 나가야 했고, 멸망한 대도시에서 필요한 장비들과 물품들을 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복제인간들은 작은 마을에서 너무 오랫동안 지냈고, 낯선 야생과 멸망한 대도시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유일하게 낯선 땅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 하나가 있었고, 그 사람은 숲과 강과 도시로 탐험을 떠납니다. 그 사람이 탐험을 떠나는 과정은 정말 비경 탐험물 같습니다. <노래하던 새들도>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복제인간들을 이야기하나, 이 부분에서 비경 탐험물로 둔갑한 듯합니다. 하지만 비경 탐험으로 둔갑(?)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비단 <노래하던 새들도>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종말 소설들과 그 소설들에 영향을 받은 영화들이나 게임들 역시 멸망한 세상과 비경 탐험을 연결합니다.
'비경'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영어권에서 SF 독자들은 비경을 로스트 월드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아마 아서 코난 도일이 사용한 제목이 비경 탐험에 영향을 미친 듯합니다. SF 소설들 속에서 비경은 여러 장소들을 가리킵니다. 울창한 열대 밀림, 높고 험준한 산맥, 뜨겁고 노란 사막, 깊고 깊은 바닷속, 컴컴하고 차가운 동굴. 심지어 외계 행성의 자연 환경조차 비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거나 아예 없습니다. 어쩌면 원시적인 부족민들이 살아갈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른바 '문명의 손길'은 그런 환경에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명에서 출발한 탐험대는 인적이 없는 낯선 환경으로 들어가고, 기이하고 불길한 느낌에 휩싸입니다. (덕분에 비경 탐험 소설은 제국주의로 흘러가기가 쉽습니다. 비경 탐험 작가는 항상 이 점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주 탐사 소설을 비롯한 대부분 비경 탐험 소설은 이런 적막과 이질감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에서 대재앙은 이런 적막과 이질감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친숙하고 번잡한 대도시 역시 적막하고 낯선 환경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사라진다면, 그렇게 도시는 변할 겁니다.
프리피야티 같은 도시는 그런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프리피야티는 수많은 인구가 살아가는 도시였으나, 어마어마한 참사가 덮친 이후, 이 도시는 유령 도시가 되었죠. 유령 도시는 열대 밀림이나 고산 지대나 깊은 동굴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잡초들이 우거지고 야생 동물들이 돌아다닌다면, 더욱 비경처럼 보이겠죠. (이렇게 핵 발전이 위험함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핵 발전에 매달리죠. 참사를 치유할 능력조차 없는 사람들도 참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프리피야티가 너무 이질적인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에 여러 SF 창작가들은 여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프리피야티를 소재로 이용한 창작물 역시 등장했고요.
비단 핵 참사만 아니라 다른 대재앙 역시 도시를 낯선 환경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울창한 숲이 도시를 침범하거나 야생 동물들이 도시를 돌아다니는 풍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낯설지 않아요. 게다가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면, 친숙한 동네 뒷산 역시 낯선 환경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무너진 이후, 부서진 동물원에서 탈출한 아무르 호랑이가 뒷산을 어슬렁거린다면…. 열대 밀림만큼 그 뒷산은 순식간에 무시무시하고 낯선 환경으로 변하겠죠.
무엇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비경 탐험은 적막한 분위기를 공유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인류는 사라집니다. 어떤 소설들은 대재앙이 닥쳤음에도 여전히 인류가 우글거린다고 이야기하나, 어떤 소설들은 인류가 사라진 적막을 강조하죠. 비경 탐험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문명의 손길은 아직 비경에 닿지 않았기 때문에 주연 탐험대는 울창한 밀림 속이나 험준한 산맥 위나 컴컴한 동굴 속이나 깊은 바닷속에서 이질적인 적막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에서 대도시가 절반쯤 밀림으로 변하고, 주인공 생존자가 도시이자 밀림을 헤맨다면?
게다가 (대재앙 덕분에) 돌연변이 동물들이 도시를 돌아다니거나 이상한 생명체들이 나타난다면? 아마 독자는 자신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읽는지 아니면 비경 탐험 소설을 읽는지 헛갈릴 겁니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광기의 산맥>은 올드원에게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고, 인간 탐사대에게 비경 탐험이죠. <드라운드 어스>나 <서브머지드> 같은 테이블 게임이나 비디오 게임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빙자(?)한 비경 탐험이고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비경 탐험을 품을 수 있습니다. 독특한 비경 탐험을 쓰고 싶은 작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이용할 수 있고요.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여러 매력들을 선보이나, 개인적으로 그런 적막하고 이질적인 탐험이 매력적이라고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