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비경 탐험과 괴수라는 찰떡 궁합 본문
[비경은 거대 괴수가 살 수 있는 고향입니다. 그래서 비경 탐험과 거대 괴수는 찰떡 궁합이죠.]
"공포에 질린 자, 몸이 얼어붙은 자, 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가 끝이 보이지 않는 빙원에서 눈 폭풍을 맞으며 걷는다. 오래된 피비린내를 풍기는 녀석의 아가리가 그들의 머리를 집어삼킨다." 소설 <테러 호의 악몽>은 이런 문구를 뒷표지에 집어넣었습니다. 소설 내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구죠. 이 문구는 크게 두 가지 소재를 가리킵니다. 먼저 '공포에 질린 자가 눈 폭풍을 맞으며 걷는다'는 문장은 비경 탐험을 뜻합니다. 소설 속에서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영국 해군 탐사대는 두 탐사선을 타고 북극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경로를 선택했고, 그래서 얼음 바다에 갇힙니다. 얼음들은 사방에서 두 탐사선을 옥죄고, 두 탐사선은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주변은 가혹한 얼음 벌판이고, 탐사 대원들은 제대로 먹거나 쉬지 못합니다. 특히 그들은 신선한 먹거리를 구하지 못했고, 온갖 고초들을 겪습니다. 얼어붙은 하얀 지옥을 탈출하기 위해 탐사대 장교들은 머리를 굴리나, 그들은 탈출 경로를 찾지 못합니다. 일부 대원들은 탈출 경로를 탐사하나, 결국 선발대는 비참하게 탐사선으로 돌아옵니다. 이 소설은 끔찍하고 처절한 탐험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비단 가혹한 극지 환경만이 아닙니다. 탐사대는 얼어붙은 지옥 속에서 점차 죽어가는 중이나, 기이한 육식동물 역시 그들을 노립니다. 탐사대는 이 육식동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북극곰과 비슷하게 보이나, 북극곰보다 훨씬 크고 강하고 영리하고 잔혹합니다. 이 육식동물은 몇 번 탐사선을 습격하고, 탐사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나, 희생자를 줄이지 못합니다. '녀석의 아가리가 그들의 머리를 집어삼킨다'는 문구는 이 기이한 육식동물을 가리키죠. 사실 영어 제목 '더 테러'는 탐사선 테러를 가리키는 동시에 이 무시무시한 육식동물을 가리킬 겁니다.
아마 '더 테러'는 중의적인 제목이겠죠. 탐사선 테러와 무시무시한 육식동물. <테러 호의 악몽>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이 기이한 육식동물을 빼놓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이 소설은 괴수물입니다. 소설이 괴수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스페이스 비글>처럼 <테러 호의 악몽>이 괴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테러 호의 악몽>은 극지 탐사대에 훨씬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쿠알이나 익스톨처럼 기이한 육식동물은 분명히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테러 호의 악몽>은 비경 탐험과 괴수를 조합한 소설입니다. <테러 호의 악몽>에서 탐사대가 극지를 돌아다니는 부분은 비경 탐험입니다. 기이한 육식동물이 탐사대를 습격하는 부분은 괴수물이고요. 이런 소설은 비경 탐험이 괴수를 이야기할 수 있거나 괴수가 비경 탐험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솔직히 저는 비경 탐험과 괴수가 서로 잘 어울리는 짝궁이라고 생각합니다. 괴수 이야기는 비경 탐험이 필요합니다. "호랑이를 잡고 싶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비유적인 의미이나, 어쨌든 호랑이가 (마을이 아니라) 호랑이 굴에 산다는 뜻이죠. 호랑이는 마을에서 살지 못합니다. 마을은 인간들이 사는 공간이고, 호랑이는 울창한 숲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것처럼 괴수는 문명 세계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만약 괴수가 문명 세계에 들어온다면, 인간들과 괴수는 충돌할 테고,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겠죠. 호랑이가 울창한 숲 속에 사는 것처럼 괴수는 이른바 인류 문명이 닿지 못하는 비경에 살아야 합니다. 만약 인간들이 괴수를 만나고 싶다면, 그들은 비경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그 과정은 비경 탐험이 되겠죠. 인간들이 괴수를 만났을 때, 이야기는 괴수물로 바뀔 테고요.
비단 <테러 호의 악몽>만 이런 조합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스페이스 비글> 역시 그런 조합을 보여줍니다. <해저 2만리>에서 노틸러스는 커다란 오징어들과 싸웠고, <지구 속 여행>에서 지하 탐사대는 거대한 수장룡을 발견했습니다.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다른 영화나 테이블 게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콩: 해골섬>은 괴수물로 알려졌으나, 동시에 이 영화는 비경 탐험입니다. 탐사대는 해골섬이라는 비경으로 떠나고 이상야릇한 열대 밀림을 탐사하죠.
<드라운드 어스> 같은 미니어쳐 게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기술을 찾는 탐사대는 울창한 밀림과 무너진 도시를 탐사하고, 그러는 동안 거대한 공룡들을 목격하죠. 이 미니어쳐 게임은 울창한 밀림과 복잡하고 무너진 도시와 거대한 공룡들을 함께 보여주고,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비경 탐험이 언제나 괴수물로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지라> 같은 영화를 탐험 이야기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비경 탐험과 괴수는 정말 잘 어울리는 조합이고,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꾸밀 수 있습니다. 실과 바늘이라는 속담은 이런 조합을 가리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