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외부 판단 기준과 인간 본질 본문
종종 특정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뭔가를 만듭니다. 왜 목수가 의자를 만드나요? 앉기 위해 목수는 의자를 만듭니다. 의자에게 이건 본질입니다. 만약 의자가 삐걱거리고, 사람들이 의자에 앉지 못한다면, 이 의자는 잘못된 의자일 겁니다. 이 의자가 삐걱거리기 때문에, 이 의자는 본질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이 의자가 본질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의자는 잘못된 의자입니다. 우리는 삐걱거리는 의자가 부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의자에게 본질이 있는 것처럼, 다른 많은 것들에게도 본질들이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 우리가 뭔가를 만들 때, 우리는 이것에게 본질을 부여합니다.
만약 기술자들이 장거리 유인 우주선을 건조한다면, 기술자들은 장거리 우주선이 외계 항성계로 무사히 날아가기 원할 겁니다. 외계 항성계 비행이 목적이 되기 때문에, 기술자들은 장거리 우주선을 건조합니다. 장거리 우주선에게 이건 본질입니다. 만약 장거리 우주선이 망가지고 외계 항성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장거리 우주선은 본질을 충족하지 못할 겁니다. 장거리 우주선이 본질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장거리 우주선이 부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장거리 우주선이 외계 항성계로 무사히 날아가고, 과학자들이 외계 행성들을 연구한다면, 이건 긍정적일 겁니다.
장거리 우주선이 본질을 충족하기 때문에, 장거리 우주선은 긍정적입니다. 의자부터 장거리 우주선까지, 목적을 위해 우리가 뭔가를 만들 때, 이것들에게는 본질들이 있고, 이것들이 본질들을 충족할 때, 우리는 이것들이 긍정적이라고 판단합니다. 만약 이것들이 본질들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것들이 부정적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이건 모든 것에게 동일한 의미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작가가 소설을 쓴다면, 어떻게 독자들이 소설을 해석할 수 있나요? 모든 독자가 소설을 똑같이 해석해야 하나요? 작가가 하나이고, 소설이 하나이기 때문에, 오직 유일한 해석만 가능한가요?
어떤 작가들은 모든 독자가 소설을 똑같이 해석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작가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인정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의미는 상대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뭐라고 독자들이 해석하든, 독자들은 소설을 읽습니다. 소설에게 이건 본질입니다. 독서를 위해 작가는 소설을 씁니다. 독서하기 위해 독자는 소설을 펼칩니다. 만약 인쇄나 편집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독자가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이건 소설 본질과 어긋날 겁니다. 이게 소설 본질과 어긋나기 때문에, 만약 독자가 소설을 읽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게 부정적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독서가 목적이기 때문에, 소설에게 이건 본질이 되고, 우리는 긍정과 부정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목수가 의자를 만들고, 기술자들이 장거리 우주선을 건조하고, 작가가 소설을 쓰는 것처럼, 인간이 뭔가를 만들기 때문에, 본질은 나타납니다. 목적을 위해 인간이 뭔가를 만들기 때문에, 본질은 나타나고, 우리는 긍정과 부정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본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긍정과 부정을 판단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가 긍정과 부정을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혼란에 빠질지 모릅니다. 자연 환경을 보세요. 누가 자연 환경을 만들었나요? 자연 환경에게 본질이 있나요?
만약 특정한 목적을 위해 누군가가 자연 환경을 만들었다면, 자연 환경에게는 본질이 있을 겁니다. 자연 환경에게 본질이 있기 때문에, 자연 환경이 본질을 충족할 때, 우리는 자연 환경이 긍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연 환경이 본질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연 환경이 부정적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아무도 자연 환경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자연 환경은 스스로 나타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대지 모신이 생명체들을 낳았다고 표현하는지 모르나, 이건 그저 문학적인 비유에 불과합니다. 어떤 종교는 창조신을 설명하나, 종교는 창조신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지적 설계 가설은 어떤 지적 존재가 자연 환경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나, 이건 그저 가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자연 환경을 만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자연 환경은 스스로 나타났습니다. 의자와 달리, 장거리 유인 우주선과 달리, 소설과 달리, 자연이 스스로 나타났기 때문에, 자연에게는 본질이 없습니다. 자연 환경에게 본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긍정적인 자연과 부정적인 자연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만약 쓰나미가 해안 도시를 파괴한다면, 이게 부정적인 자연인가요? 해안 도시가 인류 문명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인류에게 쓰나미는 부정적인 자연입니다. 이건 인간 관점입니다.
인류는 자연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연은 인류를 만들었습니다. 자연에서 인류가 비롯했기 때문에, 인간 관점은 자연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쓰나미는 부정적이나, 우리는 쓰나미 그 자체가 긍정이나 부정이라고 판단하지 못합니다. 만약 대지 모신이 자연을 만들었다면, 대지 모신은 자연 환경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될 겁니다. 목수 의도가 의자 본질이 되는 것처럼, 만약 대지 모신이 자연을 만들었다면, 대지 모신 의도는 자연 환경 본질이 될 겁니다. 우리는 대지 모신에게 물을 수 있습니다. "쓰나미가 부정적인가요?" 하지만 대지 모신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묻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창조신을 믿을 때, 사람들은 자연 환경 본질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아, 이 폭풍은 천벌이다! 신께서는 우리를 벌하기 원하신다! 우리를 벌하기 위해 신께서는 이 폭풍을 만드셨다!" 사람들이 창조신을 믿을 때, 이렇게 사람들은 자연 환경에게 본질이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폭풍(자연) 본질은 징벌입니다. 만약 폭풍이 사람들을 징벌하지 못한다면, 이건 폭풍 본질과 어긋날 겁니다. 하지만 종교는 창조신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창조신이 자연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에게 본질이 있다고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자연은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목수에게서 의자는 비롯합니다. 기술자들에게서 장거리 우주선은 비롯합니다. 작가에게서 소설은 비롯합니다. 의자와 장거리 우주선과 소설은 스스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외부 조건(목수, 기술자들, 작가)이 만들기 때문에, 의자와 장거리 우주선과 소설은 나타납니다. 외부 조건이 만들기 때문에, 의자와 장거리 우주선과 소설에게는 본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본질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은 내부보다 외부입니다. 의자에게 목수가 외부인 것처럼, 자연 외부에서 대지 모신이 자연을 만들었나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자연 환경에게 본질이 있다고 판단하지 못합니다. 인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인류를 만들었나요? 아무도 인류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자연을 만들지 않은 것처럼, 아무도 인류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의자에게는 목수(외부 의도)가 있으나, 인류에게는 외부 의도가 없습니다. 생명 진화 역사에서 인류는 그저 비롯했을 뿐입니다. 자연에게 본질이 없기 때문에, 생명 진화 역사에게는 본질이 없습니다. 생명 진화 역사에게 본질이 없는 것처럼, 아무도 인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 진화 역사에서 인류가 그저 비롯했을 뿐이기 때문에, 인류에게는 본질이 없습니다. 인류에게 본질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긍정적인 인간과 부정적인 인간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전 형질 전달이 인간 본질이라고 주장하는지 모릅니다. 인간(을 비롯해 많고 많은 생명체들)은 번성하기 원합니다. 인간이 번성하기 원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유전 형질 전달이 본질인가요? 이게 인간 본질이 되나요? 만약 어떤 성직자가 후손을 낳지 않는다면, 성직자가 자신의 유전 형질을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직자가 인간 본질을 부정하기 때문에, 성직자가 부정적인 인간인가요? 하지만 비록 성직자가 후손을 낳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성직자가 목숨을 걸고 약자들을 돕는다면, 심지어 약자들을 돕기 위해 성직자가 자신을 희생한다면, 성직자는 긍정적인 인간일 겁니다.
비록 성직자가 후손을 낳지 않고 유전 형질을 전달하지 않는다고 해도, 성직자가 약자들을 돕기 때문에, 성직자는 긍정적인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직자가 긍정적인 인간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아기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자에게 출산이 본질인가요? 로자 룩셈부르크는 아기를 낳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유럽 진보 좌파들이 제국주의에 찬성했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결국 로자 룩셈부르크는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붉은 로자가 부정적인가요?
로자 룩셈부르크가 유전 형질을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손 없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부정적인 인간이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 오히려 로자 룩셈부르크는 숭고한 인간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비록 인간이 유전 형질을 전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간은 긍정적일 수 있습니다. 성직자가 긍정적인 인간인 것처럼, 인간에게는 외부 의도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본질이 없기 때문에, 의자와 인간은 다릅니다. 우주선과 인간은 다르고, 소설과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에게 본질이 없기 때문에, 인생에는 특정한 목적이 없습니다. 인생은 너무 자유분방합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긍정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붉은 로자를 따라야 하나요? 글쎄요, 많은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에게 외부 의도가 없기 때문에, 긍정적인 인간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장거리 유인 우주선에게 기술자들이 본질을 결정하기 위한 외부 기준인 것처럼, 만약 인류에게 본질을 결정하기 위한 외부 기준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인간이 긍정적인지 쉽게 판단할 겁니다. 창조신은 대표적인 외부 기준입니다. 창조신이 뭔가를 의도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본질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의 뜻이다! 우리는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
근대 사회 이전에, 오랜 동안, 이렇게 인류는 본질을 판단했습니다. 이제 종교가 힘을 잃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람들은 창조신이 인간 본질을 결정하기 위한 외부 의도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종교가 인간 본질을 결정한다고 믿으나, 과거 사회와 달리, 21세기 초반 오늘날, 종교는 인간 본질을 강요하지 못합니다. 이제 종교는 진리보다 선택입니다. 종교가 선택인 것처럼, 우리는 어떤 것이 본질을 결정하기 위한 기준인지 너무 자유분방하게 선택합니다. 이게 너무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나친 자유분방함은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는 혼란 그 자체에게 기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혼란 그 자체에게 기반하기보다 무엇이 긍정적인 인간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인간을 선택하기 위해 우리는 자의적인 기준을 만듭니다. 우리가 자의적인 기준을 만들기 때문에, 이 기준은 외부 기준보다 내부 기준입니다. 만약 인간이 창조신을 믿는다면, 창조신이 인간을 만들고, 인간에게 창조신이 외부이기 때문에, 창조신은 내부 기준보다 외부 기준일 겁니다. 인간이 기준을 자의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이건 외부 기준보다 내부 기준입니다. 이건 너무 고약한 문제가 됩니다. 내부 기준이 자기 합리화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스스로 검증하지 못합니다.
내부 기준이 자기 합리화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에, 내부 기준은 그저 주관적인 신념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내부 기준을 검증하지 못하나, 인간은 내부 기준을 믿습니다. 인간이 검증 불가능한 것을 믿기 때문에, 인간은 종교적입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전통적인 종교는 힘을 잃었으나, 여전히 인간은 종교적입니다. 아니, 비단 종교만 아니라 전통 사회에게는 인간 본질을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 있습니다. 전통 사회들은 어떤 인간이 긍정적인지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21세기 초반 오늘날, 전통 사회들은 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종교를 비롯해) 전통에서 인간이 완전히 벗어날 수 있나요?
그건 아닙니다. 여전히 인간은 본질을 결정하기 위한 기준을 원합니다. 아무도 인간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의적인 기준을 만듭니다. 자의적인 기준은 내부 기준입니다. 인간은 내부 기준에게 기반합니다. 이게 외부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이것을 스스로 검증하지 못합니다. 내부 기준은 그저 주관적인 신념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검증 불가능한 것을 믿습니다. 인간이 검증 불가능한 것을 믿기 때문에, 여전히 인간은 종교적입니다. 종교는 전통 사회에 속합니다. 그래서 전통에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는 그저 종교에 불과합니다.
만약 20세기 중반 러시아에서 파쇼주의가 비롯했고, 파쇼주의가 2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다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공산주의가 악랄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에서 파쇼주의가 튀어나왔다고 주장했을 겁니다. 뭐, 이건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이건 불 보듯 너무 뻔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게거품을 물고, 두 눈을 까뒤집고, 악랄한 공산주의에서 파쇼주의가 튀어나왔다고 지랄지랄했을 겁니다. 그래서 20세기 중반 러시아에서 파쇼주의가 튀어나왔나요? 그건 아닙니다. 20세기 중반 유럽 한복판에서 파쇼주의는 튀어나왔습니다. 유럽은 공산주의 지역보다 자본주의, 자유 민주주의 지역입니다.
유럽이 자본주의 지역이고, 자본주의 한복판에서 파쇼주의가 튀어나왔고, 파쇼주의가 2차 세계 대전을 저질렀기 때문에,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자유 민주주의가 악랄하다고 비판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아주 놀랍게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를 떠받듭니다. 자본주의에서 파쇼주의는 튀어나왔으나, 아주 놀랍게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인간 그 자체가 야만적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보수 우파들이 공산주의를 비난할 때, 그들은 인간 그 자체가 야만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태도를 180도 뒤집고 인간 그 자체보다 공산주의가 악랄하다고 신나게 지랄지랄~합니다.
이건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이중 잣대입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어처구니 없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광신입니다. 자본주의를 떠받들기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이중 잣대를 적용합니다. 자본주의가 광신이기 때문에, 녹색 자본주의 역시 환경 보호가 아닙니다. 녹색 자본주의는 그저 기후 변화를 왜곡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녹색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를 비롯해 행성급 환경 오염들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상품화합니다. 자본주의가 자연 환경을 상품화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보다 자연 환경을 파괴합니다.
자본주의가 환경 파괴자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본주의가 생태계 테라포밍을 주장한다고 해도, 이건 또 다른 환경 오염이 될 겁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구 생물권을 파괴하는 것처럼, 아무리 미래 과학 기술들이 외계 행성을 테라포밍한다고 해도, 세계화 자본주의는 외계 행성 생물권을 파괴할 겁니다. 아무리 외계 행성 생물권이 무사하다고 해도, 자본주의가 지구 생물권을 파괴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에게는 생태계 테라포밍을 주장하기 위한 명분이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생태계 테라포밍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부정적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정당화합니다.
자본주의가 부정적이고, 자유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자유 민주주의는 부정적입니다. 자유주의 인간은 부정적입니다. 자유주의 인간이 부정적인 것처럼, 사회주의 인간 역시 부정적인지 모릅니다. 저는 사회주의 인간을 긍정하나, 어쩌면 사회주의는 그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인간이 내부 기준을 스스로 검증하지 못하는 것처럼, 저는 사회주의가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고 검증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비록 제가 사회주의를 검증하지 못한다고 해도, 저는 사회주의에게 소중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어떻게 사회주의가 소중할 수 있나요?
만약 사람들이 이 블로그 게시글들을 읽는다면, 사람들은 제가 SF/판타지를 좋아한다고 판단할 겁니다. 적어도 사람들은 제가 SF/판타지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다고 판단할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사람들이 제가 SF/판타지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다고 판단하나요? 이 블로그 게시글들이 우주 바이오 돔, 거대 괴수, 생태계 테라포밍, 생체 우주선, 던전 탐험 게임, 드루이드 동물 변신을 열심히 떠들기 때문입니다. 이 블로그가 SF/판타지 설정들을 열심히 떠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가 SF/판타지에게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다고 판단합니다. 사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중에서 어떤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열심히 떠드나요? 대답은 사회주의입니다. 만약 우리가 <국부론>과 <자본론>을 대조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을 열심히 떠든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수구 꼴통 할배들조차 자본주의가 부자들을 편들고 공산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을 편든다고 외칩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회주의를 편들어야 합니다. 어쩌면 사회주의는 그저 주관적인 신념, 종교에 불과한지 모르나, 오랜 동안, 공산주의가 가난한 사람들을 떠들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는 소중합니다.
※ 결국 인간이 종교적이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이 하드 SF 소설을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결국 하드 SF 독자는 과학적이기보다 종교적인지 모릅니다. 인간은 과학이 100% 합리적이라고 스스로 검증하지 못합니다. 특히, 당파성이 개입할 때,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세계 대전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 합리화에 빠질지 모릅니다. (당파성이 개입할 때) 인간이 과학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드 SF 독자 역시 자신이 과학적인지 검증하지 못합니다. 이 관점에서 하드 SF 소설과 사이언스 판타지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드 SF 소설은 과학 만능주의에 빠질지 모릅니다.
※ 게임 <매스 이펙트> 스크린샷 출처:
store.steampowered.com/app/1328670/Mass_Effect_Legendary_Edition/
※ 사진 <Waterfalls Surrounded by Trees> 출처: Ram Iyengar,
www.pexels.com/photo/waterfalls-surrounded-by-trees-2743287/
※ 사진 <Nature Animal Leaf Blur> 출처: Quentin Pelleti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