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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라 가부장 문화이다 본문

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라 가부장 문화이다

OneTiger 2019. 9. 10. 19:38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아비규환을 묘사합니다. 인류 문명은 무너졌고, 사회 질서는 사라졌고, 사람들은 야만성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문명은 그저 위선적이고 얇은 가면에 불과하고, 인간 본성은 야만에 가깝습니다. 얇은 가면이 사라지자마자 야만은 맹렬하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소설 <파리 대왕>을 전세계로 확장합니다. 윌리엄 골딩이 쓴 <파리 대왕>에서 배경 무대는 무인도입니다. 무인도에서 소년들은 생존 싸움을 벌이고, 이건 야만으로 이어집니다. 무인도 생존에는 문명이 없고, 소년들은 야만성을 드러냅니다.


<파리 대왕>은 무인도 소년들을 인류 문명에 비유하나,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인류 문명을 직접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도 <파리 대왕>과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습니다. 결국 문명은 위선적인 가면이고, 인간 본성은 야만입니다. 무인도에서 소년들이 생존 싸움을 벌이든, 인류 문명이 무너지고 헬지옥이 열리든, 결국 인간 본성은 야만입니다. 만인은 만인을 향해 투쟁해야 합니다. 토마스 홉스는 이런 야만적인 헬지옥을 아주 좋아할 겁니다. 인간 본성이 야만이고 자연 상태가 끔찍한 헬지옥이기 때문에 인류 문명에게는 국가 정부가 필요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인류 문명이 무너진 이후 인간은 다른 인간을 죽이고 잡아먹고 성 폭행하고 부려먹습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돕지 않습니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착취하고 수탈하고 문자 그대로 잡아먹습니다. 인간의 적은 다른 인간입니다. 자연 생태에서 결국 야만적인 인간은 다른 인간을 잡아먹습니다. 인간의 적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류 문명에는 야만성을 막기 위한 장치가 필요합니다. 토마스 홉스는 그게 국가 정부라고 말할 겁니다. 여러 근대 국가 정부들 역시 토마스 홉스에게 찬성할 겁니다. 인간의 적은 인간입니다. 국가 정부는 야만적인 헬지옥, 자연 상태를 막고 국민들을 지킵니다.


국가는 국민들의 생명들, 재산들, 안전을 지킵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에게는 국가 정부가 필요합니다. 국민들은 국가 정부에 충성해야 합니다. 국민들이 국가 정부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국가 정부는 사라질 테고, 사람들은 야만적인 자연 상태로 귀결할 겁니다. 야만적인 자연 상태에서 만인은 만인을 향해 투쟁할 겁니다. 인간의 적이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 상태는 영원한 아비규환이 될 겁니다. "결국 인간 본성은 탐욕스러워. 인간은 다른 인간을 죽이지. 인간의 적은 다른 인간이야."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을 읽은 이후, 이렇게 많은 독자들은 느낄 겁니다. 국가 정부들 역시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자본가 계급 역시 고개들을 끄덕일 겁니다. 인간 본성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인간의 적이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인류 문명에게는 무한 경쟁 시장 경제가 어울립니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지배적입니다. 왜 세계화 자본주의가 지배적인가요? 인간 본성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억누르기 원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무한 경쟁 시장 경제가 어울립니다. 자본가 계급은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탐욕스러운 시장 경제가 어울린다고 주장합니다. 비단 자본가 계급만 아니라 보수 우파 지식인들 역시 탐욕스러운 인간에게 탐욕스러운 시장 경제가 어울린다고 주장합니다.


인간 본성이 야만적이고, 만인이 만인을 향해 투쟁해야 하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는 시장 경제가 어울립니다. 시장 경제에서 가장 커다란 특징은 무한 경쟁입니다. 시장 경제는 무한한 경쟁, 영원한 경쟁을 강요합니다. 시장 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장 참가자들은 끊임없이 경쟁해야 합니다. 시장 경제 속에서 만인은 만인을 향해 투쟁해야 합니다. 인간 본성이 탐욕스럽기 때문에, 인간들은 무한 경쟁 시장 경제를 원합니다. 그래서 인간 본성과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가장 잘 어울립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아주 지배적입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이런 논리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옹호합니다.



사실 이건 엉터리 주장입니다.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자본가 계급은 무한 경쟁이 파멸로 향한다고 깨달았습니다. 이미 19세기 후반에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경제 공황에 부딪혔습니다. 19세기 유럽 경제 공황과 2008년 금융 대란처럼, 자본주의는 절대 경제 공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시장 경제는 절대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정말 지속 가능한 경제는 계획 경제입니다. 그래서 계획 경제를 위해 자본가 계급은 트러스트, 카르텔, 신디케이트, 합병 기업을 만듭니다. 이미 19세기 후반에 자본가 계급은 시장 경제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재벌 그룹들이 유행하는 것처럼, 솔직히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시장 경제가 아닙니다. 오직 피지배 계급에게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시장 경제입니다.


그래서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시장 경제 논리를 찬양한다면, 우리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의 대가리들이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비웃을 수 있습니다. 뭐, 보수 우파 지식인들 역시 이것을 완전히 외면하지 못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관직들을 맡을 때, 그들은 입장을 180도 바꾸고 시장 경제 논리를 버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본가 계급이 계획 경제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이윤 극대화를 위한 계획 경제입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한 계획 경제는 경제 공황에 부딪힙니다. 계획 경제에서 생산 목적은 이윤보다 필요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지식인들이 이것을 설명한다면, 민중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뒤집기 원할 겁니다. 그래서 자본가 지배 계급을 위해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좋다고 거짓말들을 나불거립니다.



만인이 만인을 향해 투쟁한다고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이 이야기한다면, 자본주의와 국가 정부는 이런 이야기를 아주 좋아할 겁니다. 인간 본성이 야만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적이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인류 문명에게 국가 정부는 필수적입니다. 학교 교과서들 역시 이것을 가르칩니다. 학교 교과서들은 만인이 만인을 향해 투쟁한다고 설명하고 인간의 적이 다른 인간이라고 가르칩니다. 살벌한 입시 경쟁 속에서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을 짓밟는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결국 만인은 만인을 향해 투쟁해야 하고, 인간은 다른 인간의 적입니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을 향해 투쟁해야 하고, 학생의 적은 다른 학생들입니다. 그래서 살벌한 입시 경쟁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을 짓밟아야 합니다. 훨씬 좋은 취업을 위해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을 짓밟아야 합니다. 소수 학생들은 좋은 회사들을 다닐 테고, 떨거지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될 겁니다.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서 비정규직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이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너무 바쁜 명절 배달 업무 속에서 배송 노동자들이 죽는다고 해도, 이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인간 본성이 야만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적이 다른 인간이기 때문에, 떨거지 노동자들이 죽어나간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만약 어린 학생들이 평온한 삶을 원한다면,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인간의 적이 다른 인간이라고 떠들 겁니다. 인류에게 평온한 삶 따위는 없습니다.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의 적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과 토마스 홉스와 자본가 계급과 학교 교과서들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나,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인간의 적이 다른 인간이라고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수긍합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아주 커다란 결함이 있습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야만성이 본성이라고 말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야만성이 선천적인 것, 태생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야만성이 태생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적은 다른 인간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정말 야만성이 선천적인 것, 태생적인 것인가요? 누가 그것을 증명하나요? 오히려 야만성이 후천적인 것이 아닌가요?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사람들에게 야만성을 주입하지 않나요? 소설 <파리 대왕>에서 소년들은 야만적입니다. 하지만 왜 소년들이 야만적인가요? 소년들은 자본주의 국가 출신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야만적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 혁명이 문명이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야만이라고 비유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야만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사람들은 야만성을 배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사람들은 무한 경쟁이 옳다고 배웁니다. 무한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만인이 만인을 향해 투쟁해야 한다고 배웁니다. 소년들은 야만성이 옳다고 배웠습니다.



시장 경제가 무한 경쟁이라고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찬양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속에서 사람들은 무한 경쟁을 배워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사람들은 오직 무한 경쟁만 옳다고 배웁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인간은 자본주의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어린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동안, 인간은 계속 자본주의를 보고, 자본주의를 듣고, 자본주의를 생각하고, 자본주의를 배웁니다. 어린 아이가 다른 경제 현상들을 보고 싶다고 해도, 국가 정부는 이것을 철저하게 가로막습니다. 어린 아이가 다른 경제 현상들을 보기 원한다면, 특히, 그 경제 현상이 자본주의와 대조적이라면, 국가 정부는 어린 아이를 악랄한 빨갱이로 몰아갈 겁니다.


자본주의 외부에서 저항 운동들은 자본주의와 싸웁니다. 저항 운동들은 새로운 경제 현상들을 주장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경제 현상들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국가 정부는 사람들을 죽일 겁니다. 사실 국가 정부는 국민들의 생명들과 재산들을 지키지 않습니다. 국가 정부에게 국민들의 생명들과 재산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국가 정부는 얼마든지 양민들을 학살할 수 있습니다. 국가 정부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입니다. 국가 정부는 국민들의 생명들과 재산들보다 자본주의를 지키기 원합니다. 국민이 자본주의를 거스른다면, 국가 정부는 국민을 탄압하고 고문하고 가두고 죽일 겁니다. 국가 보안법은 예쁘고 찰랑거리는 은빛 팔찌를 채울 겁니다.



소설 <파리 대왕>에서 소년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에서 야만적인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본주의만 보고, 오직 자본주의만 듣고, 오직 자본주의만 생각하고, 오직 자본주의만 배웁니다. 그들에게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무한 경쟁을 강요하기 때문에, 그들은 무한 경쟁이 옳다고 믿습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사람들은 야만성을 배웁니다. 인간 본성이 정말 야만적인지 그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합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사람들은 야만성은 배웁니다. 야만성은 결과입니다. 야만성은 교육의 산물입니다. 야만성은 후천적입니다.


이른바 사회화, 제도화 과정은 야만성이 옳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제도화 과정과 달리, 어떤 SF 소설들은 자본주의 이외에 다른 경제들을 그립니다. 다른 사회들에서 인간들은 다른 경제들을 보고, 다른 경제들을 듣고, 다른 경제들을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합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완벽한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들은 계속 실수하고 한계들에 부딪히나, 그렇다고 해도 인간성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SF 소설들은 인간성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회 구조가 바뀐다면, 인간성 역시 바뀝니다. 어슐라 르 귄이 쓴 <빼앗긴 자들>은 이것을 주장합니다.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고 해도, 인간성은 바뀔 수 있습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인간성은 바뀝니다. 비록 소설 <빼앗긴 자들> 역시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고 말하나, 인간성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쓴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는 훨씬 파격적인 사회를 보여줍니다. 훨씬 파격적인 사회에서 인간성은 훨씬 파격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소설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에서 여전히 어떤 등장인물은 인간의 적이 다른 인간이라고 주장하나, 이런 주장에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박문영 작가가 쓴 <지상의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이 사라지기 시작하기 때문에, 사회는 바뀌고, 사람들 역시 바뀌기 시작합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어떻게 인간성이 바뀌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나, 적어도 이 소설은 헛소리를 떠들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인간의 적이 다른 인간이라고 주절거리지 않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사회들 덕분에 SF 소설들은 재미있습니다. 이런 SF 소설들은 우리를 고정 관념(자본주의 체계)에서 끄집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보여줍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에서 남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여자들은 서로 다툽니다. 여자들은 서로 비난하고,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한숨들을 쉴 겁니다. "어휴, 그러면 그렇지. 여자의 적은 여자야." 이건 유명한 문구입니다. 여자의 적은 여자입니다.



하지만 정말 여자의 적이 여자인가요? 왜 여자들이 서로 싸우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그것을 주입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야만성을 배우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들은 여자가 보조적이라고 배웁니다. 가부장 문화는 남자가 주된 인간이고 여자가 보조적인 인간이라고 주장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이런 세뇌를 비단 남자들만 아니라 여자들에게 주입합니다. 여자들은 여자가 보조적이라고 믿습니다. 여자가 보조적이기 때문에, 여자들 역시 서로 무시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치장해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남자를 위해 여자는 존재해야 합니다.


여자는 보조적이고, 그래서 여자는 다른 여자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여자의 적은 여자가 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여자들이 아닙니다. 문제는 가부장 문화입니다. 가부장 문화가 만악의 근원이 아니라고 해도,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한 것처럼,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는 만들어집니다. 사실 남자 역시 만들어집니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은 만들어집니다. 인간은 야만성을 배웁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정말 멋진 명언을 뽑은 것 같습니다. 여자 본성은 태생적으로 시기와 질투가 아닙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는 만들어지고, 남자 역시 만들어지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야만적인 인간은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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