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도전! 웹소설 쓰기>와 동시대 사람들의 재미 본문
"내가 쓰는 소설들은 언제나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이야기를 담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재미있다, 잘 읽힌다는 독자들의 코멘트는 나에게 최고의 찬사였다. 문학적 성취나 평론가들의 호평은 내 알 바 아니었다."
창작 서적 <도전! 웹소설 쓰기>에서 이렇게 이재익 작가는 말합니다. 이재익 작가는 자신이 언제나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쓴다고 말합니다. 재미있다는 반응은 최고의 찬사입니다. 이재익 작가는 자신에게 예술을 위한 예술, 문학적인 성취 따위가 절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여기에 동의할지 모릅니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은 재미가 최고이고 다른 것들이 절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작가 지망생들은 재미를 위해 다른 것들이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왜 작가들이 소설을 쓰나요? 왜 독자들이 소설을 읽나요? 가장 유력한 대답은 '재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미입니다. 아무리 소설이 엄청난 필력과 깊은 철학과 날카로운 시각을 드러낸다고 해도, 재미없는 소설은 꽝입니다. 무엇보다 재미는 중요합니다. 미학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미학 없는 예술(재미없는 소설)은 참담합니다. 많은 평론가들은 문학이 뭔가 거창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이건 그저 평론가들의 시각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아무리 문학이 거창하다고 해도, 문학에 재미가 없다면, 독자들은 문학을 읽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평론가들조차 문학이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이 '재미'인가요? 이재익 작가는 재미가 장땡이라고 말했으나, 무엇이 재미인가요? 이재익 작가는 자신이 동시대 사람들과 호흡하는 이야기를 쓴다고 말했으나, 무엇이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나요?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킨>이 재미있는 소설인가요? 많은 독자들은 <킨>이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대답할 겁니다. 이건 <킨>이 웃기고 빠르고 신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는 '재미'가 웃기고 빠르고 신나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나, <킨>은 이런 감정과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킨>은 무섭고 끔찍하고 조마조마합니다.
독자가 <킨>을 읽는 동안, 독자는 심장이 오그라든다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재미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이걸 재미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독자는 <킨>이 따분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소설이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킨>은 무섭고 끔찍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긴장을 늦추지 못합니다. 독자는 <킨>이 재미없는 소설이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킨>이 재미있는 소설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킨>은 따분한 소설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재미가 될 수 있습니다. 사실 <도전! 웹소설 쓰기>에서 이재익 작가 역시 조마조마하고 아슬아슬한 미스터리가 재미라고 말합니다.
재미는 한바탕 웃음이 아닙니다. 한바탕 웃음은 재미가 될 수 있으나, 모든 재미는 한바탕 웃음이 아닙니다. 아슬아슬한 긴장 역시 재미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독자는 좀 더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왜 소설 <킨>이 아슬아슬한가요? 왜 독자가 <킨>을 읽는 동안, 독자가 아슬아슬하다고 느껴야 하나요? 소설 <킨>이 독자를 때리거나 위협하거나 겁주나요? 그건 아닙니다. <킨>은 소설입니다. <킨>은 소설책입니다. 소설책은 종이 위의 글자들입니다. 아무리 SF 평론가들이 <킨>을 호평한다고 해도, 결국 <킨>은 종이 위의 글자들입니다.
사실 독자가 <킨>이 재미있다고 말할 때, 독자는 종이 위의 글자들이 재미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이 위의 글자들이 재미있다면, 수학 교과서 역시 재미있을 겁니다. <킨>과 수학 교과서는 똑같이 종이 위의 글자들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수학 교과서는 수식과 그래프를 보여줍니다. <킨>은 오직 글자들만 나열할 뿐이나, 수학 교과서는 아주 다채로운 수식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는 수학 교과서보다 <킨>이 훨씬 재미있다고 느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종이 위의 글자들보다 글자들이 표현하는 사건, 등장인물, 배경입니다. 글자들은 수단입니다. 독자는 글자들을 이용해 사건, 등장인물, 배경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킨>(이 늘어놓는 글자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나요? 소설 <킨>은 어떤 20세기 후반 미국 흑인 여자가 19세기 미국 노예 농장으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19세기 미국 노예 농장으로 흑인 여자는 시간 여행합니다. 20세기 후반 미국 도시에서 흑인 여자는 자유민입니다. 비록 20세기 미국이 흑인 권리들과 여자 권리들과 시민 권리들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형식적으로 20세기 미국 도시에서 흑인 여자는 자유민입니다. 반면, 19세기 미국 노예 농장에서 흑인 여자는 그저 노예에 불과합니다. 흑인 여자는 자신이 자유민이라고 외치나, 이걸 증명하기 위한 근거는 없습니다.
흑인 여자는 20세기 후반에서 19세기로 자신이 시간 여행을 떠났다고 주장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흑인 여자가 시간 여행을 주장한다고 해도, 아무도 이걸 믿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흑인 여자가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흑인은 자유민이다."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아무도 이걸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19세기 사람들에게 20세기 후반은 미래입니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흑인 여자가 자신이 미래 인간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이건 씨알도 먹히지 않습니다. 19세기 미국 노예 농장에서 흑인 여자는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자유민에서 노예로 흑인 여자는 추락합니다.
수많은 이야기들에서 신분 상승과 추락은 자극적인 소재입니다. 소설 <킨>에서 순식간에 자유민에서 노예로 흑인 여자 주인공은 추락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긴장합니다. 흑인 여자 주인공은 새장 속의 새가 되었습니다. 언제 새가 새장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새장은 너무 괴롭고 무섭고 끔찍합니다. 백인 주인은 흑인 노예를 아무렇지 않게 죽이고, 자르고, 채찍질하고, 성 폭행할 수 있습니다. 가혹하고 비참한 운명은 흑인 여자 주인공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독자는 긴장을 늦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모든 독자가 이런 상황이 끔찍하다고 느끼나요?
모든 독자가 반드시 이런 상황이 끔찍하다고 느껴야 하나요? 만약 <킨>이 20세기 소설이 아니라 19세기 소설이었다면? 19세기 작가가 <킨>을 썼고, 19세기 미국 백인들이 <킨>을 읽었다면? 사실 19세기 서구 문명에도 이미 원형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킨>이 노예 해방을 부르짖는 19세기 원형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였다면? 19세기 미국 백인 독자들이 이 소설이 무섭고 끔찍하고 조마조마하다고 느꼈을까요? 19세기 미국 백인 주인들이 <킨>을 읽었다면, 그들이 <킨>이 정말 대단한 소설이라고 느꼈을까요? 이미 19세기 미국에는 노예 해방을 외치는 문학들과 소설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백인 주인들이 이런 문학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나요?
19세기 미국에서 흑인 노예는 일상이었습니다.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를 강간한다고 해도, 이건 심각한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당연한 권리였습니다. 흑인 여자 노예가 백인 남자를 자유민 흑인 판사에게 고발했다고 해도, 흑인 판사는 백인 남자를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백인들에게 흑인 노예 제도는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였습니다. 19세기 미국에서 흑인 노예 제도는 동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일상이었습니다. 노예 해방론자들이 흑인과 백인이 평등한 인간이라고 외칠 때, 노예 해방론자들은 미친 정신병자라고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이야기, '동시대 사람들이 함께 받아들이는 이야기'는 심각한 착취와 수탈과 차별이 될지 모릅니다.
<도전! 웹소설 쓰기>에서 이재익 작가는 자신이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이야기를 쓴다고 말했습니다. 아, 그런가요?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이야기가 반드시 좋은 이야기입니까? 하지만 19세기 노예 제도는 '19세기 동시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상'이었습니다. 노예 해방론자가 노예 주인들에게 인종 평등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노예 주인들은 노예 해방론자들이 정신병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일상이었습니다. 19세기 노예 제도 사회에서 인종 차별은 일상이었습니다. 인종 차별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이게 좋은 이야기가 되나요? 19세기 노예 제도 사회에서 인종 차별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19세기 소설 작가가 노예 제도를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어야 했나요?
인류 문명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은 계급 투쟁 과정이고, 투쟁 양상에 따라 인류 문명은 꾸준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동시대 사람들'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동시대 사람들' 따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보편적인 재미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보편성이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어떤 보편성들은 존재합니다. 굶주린 인간은 식량을 먹고 싶어합니다. 지역에 따라 미식들은 다를 수 있습니다. 닭고기 라멘, 구운 영양 고기, 양고기 만두, 크림 사과 패스트리, 요구르트 과자, 옥수수 빵과 염소 치즈, 삭힌 청어, 삭힌 바다표범, 기타 등등. 미식들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미식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보편적으로 굶주린 인간은 뭔가를 먹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먹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인간이 뭔가를 먹는 장면, 이른바 먹방은 보편적인 재미가 될 수 있습니다. 퍼거스 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신체성(신진 대사)은 자연적인 언어(먹방)를 말합니다. 아무리 극지와 열대가 대조적이라고 해도, 극지 북방 이누이트와 열대 아마존 인디언에게는 보편적인 신체성과 자연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심지어 신체성과 자연적인 언어는 생물종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인간 여자가 젖꼭지를 내민다면, 배고픈 아기 늑대는 인간 여자의 젖꼭지를 빨 겁니다. 암컷 늑대가 젖꼭지를 내민다면, 배고픈 인간 아기는 암컷 늑대의 젖꼭지를 빨 겁니다. 인간과 늑대가 소통하지 못한다고 해도, 인간과 늑대는 '몸으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늑대가 굶주림과 모유로 소통하는 것처럼, 보편성은 (생물종을 뛰어넘고) 존재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보편성이 없다고 외치나,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미식들을 즐기는 것처럼, 포스트 모더니스트들 역시 행복하게 요리들을 음미할 겁니다. 에코 페미니스트와 포스트 모더니스트는 똑같이 맛있는 요리를 행복하게 먹습니다. 인간이 식량을 먹고 싶다면, 인간은 자연에게서 식량을 구해야 합니다. 먹거리, 토지, 채집과 농사, 자연은 보편적입니다. 그래서 툰드라 이누이트부터 열대 밀림 인디언까지, 어디에서나 토지를 비롯해 자연 환경 공유는 보편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편성을 따질 때, 우리는 함정을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배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19세기 미국에서 흑인 노예 제도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19세기 미국 백인들은 흑인 노예 제도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지배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재익 작가가 좋아하는 '동시대 사람들이 함께 호흡하는' 어떤 것은 보편적인 것보다 지배적인 것인지 모릅니다. 흔히 남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가부장 문화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는 절대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이건 지배적입니다. 소설 작가가 지배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동시대 사람들을 운운한다면, 이건 헛된 망상에 빠질 겁니다.
이런 헛된 망상은 끔찍하게 고생하는 숱한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을 개무시할 겁니다. 이런 망상은 자신이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들을 개무시한다고 깨닫지 못할 겁니다. 숱한 '문학'들은 이런 망상을 깨뜨리고 싶어합니다. 지배적인 것을 깨뜨리기 위해 숱한 '문학'들은 고민하고 고민하고 다시 고민합니다. 지배적인 것을 깨뜨리기 위해 문학들은 의도적으로 낯설고 이상하고 모호한 것을 말합니다. 낯설고 이상하고 모호한 것은 재미가 되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이런 것들이 재미있지 않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문학이 그저 낯설고 이상하고 모호할 뿐이라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것이 반드시 보편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 재미는 재미가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가 뭔가를 재미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왜 그것이 재미있는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배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혼동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아주 훌륭한 성 차별론자, 인종 차별론자, 계급 차별론자가 될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