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어떻게 독자가 비일상적인 섹스 설정을 바라볼 수 있는가 본문
※ 이 게시글에는 나오미 노빅이 쓴 소설 <업루티드>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영화 주인공 케이는 조이라는 여자와 사귑니다. 문제는 조이가 인간이 아니라 홀로그램 인공 지능이라는 사실입니다. 케이는 조이를 사랑하고, 조이 역시 케이를 사랑합니다. 아니, 조이는 자신이 케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조이는 인간이 아닙니다. 조이는 인공 지능이고 프로그램입니다. 정말 조이가 케이를 사랑하나요? 조이는 그저 프로그램을 따를 뿐인지 모릅니다. 조이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인공 지능이고, 그래서 조이는 케이를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조이는 자신이 정말 케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비록 조이가 케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이것 역시 프로그램인지 모릅니다. 프로그램이 케이를 사랑하라고 명령한다면, 조이는 명령을 따르고 케이를 사랑할 겁니다. 이건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겁니다. 사랑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들이 있고, 이런 사랑 역시 나쁘지 않을지 모르나,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프로그램입니다. 뭐, 우리 역시 프로그램을 따르는 중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나, 이게 사실인가요? 유전 형질을 퍼뜨리기 위해 본능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우리는 그저 명령을 따르는 뿐인지 모릅니다.
조이가 정말 케이를 사랑하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습니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정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처럼, 장르 창작물들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사랑을 다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조이가 자신이 케이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이건 사랑인지 모릅니다. 적어도 <블레이드 러너 2049> 속에서 이건 사랑인지 모릅니다. 사이버펑크 속의 사랑과 현실 속의 사랑은 다릅니다. 현실에는 조이 같은 홀로그램 인공 지능이 없고, 그래서 우리는 이게 정말 사랑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합니다. 사이버펑크가 이상한 연애를 제시한다고 해도, 우리는 사이버펑크 설정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오미 노빅이 쓴 <업루티드>는 중세 유럽 판타지입니다. 소설 주인공 아그니에슈카는 소녀 마법사입니다. (나이가 뚜렷하지 않은) 노련한 남자 마법사 드래곤 아래에서 아그니에슈카는 열심히 마법을 공부합니다. 아그니에슈카는 대단한 마법사가 아니나, 대신 아그니에슈카는 드래곤이 연구하지 못하는 영역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그니에슈카는 드래곤과 마력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건 아주 환상적이고 엄청나고 자극적인 경험입니다. 끈적거리는 섹스처럼, 마력 공유는 자극적인 경험입니다. 나중에 아예 아그니에슈카와 드래곤은 정말 섹스합니다.
어디에서 이런 섹스가 비롯했나요? 왜 아그니에슈카가 섹스 욕구를 느꼈나요? 아그니에슈카가 드래곤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래곤이 아그니에슈카를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 아그니에슈카가 드래곤을 사랑하나요? 어쩌면 마력 공유가 아주 강력하고 환상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마력 공유는 섹스 욕구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만약 아그니에슈카와 드래곤이 마력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두 마법사는 섹스 욕구를 느끼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소설 <업루티드>는 마력 공유가 섹스 욕구에 영향을 미쳤다고 확실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마력 공유가 영향을 미쳤다면?
그래서 아그니에슈카와 드래곤이 섹스했다면? 이런 섹스가 잘못인가요? 독자가 이런 섹스를 부정해야 하나요? 독자가 <업루티드>를 비판해야 하나요? 판타지 소설 <업루티드>가 마력을 이용해 섹스를 묘사한다고 독자가 비판해야 하나요? 섹스는 사랑에서 비롯해야 합니다. 우리는 섹스가 사랑에서 비롯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원 나이트 스탠드에 사랑이 없다고 해도, 원 나이트 스탠드 역시 배려와 존중을 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력 공유가 사랑인가요? 마력 공유가 배려와 존중인가요? 아그니에슈카와 드래곤이 섹스할 때, 이게 일반적인 섹스(사랑에서 우러나는 섹스)인가요, 아니면 마력에 도취한 섹스인가요?
패트리스 머피가 쓴 <식물 아내>에서 어떤 플랜테이션 남자 농부는 식물 아내를 키웁니다. 식물 아내는 소녀에서 성인 여자가 되고, 농부는 식물 아내와 섹스합니다. 이건 이른바 '키잡'입니다. '키잡'은 키우고 잡아먹는다(섹스한다)는 뜻입니다. 남자가 어린 여자를 키우고 섹스할 때, 이건 키잡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키잡이 삐뚤어진 남성 판타지라고 말합니다. 단편 소설 <식물 아내>는 플랜테이션 남자 농부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식물 아내>는 키잡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 농부가 식물 아내와 섹스할 때, 이건 거의 성 폭행에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존중과 배려가 없습니다. 자본주의 농업이 존중과 배려를 개무시하고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것처럼, 플랜테이션 남자 농부에게 존중과 배려 따위는 없습니다. 남자 농부가 식물 아내와 섹스할 때, 어떤 독자들은 이 장면을 이용해 삐뚤어진 욕구를 충족할지 모릅니다. 소설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을 수 있고, 독자들은 얼마든지 소설을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패트리스 머피는 이런 소설을 쓰지 말아야 했을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패트리스 머피는 <식물 아내>를 쓰지 말아야 했어!"라고 비판한다면, 이게 옳은 비판인가요? 이런 비판이 창작과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나요?
단편 소설 <식물 아내>와 달리, 로버트 하인라인이 쓴 <여름으로 가는 문>은 키잡을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 소설에서 이른바 키잡은 가장 중요한 사건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SF 독자들은 로버트 하인라인이 로리콘이라고 농담합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 농담거리인가요? 성인 남자가 꼬마 소녀와 교류하고, 소녀가 성숙하고 성인이 되고, 성인 남자가 다시 성인 여자와 섹스한다면, 이게 잘못된 섹스가 아닌가요? 아무리 <여름으로 가는 문>이 시간 여행 소설이라고 해도, 이 소설이 시간 여행 장치를 이용해 삐뚤어진 남성 판타지를 충족하지 않나요? 만약 키잡이 정말 문제라면, SF 독자는 <여름으로 가는 문>을 비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로버트 하인라인은 자신이 그저 시간 여행 소설을 썼을 뿐이라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이건 사실입니다. 소설 <여름으로 가는 문>은 삐뚤어진 남성 판타지가 아니라 시간 여행 이야기입니다. 독자가 <여름으로 가는 문>을 비판한다고 해도, 독자는 시간 여행 설정을 비판하지 못합니다. 존 발리가 쓴 여러 단편 소설들은 집단 섹스와 근친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신체 개조 수술과 사변 실험은 집단 섹스와 근친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엄마와 아들이 섹스할 때, 여러 여자들과 여러 남자들이 함께 섹스할 때, 이건 삐뚤어진 욕망을 자극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왜 집단 섹스와 근친이 삐뚤어진 섹스인가요? 왜 여자와 남자가 반드시 1:1 부부 관계가 되어야 하나요? 왜 오직 (이성애) 결혼이라는 제도만 사랑을 규정해야 하나요? 왜 집단 연애, 집단 섹스가 잘못인가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핵가족이 가장 기초적인 경제 단위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없앤다면, 미래 사람들은 핵가족에서 벗어날지 모릅니다. 미래 사람들은 자유 연애, 프리 섹스를 추구하고 1:1 부부 관계를 없앨지 모릅니다. 그때 자유 연애는 진정한 자유 연애가 될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가부장 문화 속에서, 핵가족 제도 속에서 자유 연애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돌봄 노동 사회화 없이, 자유 연애는 실패합니다. 이미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은 돌봄 노동 사회화 없이 자유 연애를 시도한 적이 있었고, 결과는 억압과 실패였습니다. 돌봄 노동들이 사회화하지 않는다면, 여자들은 임신, 출산, 육아라는 부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겁니다. 붕어빵과 앙꼬처럼, 자유 연애와 돌봄 노동 사회화는 떨어지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돌봄 노동 사회화 없이 자유 연애는 그저 또 다른 성 차별로 이어질 뿐입니다. 현실에서 아직 돌봄 노동들은 사회화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존 발리 단편 소설들이 집단 섹스와 근친을 묘사한다면, 이게 올바른 설정인가요? SF 독자들이 존 발리 단편 소설들을 비판해야 하나요?
장르 창작물들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이용해 여러 섹스들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노루표 무협 소설들은 노골적으로 이걸 이용합니다. 가령, 소설 속에서 밀교 자객은 정파 남자 제자를 찌르고, 정파 남자 제자는 최면에 빠집니다. 정파 여자 사부는 밀교 자객을 처치하나, 이미 남자 제자는 깊은 최면에 빠졌습니다. 최면이 너무 악독하기 때문에, 최면을 깨뜨리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건 방중술입니다. 오직 방중술만 최면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시간은 촉박합니다. 당장 최면이 깨지지 않는다면, 남자 제자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고 강시가 될 겁니다. 여자 사부는 훌렁훌렁 옷들을 벗어던지고 방중술을 시도합니다.
평소에 여자 사부가 섹스를 외면하거나 방중술을 부정한다고 해도, 제자를 살리기 위해 사부는 음양 교합을 시도합니다. 무협 독자는 섹스를 묘사하기 위해 무협 소설이 의도적으로 밀교 자객을 내보낸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밀교 자객이 정파 제자를 찌르고 최면을 건다고 해도, 이건 무협 설정입니다. 독자는 무협 설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독자가 무협 설정 그 자체를 비판한다면, 이 세상에서 SF 소설들, 판타지 소설들, 공포 소설들, 무협 소설들은 사라져야 할 겁니다. 이른바 노루표 무협 소설이 노골적으로 방중술을 강조한다고 해도, 독자는 설정에 시비를 걸지 못합니다.
이건 <업루티드>가 노루표 무협 소설들과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업루티드>에서 마력 공유는 섹스 욕구에 영향을 미쳤는지 모릅니다. 노루표 무협 소설에서 악독한 최면은 방중술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업루티드>는 섹스에 과도한 비중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섹스는 여러 사건들 중에서 그저 하나에 불과합니다. 나오미 노빅은 끈적거리는 분위기를 묘사하나, 묘사는 너무 길지 않고 자세하지 않습니다. 반면, 노루표 무협 소설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방중술을 길고 자세히 묘사합니다. 방중술이 핵심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해도, 노루표 무협 소설은 방중술을 자세히 묘사할 겁니다.
이것 역시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아무리 마르셀 프루스트가 더디게 상황을 묘사한다고 해도, 문학 평론가들이 마르셀 프루스트를 호평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길고 자세한 묘사는 나쁘지 않습니다. 게다가 방중술 같은 비일상적인 설정은 길고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변명할 수 있습니다. 장르 창작물에는 설정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비단 노루표 무협 소설만 아니라 설정을 설명하기 위해 숱한 SF 소설들 역시 비중을 할애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방중술 그 자체를 비판하지 못할 겁니다. 문제는 현실 속에서 독자가 노루표 무협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입니다.
현실은 가부장적입니다. 현실은 너무 폭력적입니다.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서 독자가 비일상적인 섹스 이야기를 읽는다면, 이건 가부장 문화에 일조할지 모릅니다. 현실이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소설 작가는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을 소설에 집어넣을 겁니다. 그래서 독자가 비일상적인 섹스 설정을 비판하고 싶다면, 독자는 현실을 접목해야 합니다. 독자는 오직 소설에게만 투덜거리지 말고 현실을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실보다 창작물에게 시비를 겁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현실임에도, 사람들은 현실보다 창작물에게 시비를 겁니다. 우리가 현실, 가부장적인 자본주의를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언론 매체들은 자본주의에게 불리한 것들을 보여주지 않고, 우리는 자본주의가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홍콩 시위 뉴스들을 보세요.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언론 매체들은 난리법석을 부리고 홍콩 시위를 보도합니다. 하지만 미국 자본주의가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탄압한다고 해도, 이건 화제가 되지 못합니다. 언론 매체들은 자본주의에게 불리한 것들을 말하지 않아요. 언론 매체들은 자본주의가 좋다고 강조하고, 우리는 언론 매체가 보여주는 것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현실보다 소설에게 시비를 겁니다. 독자는 현실을 외면하고 오직 소설만 이야기합니다. 현실 속에서 흑인들이 차별을 겪음에도, 독자는 오직 소설 속에 얼마나 많은 흑인 등장인물들이 있는지 따질 뿐입니다. 이런 사례들은 너무 많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많습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온갖 수탈들과 오염들이 지랄발광한다고 해도, 독자는 오직 소설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독자가 오직 소설에게만 투덜거린다면, 가부장적인 현실은 바뀌지 않을 테고, 가부장 문화는 계속 씹덕 소설들을 쏟아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