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적색 경보 3>와 욱일 제국 논란 본문
한때 국내에서 비디오 게임 <적색 경보 3>는 커다란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적색 경보 3>는 연합군, 소비에트 연방, 욱일 제국이 싸운다고 이야기합니다. 문제는 욱일 제국입니다. 욱일 제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따르고, 그래서 욱일 제국 유닛들은 욱일기들을 장식합니다. 욱일 제국 깃발은 욱일기를 모방합니다. 탱크 버스터 삿갓에는 욱일기 문양이 있습니다. 거대 로봇 킹 오니 컨셉 아트는 킹 오니 어깨 장갑에 욱일기 무늬가 있다고 보여줍니다. 게임 동영상은 킹 오니 옆에서 욱일기가 펄럭인다고 묘사합니다. 게임 소개 동영상에서 쇼군 전함 역시 욱일기를 펄럭입니다.
컨셉 아트에서 쓰나미 탱크가 있는 바닥에는 욱일기 문양이 있습니다. 욱일 제국 유닛 유리코 오메가는, 뭐…. 그 자체로서 유리코 오메가는 괴악한 센스를 자랑하나, 오메가 유리코 역시 욱일기 문양과 떨어지지 못합니다. 전반적으로 욱일 제국은 욱일기 문양을 크게 활용합니다. 그래서 남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적색 경보 3>에게 분노했습니다. 남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적색 경보 3>가 일본 제국주의를 미화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건 모든 남한 게임 플레이어가 <적색 경보 3>에 분노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게임이 그저 게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비디오 게임이 무엇을 묘사하든 결국 게임이 그저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간주했습니다.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적색 경보 3>가 일본 제국주의를 풍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욱일 제국과 미화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욱일 제국에게는 로망이나 비장미나 숭고함이 없습니다. 욱일 제국 등장인물들은 나사가 빠졌고, 욱일 제국 유닛들은 코미디입니다. 유리코 오메가는 풍자의 정점을 찍습니다. 오히려 일본 사람들은 <적색 경보 3>가 일본을 너무 깔본다고 화낼지 모릅니다. 거대 로봇 킹 오니가 쿵쿵거리며 돌아다닐 때, 이건 절대 미화가 되지 못합니다.
물론 <적색 경보 3>는 일본 제국주의를 너무 가볍게 묘사하는지 모릅니다. 이게 미화가 아니라고 해도, 남한 게임 플레이어들은 <적색 경보 3>가 일본 제국주의를 진지하게 비판하지 않는다고 시비를 따질 겁니다. 문제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분명히 일본 제국주의는 엄청난 학살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비디오 게임이 반드시 진지하게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해야 하나요? 이건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겁니다. 창작물이 반드시 죽음을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하나요? 왜 창작물이 죽음을 진지하게 이야기해야 하나요? 창작물이 반드시 현실을 직접 묘사해야 하나요?
채만식이 쓴 단편 소설 <치숙>은 어리석은 삼촌을 조롱합니다. 단편 소설 <치숙>은 사회주의 운동권 삼촌을 비방합니다. 소설 화자 '나'는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고, 그래서 어리석은 삼촌보다 소설 화자 '나'는 훨씬 우월합니다. 분명히 소설 <치숙>은 사회주의 해방 운동을 조롱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합니다. 하지만 문학 평론가들은 소설 <치숙>에게 친일 딱지를 붙이지 않을 겁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채만식에게 친일 딱지를 붙일지 모르나, 소설 <치숙>은 친일 딱지를 붙이지 않을 겁니다. 소설 <치숙>이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한다고 해도 이게 풍자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에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고, 그것들은 현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하거나 우회하거나 축소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예술을 만들 때, 인간은 다양한 허구적인 장치들을 동원합니다. 사실 이런 허구적인 장치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태여 허구적인 장치들을 동원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예술을 만들지 않을 겁니다. "오늘 영철이와 헤어졌어.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아." 이렇게 옆동네 지훈은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웃기는 소리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마음이 찢어질 수 있나요? 아니, 인간에게 마음이 있나요? 인간에게 마음이라는 물리적인 실체가 있나요? 영철이 작별을 통보한다고 해도, 지훈이 실연을 당한다고 해도, 심장은 찢어지지 않아요. 심장은 마음이 아니에요.
심장이 마음이 아니고, 인간에게 마음이라는 물리적인 실체가 없음에도, 지훈은 마음이 찢어진다고 표현합니다. 이건 현실이 아닙니다. 이런 표현은 현실을 왜곡합니다. 지훈이 현실을 왜곡했기 때문에, 경찰은 지훈을 체포하고 감옥에 집어넣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훈에게 현실을 왜곡하기 위한 의도가 없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지훈은 마음이 찢어진다고 말했으나, 이건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지훈은 실연의 상처를 강조하기 원했고, 그래서 지훈은 마음이 찢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은 이런 허구적인 장치들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술이 현실을 직접 묘사해야 한다면, 우리는 당장 세계 고전 문학을 모두 불태워야 할 겁니다. 세계 고전 문학들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있습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현실 왜곡입니다. 현실 속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 아무도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직접 파악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는 관심법이 없습니다. 궁예는 자신에게 관심법이 있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이건 그저 착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고전 문학 작가들이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세계 고전 문학을 불태우지 않을 겁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 문학적인 장치, 허구적인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예술 사이에는 괴리가 있고, 그래서 우리는 예술을 즐깁니다.
비디오 게임 <적색 경보 3>에서 욱일 제국 유닛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실과 예술 사이에 괴리가 있기 때문에, 현실 속의 일본 제국주의와 게임 속의 욱일 제국 유닛들 사이에는 괴리가 있습니다. 현실 속의 일본 제국주의와 게임 속의 욱일 제국 유닛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양쪽이 똑같다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양쪽이 똑같다고 비판해야 한다면, 우리는 문학적인 장치들을 무시해야 할 겁니다. 우리가 문학적인 장치들을 무시한다면, 그 어떤 소설 작가도 소설을 쓰지 못할 겁니다. 모든 소설에는 시점이 있습니다.
현실 속에는 시점이 없으나, 모든 소설에는 시점이 있습니다. 현실과 소설 사이에는 괴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괴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예술을 즐기지 못할 겁니다. 현실과 예술 사이에 괴리가 있기 때문에, 현실 속의 일본 제국주의와 게임 속의 욱일 제국 유닛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할 수 있으나, 우리는 욱일 제국 유닛들과 일본 제국주의가 똑같다고 간주하지 못합니다. 비단 <적색 경보 3>만 아니라 2014년 영화 <고지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고지라> 역시 욱일기를 이용한 포스터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욱일기 포스터를 비난했으나, 이것 역시 창작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일본 제국주의는 유일무이한 악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학살들을 저지른 것처럼, 일본 제국 역시 학살들을 저질렀습니다. 심지어 일본 제국주의보다 서구 제국주의는 훨씬 악랄했습니다. 하지만 남한 사람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한 사람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추앙합니다. 아무리 대영 제국이 인도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절대 유니언 잭이 나쁘다고 비판하지 않습니다. 일본 제국과 대영 제국이 똑같이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유니언 잭을 추앙하고 오직 욱일기만 비난합니다.
왜 남한 사람들이 오직 욱일기만 비난하나요? 남한 사람들이 정말 폭력을 비판하기 원하나요? 아니, 남한 사람들은 폭력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근대 민족 국가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학살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것 때문에 남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략했기 때문에, 남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난합니다. 여기에서 중점은 침략보다 한반도입니다. 만약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 사람들보다 아프리카 흑인들과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학살했다면, 남한 사람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남한 사람들은 욱일기를 숭배할지 모릅니다. 남한 사람들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숭배합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막대한 부를 얻었다고 해도, 남한 사람들은 서구적인 근대화를 숭배합니다. 이건 아주 얄팍한 시각입니다. 남한 게임 플레이어들이 <적색 경보 3>를 비난할 때, 게임 플레이어들은 얄팍한 시각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정말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어떻게 서구적인 근대화가 막대한 부를 얻었는지 언급해야 합니다. 서구적인 근대화에서 서구 제국주의가 비롯했고, 일본 제국주의가 서구 제국주의를 모방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서구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율리우스 마르토프와 블라디미르 레닌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본주의가 발달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서구 제국주의로 확장했습니다. 서구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확장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 역시 서구 제국주의를 쉽게 비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싶다면, 우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이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들이 <적색 경보 3>를 헐뜯는다고 해도, 이건 얄팍한 비난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