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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멸종>과 윤리적인 문제, 구조적인 문제 본문

사회주의/형이상학 비판

<멸종>과 윤리적인 문제, 구조적인 문제

OneTiger 2019. 4. 30. 20:15

※ 이 게시글에는 로버트 소여가 쓴 <멸종>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로버트 소여가 쓴 <멸종>은 공룡 소설입니다. 공룡을 연구하기 위해 소설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시간 여행 장치를 타고 중생대로 돌아갑니다. 소설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기 때문에 <멸종>은 공룡 소설이고 동시에 시간 여행 소설입니다. 많은 공룡 이야기들은 시간 여행을 포함합니다. 신생대가 오기 전에 비조류 공룡들이 멸종했기 때문에, 시간 여행 장치 없이 인간은 공룡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건 공룡 이야기가 반드시 시간 여행 장치를 포함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들 역시 있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잃어버린 세계>를 썼으나, 이 소설에는 시간 여행 장치가 없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은 그저 공룡들이 아직 멸종하지 않았다고 설정했을 뿐입니다. 비디오 게임 <쥬라기 공원: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는 공룡 사파리를 보여주나, 이 게임에도 시간 여행 장치는 없습니다. 유전 공학 과학자들은 공룡들을 (불완전하게) 복원했습니다. 시간 여행 장치보다 유전 공학 기술은 훨씬 현실적이고, <멸종>보다 <오퍼레이션 제네시스>는 훨씬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소설 <멸종>에서 시간 여행은 그저 공룡들을 만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시간 여행 장치는 거시적인 주제로 이어지고, <멸종>은 그저 공룡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아요.



소설 <멸종>이 시간 여행 장치를 이용하는 이유는 외계인들 때문입니다. 소설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과거 중생대로 돌아가고 비단 공룡만 아니라 외계인들을 만납니다. 문제는 이 외계인들이 꽤나 독특하고 적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외계인들은 기본적으로 바이러스 속성입니다. 외계인들은 태생적으로 다른 생명체에게 기생해야 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명체를 지배하고 정복하고 조종하기 원합니다. 그들에게는 태생적인 정복 욕구가 있습니다. 외계인들이 생명체를 만났을 때, 정복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외계인들은 생명체를 정복하고 조종해야 합니다. 이게 너무 강력한 감성이기 때문에, 외계인이 생명체를 조종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면, 외계인은 분노를 견디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이 외계인들은 집단 지성입니다. 외계인들은 세포보다 작게 분열할 수 있고 엄청나게 크게 뭉칠 수 있습니다. 부분은 전체이고, 전체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외계인들이 작게 분열할 수 있기 때문에, 외계인들은 생명체의 몸에 침투하고 뇌로 기어올라가고 신경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외계인들은 탈것으로서 생명체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외계인들이 세포보다 작게 분열하고 티라노사우루스의 몸으로 들어간다면, 외계인들은 티라노사우루스를 조종할 수 있을 겁니다. 외계인들에게 티라노사우루스는 노예입니다. 사실 그들은 모든 생명체가 노예라고 생각해요.



외계인들은 바이러스와 비슷합니다. 이건 그저 비유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정말 바이러스입니다. 생명체 숙주 없이 외계인들은 증식하지 못합니다. 이런 속성이 깊게 박혔기 때문에, 외계인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모든 생명체를 정복하기 원합니다. 당연히 그들은 생명체들을 열등하게 간주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지적 존재이고 다른 생명체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외계인들은 인간이 열등하다고 간주하고 인간을 노예로 부리기 원해요. 소설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외계인들을 설득하지 못합니다. 외계인들이 태생적으로 생명체를 정복하기 원하기 때문에, 설득은 통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외계인들은 이런 사실을 직접 말합니다. 외계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생명체들을 정복하기 원한다고 직접 말합니다. 외계인들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외계인들은 거짓말하지 못합니다. 외계인들은 집단 지성입니다. 그들에게는 개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과 달리, 외계인들은 개인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이기 때문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외계인들은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거짓말한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외계인들에게 태생적으로 거짓말은 불가능해요.



만약 현실에 정말 이런 지적 존재가 존재한다면, 이 존재가 태생적으로 거짓말하지 못할까요? 지적 존재가 개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지적 존재가 거짓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까요? 현실 속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은 거짓말합니다. 어떤 나비는 날개에 눈동자 무늬가 있습니다. 나비가 두 날개를 펼칠 때, 눈동자 무늬는 상대를 노려봅니다. 상대는 무서운 동물이 자신을 노려본다고 착각합니다. 상대는 나비를 공격하지 않고 도망갑니다. 이건 속임수입니다. 나비는 다른 동물을 속였습니다. 이건 거짓말입니다. 나비는 자신이 나비가 아니라 무서운 동물(의 두 눈)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아니, 이게 정말 거짓말인가요?


나비가 정말 거짓말했나요? 만약 나비가 거짓말했다면, 나비가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가요? 흔히 우리는 거짓말이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비는 속임수를 썼습니다. 나비는 자신이 무서운 동물(의 두 눈)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비가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나비가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겁니다. 철학자들이 우르르 몰려온다고 해도, 그들은 나비를 비판하지 않을 겁니다. 거짓말이 인간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나비는 윤리와 도덕을 알지 못합니다. 눈동자 무늬를 보여주기 위해 나비는 그저 진화했을 뿐입니다.



만약 현실에 집단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들 역시 속임수를 쓸 겁니다. 소설 <멸종>에서 집단 지성 외계인들 역시 속임수를 씁니다. 외계인들은 소설 주인공 고생물학자를 속이기 원해요. 어떻게 외계인들이 거짓말하지 못함에도, 그들이 속임수를 쓸 수 있나요? 어쩌면 외계인들은 속임수가 거짓말이라고 인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무 윤리적인 판단 없이 나비가 두 날개(의 두 눈동자 무늬)를 펼치는 것처럼, 윤리적인 판단 없이 외계인들 역시 속임수를 쓰는지 모릅니다. 비록 외계인들이 거짓말이라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외계인들은 속임수를 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자들은 외계인들이 착하다고 칭찬하지 못합니다. 외계인들이 언제나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외계인들이 절대 거짓말하지 못한다고 해도, 철학자들은 외계인들이 착하다고 칭찬하지 못합니다. 외계인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외계인들은 진실과 거짓을 선택하지 못합니다. 외계인들은 태생적으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태생적으로 거짓말이라는 선택 사항이 없기 때문에, 외계인들은 언제나 진실을 말합니다. 따라서 외계인들이 진실을 말한다고 해도, 철학자들은 윤리적으로 외계인들을 판단하지 못합니다.



이건 윤리적인 문제보다 구조적인 문제에 가깝습니다. 외계인의 신체 구조가 집단 지성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댄다고 해도, 이건 오류입니다. 이건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구조적인 문제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하늘을 날지 못합니다. 인간의 신체 구조는 하늘을 날지 못합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인간이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선택 사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두 발로 걸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늘을 날고 싶다고 해도, 인간의 신체 구조에게 비행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두 발로 걷는다고 해도, 철학자들은 왜 인간이 날지 않고 걷는지 윤리적으로 비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사마리아 사람이 윤리적으로 착하다고 칭찬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구하지 않을 것인가? 사마리아 사람은 선택했고, 그래서 철학자들은 윤리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판단합니다. 반면, 철학자들은 외계인들을 윤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만약 철학자들이 외계인들을 윤리적으로 판단한다면, 이건 오류가 될 겁니다.



문제는 인간이 윤리와 도덕을 숭배한다는 사실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아주 강력한 문화입니다. 인간은 윤리와 도덕이 인류 문명을 뒷받침하는 기둥이라고 착각합니다. 윤리가 절대 선천적이지 않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윤리 없이 인간이 살아가지 못한다고 착각합니다. 물론 윤리와 도덕이 사회 구조로 이어진다면, 윤리와 도덕은 중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례들에서 윤리와 도덕은 사회 구조보다 개인적인 선행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선행들이 인류 문명을 뒷받침한다고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수많은 것들을 윤리적으로 판단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외계인들을 윤리적으로 착하다고 칭찬한다면, 이건 오류일 겁니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은 구조적인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비단 집단 지성 외계인들만 아니라 다른 문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는 윤리적인 문제보다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구조적으로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수탈해야 합니다. 식민지 수탈 없이, 구조적으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전세계 자본가 계급이 모두 성인군자라고 해도, 자본주의가 과잉 자본을 만들지 않고 비자본 영역에 과잉 자본을 투입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무너질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착한 자본주의, 도덕적인 자본주의, 올바른 자본주의를 원한다면, 이건 오류가 됩니다. 소설 <멸종>에서 고생물학자는 외계인들이 착해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고생물학자는 외계인들을 쓸어버리기 원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착해질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본주의는 기생적이고 바이러스 속성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쓸어버리고, 파괴하고, 없애버려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그 사람이 오직 개인적인 도덕만을 운운한다면, 사실 그 사람은 권력의 나팔수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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