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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여자들만의 유토피아 공동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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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만의 유토피아 공동체

OneTiger 2017. 7. 30. 20:00

<혁명하는 여자들>은 페미니즘 장르 소설 모음집입니다. 여러 중편과 단편 소설들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죠. 이 소설 모음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주제 중 하나는 '여자들만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에는 남자가 없고 여자들만 존재합니다. 어쩌면 이걸 여자들만의 유토피아, 페미니즘 유토피아라고 부를 수 있겠죠. 페미니즘은 성 평등 사상이지만, 성 평등을 이룩하고 싶다면 우선 약자(여자)를 끌어올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은 약자에게 초점을 맞춰야 하고, 그래서 여자들만의 공동체는 페미니즘 유토피아 설정이 될 수 있겠죠. 실제 페미니즘 전문가들이 이런 설정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전문가들은 여자들만의 공동체가 페미니즘 사상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말할지 몰라요. 하지만 페미니즘 운동은 '남자에 의존하지 않는 여자들'을 주장하곤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여자들만의 공동체는 남자에 의존하지 않는 여자들을 극단적으로 실험할 수 있어요. 여자들만의 공동체가 페미니즘 사상이 아니라고 해도 여자들의 독립 운동을 지지할 수 있겠죠.



가령,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 같은 소설은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에서 남자들이 존재하지 않아도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잘만 살아갑니다. 이 사회에는 전쟁이나 수탈이나 착취가 없는 듯합니다. 아울러 성 차이에 따른 계급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남자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무조건 전쟁이나 수탈이 사라진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중요한 건 태생적인 성별이 아니라 전쟁과 수탈을 옹호하는 흑색 선전과 사회 구조입니다.


만약 남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여자들만이 남는다고 해도 저런 흑색 선전과 사회 구조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전쟁과 수탈이 횡횡하겠죠. 현대 사회에서 여자들이 중요한 직책을 맡는다고 해도 결국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여전히 그 여자들은 구조적인 전쟁과 오염에 종사하곤 합니다. 그런 사례를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죠. 누군가가 여자냐 남자냐 하는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들도 얼마든지 폭력적일 수 있어요. 뭐, 멀리 갈 필요가 없겠죠. 우리나라 상황만 보면 답이 딱 나옵니다. 태생적인 성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는 <휴스턴, 들리는가?> 같은 소설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남자들이 여자를 사유 재산이나 종속적인 물건으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독립이나 분리를 외치면, 남자들은 게거품을 물고 반대하거나 기겁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유 재산, 자신의 종속적인 소유물이 도망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가부장제 안에서 여자는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존재입니다.


남자가 이른바 입신양명을 실행할 때, 여자는 그걸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야 합니다. 남자가 사회적으로 일할 때, 여자는 가정적인 일에 머물러야 합니다. 가정적인 일 또한 중요하지만, 문제는 가정적인 일이나 가사 노동이 별로 인정을 못 받는다는 점입니다. 가사 노동을 하는 전업 주부를 위해 국가가 가사 임금을 지급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가 임금을 받고, 남자가 그 임금의 일부를 여자에게 줄 뿐입니다. 여자는 남자를 통해 돈을 받습니다. 이런 가부장제 구조 안에서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됩니다. 그리고 사회가 이렇게 굴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남자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 남자들은 여자를 '쾌락을 생산하는 도구'로 바라봅니다. 그렇지 않은 남자들도 많겠지만, '여성의 상품화'는 아주 잘 먹히는 장사입니다. 인터넷을 조금만 둘러보면, 온갖 커뮤니티 사이트와 동영상 사이트와 게시판들이 여성을 상품화합니다. 벌거벗은 여자들이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거나 반라의 여자 캐릭터들이 게임에 등장하죠. 인터넷 속에서 익명의 군중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강간과 성 폭행을 미화하고요. 어떤 사람들은 '남성의 상품화'도 많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네, 남성의 상품화도 많죠. 그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성의 상품화보다 여성의 상품화가 훨씬 시급한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강간이나 성 폭행에서 약자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폭행하는 경우도 많고 남자가 남자를 폭행하는 경우도 많겠지만, 남자가 여자를 폭행하는 경우가 훨씬 많을 겁니다. 이렇게 성 폭행이 심각한 상황에서 여성의 상품화가 사방팔방에 버젓이 팔립니다. 설사 여성의 상품화가 표현의 자유라고 해도 (그것과 별개로) 현실의 폭력은 아주 심각한 지경입니다. 어쩌면 여성의 상품화가 잘 팔리는 이유는 그런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일지 모르죠. 솔직히 현실 사회 구조가 멀쩡하다면, 표현의 자유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렇듯 남자들은 여자를 자기 소유물로 간주합니다. 모든 남자들이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개인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체계의 문제입니다. 가부장제의 문제이고, 경제 독점의 문제이고, 차별을 조장하는 흑색 선전의 문제입니다. 만약 여자들이 남자들의 소유물에서 벗어나기 원한다면, 저런 구조와 체계를 깨뜨려야 할 겁니다. 또한 여자들이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꿈꾸어 볼 수 있겠죠. 여자들만의 공동체 안에서 가부장제나 경제 독점이 완전히 사라질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자 여자가 가난한 여자를 수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현실에서 백인 페미니스트가 흑인 페미니스트를 차별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자들만의 공동체 안에서 적어도 여자들이 다른 성에 억압되는 현상을 피할 수 있겠죠. 적어도 강간이나 성 폭행이 많이 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가상의 사회를 그려볼 수 있고, SF 소설 안에서 논의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휴스턴, 들리는가?> 같은 소설이 의미가 있겠죠. 여자들만의 공동체가 만능 열쇠는 아니겠으나, 그런 공동체를 통해 여자들이 가상의 독립성을 상기해볼 수 있을 겁니다.



SF 소설들은 저런 실험적인 공동체를 이야기하곤 합니다. 각 소설마다 주제나 설정, 분위기는 다를 겁니다. <휴스턴, 들리는가?>에서 작가는 남자의 섹스 욕구와 가부장적 권위에 주목합니다. 몇몇 남자들이 여자들만의 공동체에 방문했을 때, 어떤 남자는 정복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다른 남자(경쟁자)가 없기 때문에 그 남자는 자신이 모든 여자들을 독차지하고 모든 여자들과 섹스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소설 속의 적나라한 표현을 빌린다면, 그야말로 보지들의 천국이죠.


이 남자는 모든 여자들을 정복하고 싶어하고, 황홀경의 환상에 빠집니다. 남자들이 정복 욕구에 얼마나 시달리는지 보여주는 사례죠. 또 어떤 남자는 현명하고 아버지 같은 자신이 여자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에는 권위자가 있어야 하고, 그 남자는 자신이 권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수많은 여자들이 권위자 없이 잘 살아가지만, 그 남자는 자신(권위적인 남자)이 여자들을 지도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어딜 감히 여자가…."라는 생각이죠. 뭐, 수구 세력들은 여전히 '여자는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여자들의 공동체는 20세기 작가만의 상상력이 아닙니다. 이미 옛날에도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다루는 소설이 등장했습니다. 18세기 사라 스콧의 <천년 홀과 주변국 묘사>는 그런 소설입니다. 아무래도 옛날 소설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상을 포함합니다. <휴스턴, 들리는가?>가 하드 SF 설정을 활용한다면, <천년 홀>은 신화적인 환상에 기댑니다. 신은 여자를 억압하는 남자들을 벌합니다. 여자들은 가상의 공동체를 세우고, 다양한 정책들을 실험합니다.


이런 정책들은 당시나 요즘 기준으로 꽤나 진보적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정책들이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의 독립이나 분리를 주장할 수 있는 정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이런 소설이 오늘날의 페미니즘 사상에게 뭔가를 가르쳐줄지 모르죠. 21세기 사회주의자가 <뒤 돌아보며> 같은 소설에서 기본 소득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혹은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생태 사회주의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성 평등 운동의 역사적 흐름이나 기원을 연구할 수 있을 겁니다.



급진적인 사상도 시대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처럼 <천년 홀>은 종교적인 관념에 많이 매달린다고 합니다. 그게 이 책의 단점일 수 있으나, 18세기 유럽인이 종교적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웠을 겁니다. 헨리 조지 같은 사람도 토지 공유를 주장할 때 기독교를 언급했죠. 다시 좀 더 현대적인 소설을 이야기한다면,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고 해도> 역시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그렸죠. 분위기나 주제가 꽤나 전투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전투적인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가부장제나 경제 독점 구조 속에서 남자들은 자기 소유물(여자)을 잃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마치 19세기 백인들이 흑인 노예를 잃지 않기 위해 길길이 날뛴 것처럼요.


<헬페미니스트 선언> 같은 책은 메갈리아가 그걸 단적으로 보여줬다고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메갈리아가 여자들의 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남자들이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는 뜻입니다. 메갈리아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헬페미니스트 선언>의 저 분석은 틀리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다면 전투적인 자세 없이 여자들의 독립을 이야기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는 메갈리아보다 훨씬 극단적인 것들이 넘쳐납니다. 대기업과 자유 시장만 해도 얼마나 극악합니까. 하지만 유독 메갈리아만 욕을 먹었고 화제가 되었죠. 자유 시장은 메갈리아만큼 욕을 먹지 않죠.)



그 밖에 많은 소설들이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이야기하죠. 여기에서 그걸 전부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미래에 (일개 마을이나 도시가 아니라) 정말 여자들만의 국가가 탄생할지 모릅니다. 흐음, 이거 정말 사이언스 픽션 같군요. 저는 그런 국가가 어떻게 돌아갈지 참 보고 싶습니다. 그런 국가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작금의 가부장적이고 성 폭력적인 사상들도 많이 사라질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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