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에픽>이 완벽한 자치성을 얻는가? 본문
"아니, 세상에! 이 해석은 너무 엉터리야!" 문학 평론가가 어떤 해석을 제시할 때, 소설 독자들은 이 해석이 엉터리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이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아무리 문학 평론가가 진지한 해석을 제시한다고 해도, 심지어 소설 독자들은 문학 평론가가 헛소리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왜 진지한 해석이 엉터리 헛소리가 되나요? 왜 소설 독자들이 진지한 해석을 진지하다고 느끼지 않나요? 이 물음은 여러 대답들로 이어질 겁니다. 여러 대답들은 '의도'를 포함할 겁니다. 문학 평론가가 소설 작가 의도를 무시하기 때문에, 소설 독자들은 문학 평론가가 헛소리한다고 느낍니다.
소설 작가 없이, 소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소설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소설 작가에게서 소설은 비롯합니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것처럼, 소설에게 소설 작가는 창조신입니다. 소설 작가는 소설을 구상합니다. 소설 작가가 소설을 구상하는 동안, 의도적으로 소설 작가는 소설을 구상합니다. 의도적으로 소설 작가는 배경을 설정하고, 사건들을 전개하고, 등장인물들을 배치합니다. 소설은 소설 작가 의도를 반영합니다. 소설 세계에게 소설 작가가 창조신이고, 소설이 소설 작가 의도를 반영하기 때문에, 소설 작가 의도는 소설을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소설 작가 의도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만약 소설 독자들이 소설을 해석하기 원한다면, 독자들은 소설 작가 의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소설 독자들은 다른 무엇보다 소설 작가 의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만약 어떤 독자들이 소설 작가 의도를 무시한다면, 이 독자들은 가장 중요한 기준을 무시할 겁니다. 이 독자들이 가장 중요한 기준을 무시하기 때문에, 이 독자들은 헛소리에 빠질지 모릅니다. 이 독자들처럼, 만약 문학 평론가가 소설 작가 의도를 무시한다면, 문학 평론가는 헛소리에 빠질지 모릅니다. 도리스 레싱은 <풀잎은 노래한다>를 썼습니다. 이 소설이 쥐라기 공룡을 의도하나요?
도리스 레싱이 얼마나 치열하게 스테고사우루스와 케라토사우루스가 싸우는지 의도했나요? 그건 아닙니다. 스테고사우루스와 케라토사우루스는 도리스 레싱 의도가 아닙니다. 쥐라기 골판 공룡이 도리스 레싱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만약 문학 평론가가 얼마나 치열하게 스테고사우루스와 케라토사우루스가 싸우는지 해석한다면, 소설 독자들은 문학 평론가가 헛소리한다고 느낄 겁니다. <풀잎은 노래한다>와 선사 시대 골판 공룡이 아무 관계를 맺지 않는 것처럼, 문학 평론가가 소설을 해석할 때, 문학 평론가는 다른 무엇보다 소설 작가 의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의도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이건 소설 해석이 유일한 정답을 요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설 해석들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법 앞에서>를 썼습니다. <풀잎은 노래한다>가 얼마나 치열하게 스테고사우루스와 케라토사우루스가 싸우는지 의도하지 않는 것처럼, <법 앞에서>는 스테고사우루스와 케라토사우루스를 의도하지 않을 겁니다. 시골 사람은 스테고사우루스가 아닙니다. 문지기는 케라토사우루스가 아닙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가 골판 공룡을 해석한다면, 소설 독자들은 문학 평론가가 헛소리한다고 지적할 겁니다. <풀잎은 노래한다>처럼, <법 앞에서>는 골판 공룡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록 시골 사람이 스테고사우루스가 아니라고 해도, 시골 사람과 문지기는 여러 해석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법 앞에서>는 여러 해석들을 인정합니다. 어쩌면 문지기는 계급 권력을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시골 사람은 주체가 되기 원하지 않습니다. 시골 사람은 문지기가 허락하기를 기다립니다. 시골 사람은 문지기 허락을 기다립니다. 스스로 시골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스스로 시골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만약 민중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지배 계급 권력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지배 계급 사회에서 지배 계급을 위해 법은 존재합니다. 이 도구는 억압을 정당화합니다.
법은 지배 계급을 위한 도구입니다. 법이 지배 계급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에, 법 앞에서 민중들은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만약 민중들이 지배 계급 권력을 몰아내지 않는다면, 법 앞에서 민중들은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시골 남자와 문지기는 이 주제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이 해석은 엉터리 헛소리가 아닐 겁니다. 적어도 스테고사우루스와 케라토사우루스보다 이 해석은 타당할 수 있습니다. 이 해석이 타당한 것처럼, <법 앞에서>는 여러 해석들을 인정합니다. <법 앞에서>처럼, <풀잎은 노래한다> 역시 여러 해석들을 인정합니다. 골판 공룡은 지나친 해석이나, 다른 해석들은 가능합니다.
<풀잎은 노래한다>가 여러 해석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소설은 여러 해석들을 인정합니다. 소설은 픽션, 허구입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다른 허구들 역시 여러 해석들을 인정합니다.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보드 게임, 비디오 게임, 허구들은 여러 해석들을 인정합니다. 이 그림(링크)을 보세요. 이 그림에서 어떤 여자는 식물을 심습니다. 어쩌면 이 여자 표정은 아주 평온한지 모릅니다. 이 그림이 여러 식물들을 보여주고 대지가 짙은 녹색이기 때문에, 그림 분위기는 울창하고 싱그럽습니다. 하늘에서 동그란 해가 떠있기 때문에, 그림 분위기는 비단 싱그러울 뿐만 아니라 화창하기도 합니다.
그림 분위기가 울창하고, 싱그럽고, 화창하기 때문에, 이 그림은 긍정적입니다. 이 그림이 긍정적이기 때문에, 여자 표정은 평온한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여자 표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 그림이 여자 표정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평온한 얼굴은 유일한 해석이 아닙니다. 어쩌면 여자는 커다란 미소를 짓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여자는 식물을 노려보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여자 표정은 다소 서글픈지 모릅니다. 심지어 여자는 눈물들을 글썽이는지 모릅니다. <법 앞에서>와 <풀잎은 노래한다>, 소설, 허구가 여러 해석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이 그림, 허구는 여러 해석들을 인정합니다.
허구가 여러 해석들을 인정하기 때문에, 해석은 유일한 정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석들이 다양할 수 있다고 해도, 이 그림은 얼마나 치열하게 스테고사우루스와 케라토사우루스가 싸우는지 의도하지 않을 겁니다. 쥐라기 골판 공룡이 치고 박는다고 표현하기 위해 화가는 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겁니다. 선사 시대 스테고사우루스는 화가 의도가 아닐 겁니다. 아무리 해석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의도적으로 도리스 레싱이 <풀잎은 노래한다>를 썼던 것처럼, 의도적으로 화가가 여자와 울창한 녹색 식물들을 표현했던 것처럼, 허구는 의도를 반영합니다. 의도에서 허구는 비롯합니다.
의도에서 허구가 비롯하기 때문에, 아무리 해석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해석은 의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해석은 다른 무엇보다 의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만약 의도가 쥐라기 골판 공룡을 중시하지 않는다면, 해석 역시 쥐라기 골판 공룡을 중시해서는 안 됩니다. 의도에서 허구가 비롯하고, 의도가 허구를 해석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심지어 소설 독자들은 소설 작가 의도가 소설 본질이라고 느끼는지 모릅니다. "해석은 소설 작가 의도를 파악한다. 소설 작가 의도는 소설 본질이다. 다른 것들은 보조적이다." 네, 맞습니다. 소설 작가 의도보다 다른 것들은 보조적인지 모릅니다.
특히, 소설은 허구입니다. 소설이 허구인 것처럼,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보드 게임, 비디오 게임 역시 허구입니다. 현실과 허구는 다릅니다. 현실에서 소설 등장인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소설 세계에서만 소설 등장인물은 존재합니다. 현실에서 도리스 레싱이 살아가기 때문에, 도리스 레싱은 진짜 인간입니다. 도리스 레싱과 달리, 많은 소설 등장인물들은 가짜 인간들입니다. 현실에서 이 소설 등장인물들이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도리스 레싱, 진짜 인간과 달리, 이 소설 등장인물들은 가짜입니다. 현실에서 소설 등장인물이 살아가지 않는 것처럼, 현실과 소설 세계는 똑같지 않습니다.
현실과 소설 세계는 다릅니다. 비단 소설만 아니라 다른 허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현실과 허구 세계는 다릅니다. 현실과 허구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허구 세계는 독립적인 세계일 수 있습니다. 허구 세계가 독립적이기 때문에, 허구 세계는 자치성(自治性)을 얻습니다. 허구 세계가 자치성을 얻기 때문에, 현실에서 허구 세계는 벗어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허구 세계가 벗어나기 때문에, 현실과 허구 세계는 떨어집니다. 현실과 허구 세계가 떨어지기 때문에, 현실은 허구 세계에게 개입하지 못합니다. 현실이 허구에게 개입하지 못하고, 의도에서 허구가 비롯하기 때문에, 의도는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소설 독자들이 소설, 허구를 인식할 때, 소설 독자들은 독립적인 체계, 자치성을 인식합니다. 독립적인 체계, 자치성은 허구와 비허구,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합니다. 엘린 켈지는 <거인을 바라보다>를 썼습니다. <거인을 바라보다>는 소설이 아닙니다. 이 해양 동물학 서적은 허구가 아닙니다. <거인을 바라보다>가 허구가 아니기 때문에, <법 앞에서>와 <거인을 바라보다>는 다릅니다. <법 앞에서>는 자치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 <법 앞에서>는 벗어날 수 있고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거인을 바라보다>는 현실과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동물학 서적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하지 않습니다.
<법 앞에서>와 <거인을 바라보다>가 다른 것처럼, 자치성은 허구와 비허구를 구분합니다. <거인을 바라보다>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하지 않기 때문에, 이 해양 동물학 서적이 현실로 이어지기 때문에, 엘린 켈지 의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닙니다. 엘린 켈지 의도보다 해양 동물학 지식들은 훨씬 중요한 기준입니다. 만약 <거인을 바라보다>가 향유 고래를 실루리아기 동물이라고 설명한다면, 이 설명은 오류일 겁니다. 이 설명이 해양 동물학 지식들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거인을 바라보다>와 달리, <법 앞에서>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하기 때문에, 현실 지식들과 <법 앞에서>는 충돌하지 않습니다.
현실 지식들과 <법 앞에서>가 충돌하지 않고, 프란츠 카프카 의도에서 <법 앞에서>가 비롯했기 때문에, 현실 지식들보다 프란츠 카프카 의도는 훨씬 중요합니다. <법 앞에서>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하고, 프란츠 카프카 의도가 자치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프란츠 카프카 의도는 가장 중요한 해석 기준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의도가 가장 중요한 해석 기준인 것처럼, 허구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다른 무엇보다 소설 작가 의도가 중요하다고 판단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의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만약 문학 평론가가 의도를 무시하고 소설, 허구를 해석한다면, 이 해석은 헛소리에 빠질 겁니다.
의도가 허구에게 자치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심지어 소설 독자들은 소설 작가 의도가 소설 본질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분명히 허구는 자치성을 얻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허구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한다고 해도, 완벽하게 이 체계가 독립적인가요? 아무리 허구가 자치성을 얻는다고 해도, 이 자치성이 완벽한가요? 김장철 부엌칼이 가을 무를 뎅겅~ 자르는 것처럼, 완벽하게 제4의 벽이 현실과 허구를 자르나요? 특히, 만약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가 완벽한 자치성을 얻는다면, 이 완벽한 자치성은 심각한 문제가 될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가 비(非)현실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SF, 사이언스 픽션은 우주 전투기가 인공 지능 지뢰들을 돌파하고 외계 행성으로 진입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맙소사! 현실에서 우주 전투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비록 현실에서 우주 전투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세계에서 우주 전투기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현실과 SF 세계는 다릅니다. 현실과 SF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SF 세계는 비현실 세계입니다. 우주 전투기가 외계 행성으로 진입하는 것처럼, SF, 사이언스 픽션은 비현실 세계를 묘사합니다. 판타지 세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현실에서 야생 정령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판타지 세계에서 야생 정령들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비현실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완벽한 자치성을 얻는다면, 비현실 세계는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할 겁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주 전투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그 자체로서 우주 전투기가 존재한다면, 아이고~, 이 상황은 황당무계할 겁니다. 적어도 많은 허구들은 현실을 모방합니다. 비록 허구와 현실이 다르다고 해도, 적어도 많은 허구들은 현실을 모방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을 모방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주 전투기는 현실보다 비현실 세계에 속합니다.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오직 현실만 모방한다면, 우주 전투기는 절대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비디오 게임 <에픽>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에픽>이 우주 선단, 우주 함대, 우주 전투기, 외계 문명, 기타 등등을 묘사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에픽>은 우주 오페라(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우주 오페라 세계는 비현실 세계입니다. 비록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 제작자에게 묻지 않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우주 오페라가 비현실 세계라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게임 제작자님, <에픽>이 비현실 세계인가요? 게임 제작자님이 비현실 세계를 의도했나요?" 비록 게임 플레이어가 묻지 않는다고 해도, 뭐라고 게임 제작자가 의도했든, 게임 플레이어는 <에픽>, 우주 오페라가 비현실 세계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에픽>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비현실 세계를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우주 전투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비현실 세계가 완벽한 자치성을 얻는다면, 게임 제작자 의도와 상관없이, 아아~, 비현실 세계는 황당무계할 겁니다. 만약 비현실 세계가 완벽한 자치성을 얻는다면,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완벽하게 독립적인 <에픽> 세계를 믿는다면, 현실에서 우주 전투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아~, 게임 플레이어는 현실 도피자가 될 겁니다. 도피성은 사이언스 픽션을 비난하기 위한 가장 커다란 이유입니다. "아니, 뭐라고? 어떻게 현실에서 우주 전투기가 존재하지? 어휴, 사이언스 픽션은 황당무계해."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사이언스 픽션은 비현실 세계를 묘사합니다. 현실에서 우주 전투기, 비현실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사이언스 픽션이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한다면, 만약 이 독립적인 체계가 완벽한 자치성을 얻는다면, 이 자치성은 황당무계할 겁니다. 그래서 이 자치성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에픽> 세계, 우주 오페라 세계, 사이언스 픽션 세계, 비현실 세계는 완벽하게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하지 않습니다. <에픽>은 광대한 첨단 기술 전투를 과장합니다. 그 자체로서 우주 오페라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에픽>은 과장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에픽>처럼, 비현실 세계는 어떤 주제를 과장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판타지 세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판타지 세계가 비현실 세계이기 때문에, 판타지 세계는 어떤 주제를 과장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비현실 세계가 수단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비현실 세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이 나타나는 것처럼, 주제를 과장하기 위해, 이 목적을 위해 비현실 세계(수단)는 나타납니다. 비단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만 아니라 다른 허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설, 만화,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보드 게임, 비디오 게임, 다른 허구들 역시 완벽한 자치성을 얻지 못합니다. 허구가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허구는 가짜를 가리킵니다. 우주 전투기와 야생 정령처럼,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가 비현실 세계를 묘사하고, 소설부터 비디오 게임까지, 이 허구들보다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가 훨씬 가짜이기 때문에, 다른 허구 자치성들보다 사이언스 픽션 자치성, 판타지 자치성은 수단에 훨씬 가깝습니다. 두 장르가 수단에 가깝기 때문에, 독립적인 체계가 완벽한 자치성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에서 의도는 본질이 되지 않습니다. <에픽> 세계가 비현실 세계이고, 현실에서 비현실 세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어가 게임 제작자 의도를 묻기 전에, 게임 플레이어는 비현실 세계를 물어야 합니다.
다른 허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의도에서 허구는 비롯하나, 허구가 완벽한 자치성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리 의도가 가장 중요한 해석 기준이라고 해도, 의도는 본질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허구들보다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가 비현실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의도보다 비현실 세계는 훨씬 중요합니다. "아니, 왜 내가 비현실 세계를 파악해야 해? 나는 그저 우주 전투기 게임을 플레이하기 원할 뿐이야. 나는 비현실 세계를 중시하지 않아." 게임 플레이어는 비현실 세계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 플레이어가 무시한다고 해도, 분명히 우주 오페라 세계는 비현실 세계입니다.
비록 게임 제작자가 비현실 세계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비록 게임 플레이어가 비현실 세계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에픽>은 비현실 세계를 묘사합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현실에서 게임 제작자는 살아가고, 현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살아가나, 왜 게임 제작자가 비현실 세계를 구상하고, 왜 게임 플레이어가 비현실 세계를 즐기나요? <거인을 바라보다>와 달리, 비현실 세계가 자치성을 얻기 때문에, <거인을 바라보다>와 <에픽>은 다르나, 한편으로 비현실 세계 자치성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거인을 바라보다>가 현실로 이어지는 것처럼, <에픽>은 현실로 이어집니다.
어쩌면 어떤 SF 소설 작가들은 이 연결을 거부할지 모릅니다. 이 SF 소설 작가들은 SF 세계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한다고 주장하기 원할 겁니다. 이 SF 소설 작가들은 SF 세계가 완벽한 자치성을 얻는다고 주장하기 원할 겁니다. 의도적으로 SF 소설 작가가 SF 세계를 구상하기 때문에, 의도가 비현실 세계를 만들기 때문에, 만약 의도가 자치성을 원한다면, 비현실 세계는 자치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현실 세계에서 SF 소설 작가는 살아가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SF 소설 작가는 살아갑니다. SF 소설 작가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합니다. 그래서 의도보다 비현실 세계는 중요합니다.
SF 세계는 비현실 세계입니다. 비현실 세계에서 SF 소설 작가는 살아가지 않습니다. SF 소설 작가 의도보다 비현실 세계는 중요한 화두입니다. 영화 <설국 열차>를 보세요. <설국 열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묘사합니다. <설국 열차>가 비현실 세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설국 열차>는 완벽한 자치성을 얻지 못합니다. 아무리 <설국 열차>가 자치성을 얻는다고 해도, 이 자치성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 자치성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설국 열차>는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하지 못하고, <설국 열차>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설국 열차>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설국 열차>는 현실에 종속됩니다. <설국 열차>가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묘사하고, 현실에서 세계화 자본주의가 너무 심각한 착취이기 때문에, 심지어 세계화 자본주의가 가장 심각한 오염이기 때문에, <설국 열차>는 자본주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설국 열차>는 다양한 해석들을 인정할 수 있고, 세계화 자본주의가 가장 심각한 계급 차별이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들은 자본주의 문제를 포함합니다. 봉준호 감독이 이것을 의도했나요? 어쩌면 봉준호 감독은 의도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봉준호 감독은 의도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뭐라고 영화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는 본질이 아닙니다.
비현실 세계가 완벽한 자치성을 얻고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할 때, 아아~, 비현실 세계는 황당무계한 가짜가 됩니다. 황당무계한 가짜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현실 세계는 현실, 연결을 요구합니다. 영화 감독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현실에서 영화 감독이 살아가고, 현실에서 영화 관객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비현실 세계는 현실, 연결을 요구합니다. <설국 열차> 세계에서 수직적인 계급 차별은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현실에서 세계화 자본주의가 가장 심각한 계급 차별이기 때문에, <설국 열차>가 현실과 이어질 때, 영화 감독 의도와 상관없이, <설국 열차>는 자본주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어떤 영화 관객들은 자본주의 문제보다 미지와의 조우를 해석하기 원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 홍보 문구는 '나는 닫힌 문을 열고 싶다'야. 주연 등장인물이 닫힌 문을 열기 때문에, 주연 등장인물은 새로운 세계와 만날 수 있어. 주연 등장인물이 새로운 세계와 만나기 때문에, 주연 등장인물은 미지와 조우할 수 있어. 이 영화 주제는 자본주의 문제보다 미지와의 조우야." 이 해석처럼, <설국 열차>는 자본주의 문제보다 미지와의 조우, 새로운 세계, 탐험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허구가 다양한 해석들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 해석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비현실 세계는 현실, 연결을 요구합니다.
영화 감독 의도와 상관없이, 황당무계한 가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설국 열차>는 현실을 요구합니다. 이 비현실 세계와 현실이 이어질 때, 현실에서 무엇이 가장 심각한 주제인가요? 미지와의 조우가 가장 심각한가요? 그건 아닙니다. 화성 탐사 계획이 자본주의 권력에게 종속되는 것처럼, 현실에서 미지와의 조우보다 세계화 자본주의는 훨씬 지배적입니다. 아무리 현실에서 어떤 사람들이 추상적인 탐사를 느낀다고 해도, 이 사람들은 세계화 자본주의에게 종속됩니다. 어떤 관객들은 미지와의 조우를 해석할 수 있으나, 억압적인 현실 때문에, 이 해석은 자본주의 문제를 넘어가지 않습니다.
만약 영화 감독이 자본주의 문제보다 미지와의 조우를 의도했다면, 만약 자본주의 문제보다 미지와의 조우가 의도라면, 미지와의 조우가 자본주의 문제를 가로막을 수 있나요? 의도가 가장 중요한 해석 기준이기 때문에, 의도가 지배적인 현실 문제를 가로막나요? 만약 의도가 지배적인 현실 문제를 가로막는다면, 이건 또 다른 문제를 유발할 겁니다. 어제 12월 10일 게시글이 설명했던 것처럼, 비록 어떤 판타지 게임이 이른바 '신사적인' 여자 등장인물을 표현한다고 해도, 게임 제작자는 가부장 편견이 의도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 편견보다 의도는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아름다운 여자를 과장하기 위해 판타지 게임이 신사적인 여자 등장인물을 표현한다면, 가부장 편견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의도이기 때문에, 의도가 가장 중요한 해석 기준이기 때문에, 이 판타지 여자 등장인물과 현실의 가부장 편견에게 아무 접점이 없나요? 이 판타지 여자 등장인물과 가부장 편견에게 아무 접점이 없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의도를 존중해야 하나요? 페미니즘이 의도를 존중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이 가부장 편견을 비판해서는 안 되나요? 의도가 가부장 편견 문제를 가로막을 수 있나요? 이 물음들은 비단 신사적인 여자 등장인물만 아니라 <설국 열차> 역시 향할 수 있습니다.
<설국 열차>는 봉준호 감독에게 속합니다. 의도적으로 봉준호 감독이 <설국 열차>를 촬영했기 때문에, <설국 열차>,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 의도에 속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설국 열차>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설국 열차>를 분류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기준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봉준호 감독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창조하지 않았고 사이언스 픽션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설국 열차>를 분류하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나, 봉준호 감독은 이 장르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봉준호 감독보다 이 장르는 훨씬 거대합니다.
<설국 열차>가 개별적인 영화일 때, 관객들은 영화 감독 의도를 중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보다 <설국 열차>는 우선하지 않습니다. <설국 열차>보다 훨씬 먼저 사이언스 픽션은 나타났습니다. 사이언스 픽션, 이 장르는 특정한 개인에게 종속되지 않습니다. 아니, 심지어 비현실 세계 문학은 보편적인 인류 문화이기조차 합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도 비현실 세계 문학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설국 열차>가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고, <설국 열차>보다 사이언스 픽션이 훨씬 거대하기 때문에, 영화 감독 의도와 상관없이, 장르 평론가는 물을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비현실 세계를 좋아하는가?"
의도보다 장르는 훨씬 거대합니다. 분명히 의도보다 장르는 훨씬 거대합니다. 이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아무도 이 객관적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비단 <에픽>, <설국 열차>만 아니라 다른 소설들, 그림들, 만화들, 연극들, 영화들, 애니메이션들, 보드 게임들, 비디오 게임들, 피규어들, 프라모델들, 기타 등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도리스 레싱이 SF 소설을 쓴다고 해도, (그리고 비록 편협하고 한심한 해롤드 블룸이 도리스 레싱을 비난한다고 해도) 도리스 레싱은 SF 소설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스 레싱보다 SF 소설은 훨씬 거대합니다. 도리스 레싱보다 이 장르는 훨씬 우선합니다.
편협하고 한심한 해롤드 블룸보다 사이언스 픽션은 훨씬 거대합니다. 해롤드 블룸보다 이 장르는 훨씬 우선합니다. 많은 사례들은 의도보다 장르가 거대하다고 보여줍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도리스 레싱 소설을 해석할 때, 독자들은 장르를 의식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독자들은 오직 개별적인 문학으로서만 도리스 레싱 소설을 인식할지 모릅니다. 이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이게 좁은 시각이 아닌가요? 의도보다 장르는 거대하나, 왜 독자들이 오직 의도만 중시하고 장르를 외면하나요? 왜 장르가 (가장) 중요한 해석 기준이 되지 않나요? 사이언스 픽션 없이, 그 자체로서 <에픽>이 나타날 수 있나요?
이 게시글은 참여 문학을 의도하지 않습니다. 이 게시글은 <에픽>이 그저 황당무계한 가짜가 아니라고 변호하기 원할 뿐입니다. 이 게시글은 우주 바이오 돔, 거대 괴수, 생체 비행선, 어머니 행성, 야생 정령을 변호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참여 문학을 주장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비록 제가 참여 문학을 의도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 의도와 상관없이, 현실에서 이미 참여 문학이 커다란 논의이기 때문에, 뭐라고 제가 의도하든,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참여 문학을 주장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참여 문학을 느끼는 것처럼, 의도는 우선하지 않습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이게 뭐시다냐?" 이 물음은 의도를 파악하지 않습니다. 이 물음은 의도가 우선한다고 증명하지 않습니다. 이 물음처럼, 우리가 어떤 대상을 파악할 때, 우리는 의도를 파악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의도를 파악한다고 해도, 의도는 우선하지 않습니다. 이 물음이 의도를 파악하지 않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에서도 의도는 본질이 아닙니다. 이 물음과 달리, 어떤 대상과 달리,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 판타지가 독립적인 체계를 이룩하고 자치성을 얻는다고 해도, 아무리 의도가 자치성을 부여한다고 해도, 이 자치성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의도는 본질이 아닙니다.
※ 게임 <에픽> 스크린샷 출처: 9Pix9,
https://www.youtube.com/watch?v=2nycZ4BleiU
※ 검룡 모형 사진 출처: Somchai Kongkamsri,
https://www.pexels.com/photo/dinosaur-garden-dinosaur-model-437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