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아이 로봇>이 오직 아시모프만의 소설인가 본문
소설 <아이 로봇>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입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 로봇>이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고 방식에는 어떤 함정이 있습니다. 정말 <아이 로봇>이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일까요? 분명히 이 소설을 쓴 작가는 아이작 아시모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 로봇>이 아시모프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아이작 아시모프에게는 저작 권리가 있겠죠.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 그 자체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것일까요? 본인이 혼자 읽기 위해 아이작 아시모프가 <아이 로봇>을 썼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여러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아시모프는 <아이 로봇>을 썼을 겁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아이 로봇>을 읽을지 아시모프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아시모프는 본인 이외에 그 누구도 <아이 로봇>을 읽지 않을 거라고 걱정했을지 모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독자 없는 소설들이 많습니다. 소설 작가가 원고를 출판사에 보낸다고 해도, 숱한 출판사들은 원고를 서랍 속에 대충 집어넣고 잊어버립니다. 애석하게도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보낸 수많은 원고들은 그런 운명을 피하지 못합니다. 숱한 출판사들의 사무실 서랍들 속에서 원고들은 쿨쿨 기나긴 잠에 빠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원고를 쓴 작가 이외에 아무도 그 소설을 읽지 않을 겁니다. 이런 소설은 독자 없는 소설이 되겠죠.
아니, 잠깐. 이게 가능한가요? 독자 없는 소설? 독자 없는 소설이 존재할 수 있나요? 만약 어떤 작가가 SF 소설을 탈고했다고 해도, 아무도 그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심지어 출판사들조차 그 소설을 줄줄이 외면한다면, 그 소설이 소설이 될 수 있을까요? 작가가 소설을 썼다고 해도, 아무도 그걸 읽지 않는다면, 그게 소설이 될까요? 만약 이게 소설이 될 수 있다고 해도, 이건 독자 없는 소설일 겁니다. 소설 작가들은 절대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겠죠. 소설을 쓸 때, 작가는 그걸 자신이 혼자 읽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떤 작가는 혼자 재미있게 자신이 쓴 소설을 읽을지 모르죠. 사실 여러 팬 픽션들은 그런 부류입니다.
팬 픽션들을 쓸 때, 작가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내용들을 집어넣습니다. 다른 독자들이 읽지 않는다고 해도, 팬 픽션들 속에서 작가들은 얼마든지 기쁨을 누릴 수 있겠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소설을 쓸 때, 작가는 독자가 소설을 읽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얼마나 많은 독자들이 소설을 읽을지 작가는 알지 못하나, 작가는 독자들을 상정합니다. 분명히 아이작 아시모프는 여러 독자들이 <아이 로봇>을 읽을 거라고 기대했을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작가와 독자는 소설을 함께 완성합니다. 작가가 원고를 탈고한다고 해도, 그 순간에서 소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소설이 아니라 그저 탈고된 원고일 뿐입니다.
독자들이 <아이 로봇>을 읽지 않았다면, <아이 로봇>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적어도 일반적인 소설로서 <아이 로봇>은 존재하지 못했겠죠. <아이 로봇>이 존재하는 이유는 비단 아이작 아시모프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유일한 이유가 아닙니다.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소설로서 <아이 로봇>은 존재할 수 있죠. 물론 아이작 아시모프는 가장 커다란 공로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독자들이 <아이 로봇>을 읽고 싶다고 해도, 아시모프가 그걸 쓰지 않았다면, 아무도 <아이 로봇>을 읽지 못했을 겁니다.
아시모프가 <아이 로봇>을 쓰지 않았다면, 소설이 아니라 그저 아시모프의 머릿속에서 로봇 3원칙은 존재했을 뿐이겠죠. 그래서 우리는 <아이 로봇>이 아시모프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아이 로봇>을 읽을 때, 우리는 독자가 '아시모프를 읽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독자는 아이작 아시모프를 읽지 않습니다. <아이 로봇>은 아이작 아시모프가 아닙니다. 두 가지는 서로 다르죠. 작가는 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이작 아시모프가 <아이 로봇>을 창작했기 때문에, 아시모프가 쓰지 않았다면 아무도 <아이 로봇>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가 <아이 로봇>을 읽을 때, 우리는 독자가 아시모프를 읽는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도 아이작 아시모프는 혼자 <아이 로봇>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소설로서 <아이 로봇>은 작가와 독자를 함께 원합니다. 아시모프가 혼자 <아이 로봇>을 탈고했다고 해도, 그건 그저 탈고된 원고일 뿐입니다. 아시모프는 가장 커다란 공로를 차지할 수 있으나, <아이 로봇>은 독자들을 떼어놓지 못합니다. 그래서 작가와 독자는 함께 소설을 완성하죠. 소설이 존재할 때, 작가와 독자는 함께 존재해야 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소설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독자들이 서로 다르게 소설을 읽는다는 사실입니다. 작가와 독자는 다릅니다. 작가와 독자는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아시모프가 로봇 3원칙을 썼다고 해도, 독자는 그걸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는 로봇 3원칙이 가전 제품 3원칙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한때 국내 SF 독자들 사이에서 그런 농담은 커다란 인기를 끌었죠. 하지만 어떤 독자는 정말 진지하게 가전 제품 3원칙을 고려할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이 올바른 해석일까요? 아시모프는 로봇 3원칙이 가전 제품 3원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어떤 단편 소설에서 아시모프는 로봇과 냉장고가 비슷하다고 썼습니다. 정말 로봇 3원칙이 가전 제품 3원칙이 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런 해석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시모프가 반대한다고 해도, <아이 로봇>은 온전히 아시모프의 것이 아닙니다. 아시모프는 저작 권리를 주장할 수 있으나, '비평 권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작가와 함께 독자들은 소설을 완성할 수 있어요. 그때 독자들은 독창적인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아시모프가 그런 해석을 싫어한다고 해도, 소설은 독자를 원합니다. 그래서 작가와 독자는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죠. 물론 아이작 아시모프는 오직 로봇 3원칙만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등장인물들과 서사들을 제시했고, 전반적인 맥락을 훑어볼 때, 독자들은 아시모프와 비슷한 주제에 다다를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언제나 소설이 수많은 논란들을 부른다면, 작가들은 소설들을 쓰지 않을지 모릅니다. 보편적인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에, 엉뚱한 해석들이 튀어나올 수 있음에도, 작가들은 소설들을 쓸 수 있겠죠. 만약 모든 독자가 로봇 3원칙이 가전 제품 3원칙이라고 해석했다면, 아시모프는 펜을 꺾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보편적인 해석이 존재한다고 해도, 엉뚱한 해석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23세기나 24세기 독자들은 20세기 독자들과 완전히 다른 해석들을 내놓을지 모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미 고인이기 때문에 아시모프는 23세기 독자들과 24세기 독자들에게 간섭하지 못하죠.
소설을 비롯해 문학은 설명서가 아닙니다. 문학이 설명서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학을 다양한 방법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건 모든 비평과 해석에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고대 가요 <황조가>가 꾀꼬리의 행동을 연구하는 생태 문학이라고 해석할지 모릅니다. 사실 고구려 유리명왕은 뛰어난 생태학자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끈질긴 잠복 관찰을 거친 이후 마침내 유리명왕은 꾀꼬리의 짝짓기를 연구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유리명왕은 <황조가>를 지었을지 모릅니다. 무덤 속에서 유리명왕이 살아돌아온다고 해도, 유리명왕은 이런 해석에 함부로 간섭하지 못하겠죠. 하지만 문학 평론가들은 이런 해석을 지지하지 않을 겁니다. 논리적인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꾀꼬리 암컷과 수컷이 짝짓기한다는 이야기는 별로 학구적이지 않습니다. 유리명왕이 생태학자였다는 기록이나 유리명왕이 추레하고 지겨운 잠복 관찰을 시도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작물을 비평하고 해석할 때, 사람들은 논리적인 근거를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비평이 논리적인 근거를 뒷받침할 수 있다면, 아무리 그 비평이 상식에 어긋나거나 황당하거나 유치하다고 해도, 분명히 그 비평에게는 가치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상식에 어긋나거나 황당하거나 유치한 해석들은 필수적일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이 오직 진지한 평론만을 원한다면, 비평이 존재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이렇게 작가와 독자는 함께 소설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문학을 해석하는 정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지한 문학을 진지하게 평가하고 유치한 문학을 유치하게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고전 소설은 무조건 진지한 평가 대상입니다. 어린이들이 읽는 생태학 소설에게는 진지한 평가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가 아동 생태학 소설을 이용해 사회 구조와 환경 오염을 '진지하게 논의'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걸 비웃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유치함이나 진지함이나 가벼움이나 무거움이 아니라 논리적인 근거일 겁니다. 논리적인 근거 없이 무조건 진지한 비평보다 논리적인 근거가 있는 유치한 해석은 훨씬 큰 가치를 선사할 수 있겠죠.
가령, <바다 탐험대 옥토넛>은 해양 생태학을 설명하는 과학 학습 애니메이션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골자는 해양 생태학입니다. 다른 것들은 부수적입니다. <옥토넛>은 의도적으로 서사, 등장인물, 배경을 제한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만약 누군가가 <옥토넛>을 이용해 사회 구조와 환경 오염을 이야기한다면, 거기에 아무 가치가 없을까요? 만약 누군가가 <옥토넛>을 이용해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는 사회 구조를 진지하게 논의한다면, 그게 초점이 어긋난 비평이 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해양 생태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옥토넛>은 해양 생태학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옥토넛>을 이용해 사회 구조와 환경 오염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런 비평에는 어느 정도 가치가 있겠죠. 어쩌면 그런 비평은 아주 중요할지 모릅니다.
물론 우리가 사회 구조와 환경 오염을 이야기하고 싶다면, 이 세상에는 <바다 탐험대 옥토넛>보다 훨씬 '진지한 비평'에 어울리는 창작물들이 많습니다. <옥토넛>보다 소설 <2312>나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나 비디오 게임 <블록후드>는 훨씬 진지한 비평에 어울릴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이들이 <옥토넛>을 시청할 때, 엄마와 아빠와 이모와 삼촌과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 <옥토넛>을 시청할 겁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옥토넛>을 시청한다면, 어른은 <옥토넛>을 이용해 훨씬 '진지한' 이야기들을 아이에게 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은지야, 저것 봐. 바다 생태계가 정말 신비롭고 웅장하지? 하지만 바다 생태계는 심각한 위기에 처했단다. 이른바 문명 사회에서 권력자들이 무분별한 산업 개발을 추구하기 때문이지."
소심하고 작은 페이소가 거대한 고래 상어를 치료하는 것처럼, 바다 생태계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어쩌면 이건 아주 중요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아이 로봇>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4세기에 고급 인공 지능을 갖춘 인간형 로봇은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24세기 독자들은 아시모프 본인과 20세기 독자들보다 훨씬 황당하거나 유치한 해석들을 내놓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황당하거나 유치하다고 해도, 그것들은 현실을 반영하는 해석들이겠죠. 그때 <아이 로봇>을 바라보는 시선들과 함께 소설 <아이 로봇>은 새롭게 존재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