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아르켈론, 백과 사전 지식과 SF 공식 본문
"우와, 저기를 봐! 저건 아르켈론이야!" 경이로운 탄성과 함께 아랫집 수진은 왼손을 들었다.
위 문구는 아주 간단합니다. 만약 독자가 한글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면, 독자는 위 문구를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독자가 위 문구를 읽는다고 해도, 독자가 위 문구를 '해석'할 수 있나요? 위 문구를 해석하기 위해 독자에게 다른 것들이 필요하지 않나요? 위 문구가 아주 간단함에도, 위 문구는 많은 것들을 요구할지 모릅니다. 위 문구는 세 문장들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문장은 대사입니다. '우와'는 감탄사이고, '저기를 봐'는 권유나 명령입니다. 아랫집 수진은 존댓말보다 반말을 씁니다. '저것'은 지시 대명사이고, 이건 아르켈론을 가리킵니다. 대사 뒤에는 일반적인 서술 문장이 있습니다.
대사에 감탄사 '우와'가 있기 때문에, 서술 문장은 '경이로운 탄성'을 언급합니다. '경이로운 탄성'은 '우와'를 받습니다. '경이로운 탄성과 함께'라는 문구는 '경이로운 탄성을 외치며'라는 문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구는 아랫집 수진과 경이로운 탄성이 동등한 주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아랫집 수진이 경이롭게 탄성을 질렀다는 뜻입니다. '함께'는 경이로운 탄성과 아랫집 수진이 동등하다고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윽한 바에서 한우진과 함께 도가영은 술잔을 기울인다." 여기에서 '함께'는 한우진과 도가영이 어느 정도 동등하다고 보여줍니다. 반면, 경이로운 탄성과 아랫집 수진은 동등하지 않습니다.
'함께'가 경이로운 탄성과 아랫집 수진을 묶는다고 해도, '함께'는 경이로운 탄성이 아랫집 수진에게 속한다고 가리킵니다. "경이로운 탄성과 함께 아랫집 수진은 왼손을 들었다."와 "그윽한 바에서 한우진과 함께 도가영은 술잔을 기울인다."에서 '함께'는 다른 용법입니다. 한국어는 '탄성과 함께'를 '탄성을 외치며'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건 번역 문체인지 모릅니다. 영어 'with' 때문에, 위 문구는 '탄성과 함께'라고 서술했는지 모릅니다. 위 문구에서 아랫집 수진은 왼손을 듭니다. 대사에서 '저기를 봐'가 있기 때문에, '왼손을 들었다'는 '저기를 봐'를 받습니다. 아랫집 수진이 뭔가를 가리키기 때문에, 위 문구는 다소 역동적입니다.
서술 문장에서 아랫집 수진이 주체이기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우와, 저기를 봐! 저건 아르켈론이야!"라고 말했을 겁니다. 어쩌면 아랫집 수진은 그저 경이로운 탄성을 질렀을 뿐이고 왼손을 들었을 뿐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와, 저기를 봐! 저건 아르켈론이야!"는 옆동네 철수 대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대사 이후, 서술 문장에서 주체가 아랫집 수진이기 때문에, 독자는 아랫집 수진이 말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건 유일한 해석이 아니나, 그렇다고 해도 이건 타당한 해석입니다. 이렇게 독자는 위 문구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인가요? 독자가 다른 것들을 해석하지 못하나요? 위 간단한 문구에 다른 문제들이 없나요?
위 문구는 간단하나, 단어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장 커다란 난관은 '아르켈론'입니다. 만약 독자가 한글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면, 독자는 '우와, 저기를 봐, 저건, ~이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여러 문장 부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주어, 조사, 줄임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건'은 '저것은'의 줄임말입니다. 하지만 독자가 이런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아르켈론'은 커다란 난관입니다. 도대체 '아르켈론'이 무엇인가요? 이건 일상 용어가 아닙니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아르켈론이라고 쉽게 말하지 않습니다. '우와, 저기를 봐, 저건, ~이야, 경이로운, 탄성, 함께, 아랫집, 왼손'은 일상 용어입니다.
'수진'은 고유 명사이나, 그렇다고 해도 '수진'은 비일상적인 고유 명사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수진'이라는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상 용어들과 아르켈론은 다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아르켈론은 일상 용어인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아르켈론은 일상 용어가 아닐 겁니다. 만약 독자가 한국어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해도, 독자는 아르켈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아르켈론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독자가 위 '간단한' 문구를 해석할 수 있나요? 어떻게 독자가 단어 '아르켈론'을 이해해야 하나요?
위 간단한 문구에서 여러 단어들은 아르켈론으로 이어집니다. '우와, 저기를 봐, 저건, 경이로운 탄성, 왼손을 들었다'는 아르켈론에게서 비롯합니다. 아르켈론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경이로운 탄성을 질렀고, 저기를 보라고 말했고, 왼손을 들었습니다. 위 간단한 문구는 아르켈론을 가리킵니다. 아르켈론이 굉장하다고 주목하기 위해 위 문구는 존재합니다. 만약 위 문구에게 어떤 기능, 목적이 있다면, 그건 시선 집중과 아르켈론입니다. 독자는 아르켈론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위 문구는 주변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아르켈론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위 문구는 존재합니다. 아르켈론을 위해 위 문구는 존재합니다.
만약 독자가 주변 분위기를 물리치고 아르켈론에게 주목한다면, 위 문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겁니다. 전반적으로 위 문구에서 아르켈론은 아주 중요한 대상입니다. 문제는 위 문구에 아르켈론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독자가 위 문구를 골백 번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오직 위 문구만을 이용해 아르켈론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합니다. 아르켈론이 무엇인가요? 이게 달달하고 화끈한 칵테일 이름인가요? 아니면 이게 컴퓨터 이름인가요? 최신형 컴퓨터가 아르켈론인가요? 아랫집 수진이 최신형 컴퓨터를 향해 감탄사를 보내나요? 아니면 이게 외국 사람 이름인가요? '아'폴'론'과 '아'르켈'론'은 비슷합니다.
아폴론이 그리스 남자이고, 아폴론과 아르켈론이 비슷하기 때문에, 아르켈론은 그리스 남자 이름 같습니다. 아랫집 수진이 그리스 남자를 향해 감탄사를 보내나요? 만약 아르켈론이 그리스 얼짱 남자 이름이라면, 배경 무대가 그리스인가요? 아랫집 수진은 그리스 사람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아랫집 수진은 관광객인지 모릅니다. 아크로폴리스 유적지에서 아랫집 수진이 그리스 얼짱 남자 아르켈론을 향해 감탄사를 보내나요? 아니면 배경 무대는 유적지보다 에게 해안의 순결하고 청아한 산토리니인지 모릅니다. 낭만적인 산토리니 해안 마을에서 아랫집 수진은 그리스 얼짱 남자 아르켈론과 사랑♥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나중에 아랫집 수진과 그리스 얼짱 남자 아르켈론은 즐겁게 저녁 식사하고 술잔을 기울일지 모릅니다. 사랑이 넘치는 산토리니 밤하늘 아래에서 아랫집 수진과 아르켈론은 진하게 입을 맞추고, 다급하게 애무하고, 질펀하게 섹스할지 모릅니다. 아르켈론은 수진의 젖가슴에 우조를 붓고, 젖꼭지에 묻은 하얀 액체를 핥고, 서툰 한국어를 이용해 "그대의 젖꼭지는 풍성하고 하얀 젖을 뿜었어."라고 시인처럼 중얼거릴지 모릅니다. 아랫집 수진은 사랑스러운 아르켈론을 품에 꼭 안아줄 겁니다. 그래서 이런 추정이 타당한가요? 독자가 아랫집 수진이 사랑스러운 그리스 얼짱 아르켈론을 품에 꼭 안는다고 추정할 수 있나요?
독자는 위 문구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 문구는 수많은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아르켈론은 최신형 컴퓨터 이름이거나 그리스 얼짱 남자 이름인지 모릅니다. 아르켈론은 달달한 칵테일이거나 다른 무엇인지 모릅니다. 만약 '아르켈론'이 '길냥이'라면, 해석은 훨씬 수월할 겁니다. 위 문구에서 다른 여러 단어들이 일상 용어인 것처럼, 길냥이는 일상 용어입니다. 길냥이가 표준어가 아니라고 해도, 아르켈론보다 길냥이는 훨씬 쉬운 해석입니다. 독자는 거리에서 아랫집 수진이 귀여운 고양이를 향해 탄성을 지르고 왼손을 뻗는다고 연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랫집 수진은 길냥이에게 다가가고 길냥이를 쓰다듬을지 모릅니다. 이건 흔한 일상 풍경이고, 이것을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아르켈론과 달리, 단어 '길냥이'가 친숙한 남한 문화에서 유래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르켈론'이 '전대갈'이라면, 이것 역시 수월한 해석이 될 겁니다. 어쩌면 인터넷 뉴스에서 아랫집 수진은 전대갈을 봤는지 모릅니다. 만약 아랫집 수진이 전대갈을 봤다면, '경이로운 탄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겁니다. 만약 아랫집 수진이 수구 꼴통이라면, 수진은 전대갈을 존경할 테고, 경이로운 탄성은 문자 그대로 경이가 될 겁니다. 하지만 위 문구에는 '왼손'이 있습니다. 남한 문화에서 '왼쪽'은 의미심장합니다. 남한 사회가 세계 최고의 자랑스럽고 용맹무쌍한 반공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남한은 양민들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고문하고, 체포하고, 짓밟는 자랑스럽고 용맹무쌍한 반공 국가입니다.
국내에서 여러 이주 노동자들은 폭력과 협박, 차별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남한 사회는 열등한 동남 아시아 계집년 따위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랑스럽고 용맹무쌍한 반공 국가 남한은 빨갱이들을 몰아내고, 가난한 제3세계를 모욕하고, 서구 제국주의에 충성하기 원합니다. 이런 남한 문화에서 '왼손'은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만약 위 문구에서 '전대갈'과 '왼손'이 함께 존재한다면, 경이로운 탄성은 다른 의미가 될 겁니다. 이건 '전대갈'과 '왼손'이 반드시 대립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대갈'과 '왼손'은 대립하거나 대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자는 대립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위 문구는 전대갈과 왼손이 반드시 대립한다고 직접 명시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도 남한 문화에서 전대갈과 왼손이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독자는 남한 문화를 이용해 전대갈과 왼손이 대립할지 모른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사회적인/지배적인 기호입니다. 만약 독자가 남한 언어 문화에 익숙하다면, 독자는 남한 사회에 어느 정도 익숙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독자는 남한 사회를 이용해 위 문구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남한 사회를 이용해' 해석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 독자는 텍스트 그 자체보다 다른 것(남한 사회)을 이용합니다. 전대갈과 왼손이 남한 사회, 남한 문화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전대갈'과 '왼손'은 남한 사회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래서 독자는 남한 사회를 이용해 해석합니다. 이렇게 독자가 텍스트를 해석할 때, 텍스트 외부에서 독자는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텍스트 안으로 들어가기 원한다고 해도, 독자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좋든 싫든, 텍스트 외부에서 독자는 텍스트를 해석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텍스트는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남한 문화에서 왼손이 의미심장한 단어가 되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텍스트는 나타납니다. 어떤 풍자 짤방에서 박근혜가 "야, 이 씹새끼야, 너는 책장을 왼쪽으로 넘기지?"라고 묻는 것처럼, 현실(남한 사회)은 왼쪽이 특정한 상징이라고 간주합니다. 남한 사람들과 달리,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왼손은 사악한 빨갱이가 되지 않을 겁니다.
독자가 해석할 때, 이렇게 독자는 어디에서 텍스트가 비롯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아르켈론과 길냥이는 다릅니다. 다행히(?) 아르켈론과 전대갈은 다릅니다. 그래서 아르켈론이 무엇인가요? 독자는 어디에서 아르켈론이 비롯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독자에게는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한) 백과 사전 지식이 필요합니다. 독자는 '문자 그대로' 백과 사전을 뒤적입니다. 백과 사전에는 아르켈론이 있습니다. 아르켈론은 선사 시대 대형 바다 거북입니다. 아하, 독자는 무릎을 탁~ 칠 겁니다. 아르켈론이 선사 시대 대형 바다 거북이기 때문에, 아르켈론은 일상 용어가 아닙니다. 고생물학 덕후들에게 아르켈론은 일상 용어인지 모르나,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아르켈론은 비일상적인 용어이고, 해석하기는 까다롭습니다.
아르켈론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우와!"라고 경이롭게 감탄했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 위 문구에서 아르켈론이 선사 시대 대형 바다 거북인가요? 어쩌면 아르켈론은 그리스 얼짱 남자 이름인지 모릅니다. 독자는 위 문구에서 아르켈론이 고대 바다 거북이거나 그리스 얼짱 남자라고 단정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그저 아르켈론이 고대 바다 거북이거나 그리스 얼짱 남자라고 추정할 뿐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맥락을 파악하고 아르켈론이 고대 바다 거북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랫집 수진이 경이롭게 감탄했기 때문에, 독자는 아르켈론이 일상 용어보다 비일상적인 용어라고 해석합니다.
이건 또 다른 문제가 됩니다. 백과 사전 지식은 이미 아르켈론이 멸종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애석하게도 21세기 초반 우리는 살아있는 아르켈론을 구경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아랫집 수진이 멸종 동물 아르켈론을 (왼손을 뻗고) 가리킬 수 있나요? 어쩌면 아랫집 수진은 고생물학 서적을 읽는 중인지 모릅니다. 아니면 자연사 박물관에서 아랫집 수진은 아르켈론 화석을 구경하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아랫집 수진은 비디오 게임 <압주>를 플레이하는 중인지 모릅니다. 아니면 아랫집 수진은 SF 소설 등장인물인지 모릅니다. SF 소설 속에서 아랫집 수진은 선사 시대를 향해 시간 여행을 떠났는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대형 바다 거북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게 단어 '아르켈론'이라면?]
아니면 이 소설은 시간 여행 소설보다 바이오펑크 소설이나 테라포밍 소설인지 모릅니다. 만약 SF 소설 속에서 개척 과학자들이 외계 행성을 개척하고, 외계 행성이 살아있는 바다 행성이 되고, 유전 공학자들이 아르켈론들을 복원하고, 바다 행성에서 그들이 아르켈론들을 풀어놓는다면, 아랫집 수진은 아르켈론을 구경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아랫집 수진은 잠수정을 타고 외계 개척 바다를 탐사하는 중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수진은 생체 잠수정을 탔는지 모릅니다. 만약 외계 행성 테라포밍과 고대 동물 복원이 가능하다면, 생체 잠수정 역시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이 SF 소설 등장인물인가요?
아니면 아랫집 수진이 <압주>를 플레이하는 중인가요? 비디오 게임 <압주>에서 아르켈론은 독특합니다. <압주>에서 아르켈론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심지어 대왕 오징어, 혹등고래, 엘라스모사우루스 같은 거대 해양 동물들조차 여럿이나, 아르켈론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압주>에서 아르켈론은 오직 하나뿐이고, 그래서 아르켈론은 독특합니다. 그래서 아랫집 수진은 아르켈론을 향해 감탄사를 보내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아랫집 수진이 <압주>를 플레이한다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위 문구에서 '아르켈론'을 해석하기 위한 단서들은 너무 부족합니다.
비단 위 문구만 아니라 다른 많은 간단한 문구들 역시 단서들을 별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간단한 문구에서 독자는 구체적이고 많은 단서들을 찾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르켈론'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아르켈론을 해석하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아르켈론과 길냥이는 다릅니다. 아무리 위 문구가 간단하다고 해도, 만약 위 문구에 '길냥이'가 있다면, 독자는 훨씬 쉽게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독자는 길거리에서 아랫집 수진이 길냥이를 쓰다듬고 "어머, 너는 정말 귀엽구나."라고 말한다고 연상할 수 있습니다. 길냥이가 일상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르켈론이 비일상적이기 때문에, 독자는 사이언스 픽션을 끌어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비일상적인 용어를 해석하기는 까다롭습니다. 아무리 독자가 백과 사전 지식을 갖춘다고 해도, 비일상적인 용어를 해석하기는 까다롭습니다. 문제는 SF 소설들이 비일상적인 용어들을 늘어놓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르켈론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가 사이언스 픽션을 끌어들이는 것처럼, 사이언스 픽션에는 여러 비일상적인 용어들이 있습니다. 만약 SF 소설이 신조어를 제시한다면, 심지어 독자는 백과 사전 지식조차 이용하지 못할 겁니다. 독자가 백과 사전을 뒤적인다고 해도, 독자는 생체 잠수정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찾지 못할 겁니다. 생체 잠수정을 이해하기 위해 독자는 백과 사전 지식보다 SF 장르 공식을 파악해야 합니다.
독자가 텍스트를 해석할 때, 독자는 현실(백과 사전 지식이나 SF 장르 공식)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사례처럼, 우리가 어떤 현상을 해석할 때, 우리는 현상 그 자체만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오직 현상 그 자체에만 매달린다면, 우리는 화사한 산토리니 밤하늘 아래에서 아랫집 수진과 그리스 얼짱 남자가 물고 빨고 애무하고 섹스한다고 오해할지 모릅니다. 솔직히 우리가 오직 현상 그 자체에만 매달리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현실 없이, 우리는 현상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많은 상황들에서 사람들은 오직 현상에만 매달립니다. 지배적인 관념이 현실을 외면하라고 세뇌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여자 혐오 만물 이론'은 남한 사회에서 모든 것이 여자 혐오로 이어진다고 주장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이게 너무 황당무계한 주장이 아닌가요? 만약 남한 사회에서 어떤 아재가 튀긴 돼지 고기를 달달한 소스에 찍어먹는다면, 이게 여자 혐오, 성 차별이 되나요? 어쩌면 아재는 그저 탕수육 찍먹파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아니면 아재는 길다란 돼지 고기 튀김이 남자 성기이고 달달한 소스가 여자 애액이라고 간주하는지 모릅니다. 길다란 돼지 고기 튀김이 달달한 소스를 푹~ 찍을 때, 아재는 남자 성기가 여자 음문으로 들어가고 여자 애액이 남자 성기를 적신다고 비유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아재는 탕수육을 이용해 여자들을 희롱할지 모릅니다.
이게 논리적인 해석인가요? 이런 해석이 타당한가요? 만약 여자들이 "탕수육 찍어먹기는 성 희롱이다!"라고 주장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게 미친 헛소리라고 판단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상을 파악할 때, 우리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현실은 가부장 문화입니다. 가부장 문화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좋든 싫든, 가부장 문화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엄청난 성 차별들을 조장합니다. 언제든 여자들은 성 차별, 성 폭력에 시달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피해 망상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여자에게 골목의 평범한 그림자는 성 폭력 범죄자를 의미할지 모릅니다.
여자들이 피해 망상들을 만들기 때문에, 탕수육 찍어먹기는 성 희롱이 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서 아재가 길다란 튀김을 달달한 소스에 깊게 찍는다고 해도, 가부장 문화 때문에, 탕수육 찍어먹기는 성 희롱이 됩니다. '여자 혐오 만물 이론'은 사실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노예 제도 사회에서 백인 남자가 흑인 여자에게 친절하게 대한다고 해도, 흑인 여자는 백인 남자를 의심해야 합니다. 노예 제도 사회에서 흑인 여자가 피해 망상에 걸리는 것처럼, 가부장 문화에서 여자는 피해 망상에 걸립니다. 그래서 가부장 문화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렇게 현상을 해석하기 위해 우리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문제는 탕수육 찍어먹기가 아닙니다. 아재가 튀김을 소스에 찍든, 소스를 튀김들 위에 붓든, 중요한 것은 탕수육보다 가부장 문화입니다. 가부장 문화가 피해 망상들을 조장하기 때문에, 탕수육 찍어먹기는 문제가 됩니다. 문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옆동네 철수는 랭스턴 휴즈가 쓴 단편 소설 <어떤 용기>를 읽습니다. 단편 소설 <어떤 용기>는 1930년대 경제 공황 속의 흑인들을 이야기합니다. 흑인들이 정당한 일자리를 외칠 때, 백인들은 흑인들이 빨갱이라고 매도합니다. 흑인들은 그저 일자리를 외칠 뿐이나, 백인들은 흑인들이 미국 정부의 적, 빨갱이라고 매도합니다. 깜둥이 차별은 빨갱이 차별이 됩니다.
깜둥이 차별이 빨갱이 차별로 전환하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어떤 용기>에서 깜둥이 차별과 빨갱이 차별이 비슷한 위상이라고 느낍니다. 미국 정부가 흑인들을 차별하는 것처럼, 미국 정부는 사회주의를 차별합니다. 약자로서 흑인들이 핍박을 받는 것처럼, 약자로서 사회주의는 핍박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타당한가요? 만약 전대갈이 이런 해석을 듣는다면, 전대갈은 웃기지도 않는다고 생각할 겁니다. "뭐? 빨갱이 새끼들이 약자? 어디에서 좆 같지도 않은 헛소리야! 단편 소설 <어떤 용기>는 흑인과 사회주의가 비슷하다고 직접 설명하지 않아!" 이렇게 전대갈은 옆동네 철수 해석에 반박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누구 해석이 타당한가요? 옆동네 철수 해석과 전대갈 해석 중에서 어느 쪽이 타당한가요? 랭스턴 휴즈가 누구 해석을 지지하나요? 아니, 작가로서 랭스턴 휴즈가 전대갈을 지지한다고 해도, 독자로서 철수가 작가 랭스턴 휴즈에게 반드시 동의해야 하나요? 작가와 소설이 반드시 일치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작가는 소설을 100% 통제하지 못하고, 작가와 소설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우주 만물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옆동네 철수는 현실을 참고합니다. 서구 문헌들은 가난 사상, 청빈 사상에서 공산주의가 비롯했다고 설명합니다. 비록 이게 19세기 서구 사회주의와 다르다고 해도, 가난 사상과 공산주의는 비슷한 위상입니다. 19세기 파리 코뮌 역시 가난 사상에 가깝습니다.
20세기 이후,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하고, 환경 오염들을 일으키고,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을 연이어 일으키고, 제3세계를 압박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세력들은 숱한 삽질들을 저지릅니다. 사회주의 세력들은 망가진 삽들을 이용해 태산을 쌓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가난 사상과 사회주의가 비슷하다고 간주합니다. 가난은 너무 끔찍한 단어입니다. 생명체에게 굶주림이 원초적인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얼짱 남자가 풍만한 젖가슴과 풍요로운 젖을 예찬하는 것처럼, 생명체로서 우리에게 풍족한 먹거리는 가장 중요한 사항입니다. 우리가 이상향을 언급할 때,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나 '복숭아 나무들'이 가득하고 '먹을 것이 풍족한' 마을을 말합니다.
이상향에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풍족한 먹거리입니다. 이상향에서 굶주림은 사라져야 합니다. 이상향이 풍족한 먹거리가 되는 것처럼, 생명체에게 먹거리는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래서 엄마가 아기를 낳은 이후, 엄마의 몸은 생체 식량 공장이 될 겁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은 먹지 못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굶주려야 합니다. 생명체에게 풍족한 먹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림의 '떡'은 다른 무엇보다 먹거리를 비유할 겁니다. 갈비뼈를 드러내는 굶주리는 아이들은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충족하지 못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충족하기 위해 가난한 여자들이 육체들을 팔아넘길 때, 가난한 여자들은 찢어지고 부서지는 영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난은 너무 끔찍한 단어입니다. 과거부터 오늘날까지, 사회주의는 너무 끔찍한 단어 가난을 극복하기 원했습니다. 아무리 서구 제국주의가 전쟁을 일으키고, 경제 공황을 터뜨리고, 학살을 저지르고, 난리법석을 떤다고 해도, 사회주의는 숱한 난관들을 뚫고 가난을 극복하기 원합니다. 가난, 약자, 사회주의는 비슷한 위상, 비슷한 연결 고리가 됩니다. 그래서 옆동네 철수는 단편 소설 <어떤 용기>가 '깜둥이 차별 = 빨갱이 차별'을 비유한다고 느낍니다. 옆동네 철수는 <어떤 용기>를 감동적으로 읽고 사회주의를 마음 속에 새깁니다. 전대갈은 옆동네 철수 해석에 반대하나, 전대갈은 이런 '현실 참고'에 반박하지 못할 겁니다. <어떤 용기>를 해석하기 위해 옆동네 철수가 현실을 참고하는 것처럼, SF 소설을 해석하기 위해 독자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비단 'SF'만 아니라 '소설' 역시 걸림돌이 됩니다. 소설은 글자 매체입니다. 글자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단어 '아르켈론'은 고대 바다 거북을 직접 가리키지 못합니다. 언어 문화는 단어 아르켈론과 고대 바다 거북을 임시적으로 연결합니다. 영어 'sea turtle'과 그리스어 'θαλάσσιες χελώνες'가 바다 거북을 똑같이 가리키는 것처럼, 단어와 사물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잉글랜드 얼짱 남자에게 바다 거북은 'sea turtle'이나, 그리스 얼짱 남자에게 바다 거북은 'θαλάσσιες χελώνες'입니다. 사물을 가리키기 위한 단어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아르켈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독자가 단어 아르켈론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아르켈론이 무엇인지 직접 이해하지 못합니다. 비일상적인 단어를 이해하기 위해 독자는 백과 사전 지식을 찾아야 합니다.
독자가 소설 <상흔>을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둔클레오스테우스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반면,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비디오 게임 <압주>를 플레이한다면, 게임 플레이어에게 백과 사전 지식이 없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는 아르켈론이 (고대) 대형 바다 거북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압주>는 시각적인 정보로서 아르켈론을 제시하고, 게임 플레이어는 대형 바다 거북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압주> 속의 아르켈론과 현실 속의 아르켈론 사이에 여러 커다란 차이들이 있다고 해도, 적어도 단어 아르켈론보다 컴퓨터 그래픽 아르켈론을 이해하기는 훨씬 쉽습니다. 컴퓨터 그래픽 아르켈론과 현실 속의 아르켈론 사이에 시각적인 유사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단어 아르켈론은 고대 대형 바다 거북으로 직접 이어지지 않고, 그래서 비일상적인 글자 매체를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SF 소설이 글자들을 이용해 새로운 대상을 제시한다면, 글자들과 새로운 대상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하기는 훨씬 까다로울 겁니다. 그래서 생체 잠수정을 해석하기는 까다롭습니다. 만약 SF 소설이 생체 잠수정을 제시한다면, 독자는 "아니, 이게 무슨 뜻이야? 어떻게 수중 생명체들이 합치고 잠수정이 될 수 있지?"라고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만약 SF '만화'가 시각적인 정보(그림체)로서 생체 잠수정을 제시한다면, 만화 독자는 "아하, 이게 생체 잠수정이야? 기이한 곡선들이 두드러지네. 생체 잠수정에게 생체 공학이 있나?"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만화가 시각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독자가 생체 잠수정을 쉽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독자는 SF 소설보다 SF 만화를 좋아할지 모릅니다. 만약 독자가 만화보다 소설을 읽는다면, 소설에 무슨 가치가 있나요? 여기에는 여러 대답들이 있습니다. '독자 해석 권리' 역시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글자 매체로서 SF 소설은 생체 잠수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합니다. 글자들과 생체 잠수정 사이에는 빈틈들이 있습니다. 독자는 능동적으로 해석하고 빈틈들을 채울 수 있습니다. 소설이 생체 잠수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는 생체 잠수정 형태를 직접 해석할 수 있습니다.
[SF 소설 읽기는 샌드 박스 게임에서 자유분방하게 울창한 삼림을 조성하는 행위와 비슷합니다.]
독자는 생체 잠수정이 둥글거나 길다랗거나 묵직하거나 날렵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설에 시각적인 정보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건 단점과 한계가 될지 모르나, 만약 독자가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이건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소설 독자와 달리, 만화 독자는 직접 해석하지 못합니다. 만화가 생체 잠수정 형태를 직접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SF 만화가 생체 잠수정이 날렵하다고 묘사한다면, 독자는 생체 잠수정이 반드시 날렵하다고 수용해야 합니다. 이건 해석보다 수용입니다. 만화 독자와 달리, 소설 독자는 수용하기보다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에게 적극적인 해석 권리가 있기 때문에, 어떤 SF 팬들은 만화, 연극,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보다 소설을 좋아할 겁니다.
샌드 박스 게임을 보세요. 샌드 박스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자연 생태계를 조성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고정된 경로가 없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자유분방하게 꽃들과 나무들을 심고, 꿀벌들을 흩뿌리고, 지형들을 조절하고, 유전 형질들을 조합할 수 있습니다. 반면, 여러 FPS 게임들에는 고정된 경로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게임들은 오솔길 게임이라고 불립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고정된 경로를 반드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임들은 자유분방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건 단순한 액션 게임보다 자유분방한 샌드 박스 게임이 반드시 낫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창의적인 조성을 원한다면, 게임 플레이어는 샌드 박스 게임을 좋아할 겁니다.
소설 읽기는 샌드 박스 게임 플레이와 비슷합니다. 샌드 박스 게임이 백지에서 새롭게 시작하라고 권유하기 때문에, 어떤 게임 플레이어들은 샌드 박스 게임이 너무 막막하다고 싫어합니다. 게임 플레이어가 샌드 박스 게임 플레이를 시작할 때, 게임 속의 세상은 너무 썰렁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적극적으로 게임 속의 세상을 채워야 합니다. 샌드 박스 게임처럼, 소설에서 글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소설 읽기가 너무 막막하다고 싫어할 겁니다. 특히, SF 소설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치기 때문에, SF 소설 읽기는 훨씬 막막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울창한 삼림을 스스로 조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SF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SF 소설은 아주 방대하고 울창한 삼림 같습니다.
※ 게임 <압주> 스크린샷 출처: Reuben Caldwell, https://youtu.be/LMvTc6CNC6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