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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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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영으로서 문학과 다양한 해석들, 현실 참고

OneTiger 2019. 11. 9. 21:22

어떤 소설 속에서 여자는 남자와 섹스합니다. 이건 성 폭력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와 억지로 섹스해야 합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사회적인 재생산을 맡아야 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와 억지로 섹스해야 합니다. 솔직히 이건 섹스보다 그저 성 폭력에 불과합니다. 여자는 폭력을 당하나, 여기에서 폭력은 끝나지 않습니다. 여자는 또 다른 남자와 억지로 섹스해야 합니다. 여자는 다시 임신하고, 다시 아기를 낳고, 다시 아기에게 젖을 먹입니다. 아기가 어느 정도 자란 이후, 또 다시 여자는 또 다른 남자와 섹스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성 폭력입니다.


여자는 남자와 억지로 섹스하고 억지로 아기를 낳습니다. 다시 여자는 다른 남자와 억지로 섹스하고 억지로 아기를 낳습니다. 또 다시 여자는 또 다른 남자와 억지로 섹스하고 억지로 아기를 낳습니다. 성 폭행들은 여자를 계속 할퀴고 괴롭힙니다. 만약 어떤 소설이 이런 줄거리를 연이어 늘어놓는다면, 많은 독자들은 이 소설이 가부장적인 편견에 빠졌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여자는 섹스 기계, 임신 기계, 수유 기계가 아닙니다. 여자는 생체 인큐베이터가 아닙니다. 여자의 몸은 여자 본인의 것입니다. 여자는 섹스 기계, 임신 기계, 수유 기계보다 당당한 인간, 당당한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여자는 당당한 주체가 되지 못합니다. 소설 속에서 여자는 계속 폭력들에 시달립니다. 여자는 성 폭력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소설 속에서 여자는 가장 폭력적인 우두머리 남자에게 제대로 저항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여자는 남자들을 받아들입니다. 여자는 계속 임신 기계가 됩니다. 남자가 임신과 수유를 강요한다고 해도, 심지어 여자는 남자들을 (어느 정도) 사랑합니다. 여자는 남자들을 (어느 정도) 증오하나, 한편으로 여자는 남자들을 (어느 정도) 사랑합니다. 수유 기간 동안, 우두머리 남자는 젖을 요구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순순히 젖을 먹입니다. 이건 너무 극심한 가부장적인 편견일 겁니다.


많은 독자들은 소설이 가부장적인 편견을 드러낸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여자는 당당한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여자는 성 폭력들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심지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닙니다. 여자가 주인공이고, 온갖 성 폭력들이 여자를 억압함에도, 소설은 여자 심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습니다. 여자 심리를 감추기 위해 소설 작가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배제했는지 모릅니다. 만약 소설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면, 여자 주인공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럽게 자신이 살아가는지 직접 말할 겁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여자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직접 드러내고, 독자는 여기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닙니다. 소설 주인공 여자는 화자 '나'가 되지 못합니다. 소설이 여자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묘사한다고 해도, 이건 1인칭 시점 '나'가 아닙니다. "나는 너무 커다란 슬픔을 느낀다. 내 음문은 쓰라리고 아프다. 피는 멈추지 않는다." 이 문장은 여자 내면을 직접 드러냅니다. 독자는 소설 화자 '나'를 만나고 '나'와 훨씬 밀착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여자에게 훨씬 가깝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너무 커다란 슬픔을 느낀다. 여자는 음문이 쓰라리고 아프다고 느낀다. 피는 멈추지 않는다." 이 문장은 훨씬 '객관적'입니다. 여자와 독자 사이에는 거리가 있습니다.


독자가 여자에게 가깝게 다가가기 원한다고 해도, 소설 시점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소설 시점이 1인칭이 아니기 때문에, 독자와 여자 사이에는 소설 시점이 있습니다. 여자를 만나기 위해 독자는 소설 시점을 거쳐야 합니다. 만약 소설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면, 여자가 소설 화자 '나'가 되기 때문에, 독자는 훨씬 쉽게 '나'와 만날 수 있습니다. 여자와 독자 사이에서 소설 시점은 반투명해집니다. 독자는 소설 시점을 쉽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시점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니기 때문에, 여자와 독자 사이에는 거리, 간격이 있습니다. 독자는 이런 간격을 쉽게 건너뛰지 못합니다.



심지어 소설 시점은 남자 내면을 보여줍니다. 남자가 가해자임에도, 소설 시점은 남자 내면을 보여줍니다. 왜 소설이 가해자 내면을 보여주어야 하나요? 소설이 가해자 내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가해자에게 공감할지 모릅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은 폭력이고, 폭력은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소설은 가해자 시점을 보여주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소설은 가해자 시점을 보여줍니다. 이건 소설이 가부장적인 편견에 빠졌다는 뜻입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이 가부장적인 편견에 충성한다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비판하기 위해 독자들은 다른 많은 근거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은 완전히 불쏘시개 쓰레기입니다.


그래서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은 완전히 불쏘시개 쓰레기입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못되먹은 작가입니다. 가부장적인 편견에 충성하기 위해 옥타비아 버틀러가 <야생종>을 쓰지 않았다고 해도, <야생종>은 가부장적인 편견들을 드러냅니다. 독자들은 옥타비아 버틀러를 강력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그랜드 데임? 무슨 얼어죽을 그랜드 데임입니까? 어떻게 옥타비아 버틀러가 그랜드 데임이 될 수 있나요? 어떻게 <야생종> 같은 불쏘시개 쓰레기 따위가 문학이 될 수 있나요? 페미니즘 평론가들은 <야생종>을 완전히 묻어버려야 합니다. 페미니즘 평론가들은 <야생종> 같은 쓰레기 따위를 절대 호평하지 못합니다.



독자들은 또 다른 불쏘시개 쓰레기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마가렛 앳우드가 쓴 <홍수의 해>를 보세요. <홍수의 해>에는 신의 정원사가 있습니다. 신의 정원사는 생태주의 종교 집단입니다. 문제는 신의 정원사 지도자가 남자라는 사실입니다. 왜 남자가 생태주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나요? 녹색당을 보세요. 녹색당은 여자/남자 공동 위원장을 뽑습니다. 성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녹색당은 여자 지도자에게 기회를 줍니다. 반면, <홍수의 해>에서 생태주의 종교 지도자는 남자입니다.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입니다. <홍수의 해>는 가부장적인 편견에 충성합니다. 성 해방을 위해 독자들은 마가렛 앳우드를 영원히 묻어버려야 합니다.


노라 제미신 역시 못되먹은 불쏘시개 작가입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 역시 소설 주인공 여자가 다른 남자와 억지로 섹스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설 <야생종>처럼,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서 여자가 섹스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자가 임신해야 하기 때문에, 여자는 다른 남자와 억지로 섹스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가부장적인 편견을 강조하지 않나요? 게다가 이 소설에는 3자 섹스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비주류 섹스를 왜곡하고 포르노 소재를 가공할지 모릅니다. 느와르 소설이 모방 범죄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다섯 번째 계절>은 포르노 소설에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노라 제미신은 이런 소설을 쓰지 말아야 했습니다.



만약 이렇게 독자들이 <야생종>과 <홍수의 해>와 <다섯 번째 계절>을 비판한다면, 이런 비판이 논리적인가요? 이런 비판이 옳은가요? 분명히 이제까지 저는 여러 근거들을 제시했습니다. 소설 속에는 여러 근거들이 있습니다. 독자들은 근거들을 얼마든지 찾아내고 소설들을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비판이 옳은가요? 정말 <야생종>과 <홍수의 해>와 <다섯 번째 계절>이 불쏘시개 쓰레기들인가요? 정말 옥타비아 버틀러와 마가렛 앳우드와 노라 제미신이 못되먹은 불쏘시개 작가들인가요? 이른바 페미니즘 문학들이 성 폭력, 비주류 섹스, 남자 지도자를 절대 언급해서는 안 되나요?


만약 문학이 강간이라는 단어를 연이어 늘어놓는다면, 이게 올바른 행위인가요? 어떤 독자들은 강간이라는 단어가 너무 떫은 단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단어가 떫다고 느낍니다. 제가 이 단어를 말할 때마다, 저는 떫은 감을 씹는 것 같습니다. 비록 다른 독자들이 이것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도, 문학이 강간이라는 단어를 늘어놓을 수 있나요? 가부장적인 편견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만약 페미니즘 문학이 강간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늘어놓는다면, 이게 가부장적인 편견을 부채질하지 않을까요? 페미니즘 문학은 강간이라는 단어를 절대 쓰지 말아야 합니다. 이게 옳은 해석인가요?



비디오 게임 <알파 센타우리>에서 생태주의 지도자는 여자입니다. 디드리 스카이는 자연 생태계를 보호하고 야생 동물들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 계승작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생태주의 지도자 비비안 가디니어는 자연 생태계를 보호합니다. 비디오 게임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여러 여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여자 지도자들은 조화 친화도를 선택하고 자연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카비타 타쿠르가 조화와 공존을 추구하기 때문에, 카비타 타쿠르는 조화 친화도와 잘 어울립니다. <홍수의 해>와 달리, <문명: 비욘드 어스>는 여자 지도자를 보여줍니다.


후속작 <스타십> 역시 여자 지도자를 보여줍니다. 카비타 타쿠르는 조화 친화도를 선택하고 조화 함대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홍수의 해>에서 생태주의 지도자는 남자이나, <스타십>에서 생태주의 지도자는 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홍수의 해>보다 <문명: 비욘드 어스>와 <스타십>이 훨씬 나은가요? <홍수의 해>보다 <알파 센타우리>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가 훨씬 나은가요? 성 해방 운동가들이 <홍수의 해>보다 <알파 센타우리>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와 <문명: 비욘드 어스>를 좋아해야 하나요? 만약 게임 속에서 여자가 지도자가 된다면, 이게 성 해방 운동으로 반드시 이어지나요?



만약 소설, 만화, 영화, 게임 속에서 여자가 지도자가 된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이것을 해석할 수 있나요? 만약 많은 창작물들 속에서 지도적인 여자 등장인물들이 늘어난다면, 이건 반가운 현상일 겁니다. 하지만 이게 장땡인가요? 오히려 어떤 독자들은 소설 속의 여자 지도자를 가리키고 가부장적인 편견을 미화할지 모릅니다. "이것 봐. 소설 속에서 여자는 지도자를 맡았어. 여자들은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어. 그래서 여자들은 찌질거리지 말아야 해." 이렇게 어떤 독자들은 여자 지도자를 이용해 성 차별을 비판하고, 어떤 독자들은 성 차별을 옹호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작가가 소설을 써야 하나요?


많은 평론가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인정합니다. 사람들은 창작물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야생종>과 <홍수의 해>와 <다섯 번째 계절>이 가부장적인 편견을 드러낸다고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불쏘시개 운운은 너무 심한 인신 공격이나, 분명히 독자는 <야생종>이 가부장적인 편견을 드러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문학 평론가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인정한다면, 이런 해석(소설 <야생종>은 가부장적이다) 역시 인정을 받아야 할 겁니다. 왜 소설 같은 창작물들이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나요? 왜 오직 하나의 해석만 정답이 되지 못하나요? 어떻게 다양한 해석들이 공존할 수 있나요?


문학은 인생을 반영합니다. 다른 많은 텍스트들 역시 인생을 반영하나, 특히, 문학은 인생을 훨씬 많이 반영합니다. 작가는 인생을 바라보고, 인생을 어느 정도 가공하고, 문학을 만듭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지적한 것처럼, 인생에는 목적, 정답, 용도가 없습니다. 우리는 내던져졌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너무 많은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유전 형질을 퍼뜨리기 위해 우리가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유전 형질을 퍼뜨릴 수 있나요? 여기에 정답이 있나요?



인생에는 목적, 정답, 용도가 없습니다. 문학은 인생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문학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문학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독자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이건 모든 해석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해석들은 과잉 해석들입니다. 어떤 해석들은 작가 의도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어떤 해석들은 너무 욕심을 부립니다. 모든 해석은 반드시 옳지 않습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어떤 평론가들이나 독자들은 문학을 왜곡하거나 과잉 해석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독자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문학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문학은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21세기 초반 독자는 17세기 문학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 정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21세기 초반 독자는 17세기 문학을 이용해 20세기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에서 저는 여러 창작물들을 해석하나, 제 해석은 반드시 옳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다른 논리적인 근거들을 이용해 제 해석에 반박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이런 해석들은 옳습니다. 문학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어슐라 르 귄은 문학이 비유라고 말했을 겁니다. 비단 어슐라 르 귄만 아니라 많은 평론가들은 문학이 비유라고 말합니다. 비유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비유는 설명이 아닙니다.



비유는 대상을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약 독자가 오직 문학만 이용해 뭔가를 말한다면, 여기에는 커다란 공백이 있을 겁니다. 커다란 공백은 커다란 오류로 이어질 겁니다. 독자가 소설 <야생종>을 비판한다고 해도, 독자는 오직 문학만 이용하지 못합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작가는 인생을 바라보고, 인생을 어느 정도 가공하고, 문학을 만듭니다. 문학보다 현실은 훨씬 거대합니다. 그래서 독자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만약 독자가 현실을 참고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아주 커다란 공백, 아주 커다란 오류에 빠질 겁니다. 독자는 <야생종>이 가부장적이라고 단정하고 커다란 오류에 빠질 겁니다.


독자는 <홍수의 해>보다 <알파 센타우리>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와 <문명: 비욘드 어스>가 낫다고 오류에 빠질 겁니다. 독자는 저급한 포르노 소설들이 <다섯 번째 계절>을 모방하고 여자들을 억압한다고 오류에 빠질 겁니다. 독자는 이런 오류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독자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현실'이 무엇을 가리키나요? '현실'은 많은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 역시 현실입니다. 특히, 자본주의 착취에서 여러 차별들은 비롯합니다. 이건 모든 차별이 자본주의 착취에서 비롯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착취는 여러 차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자유 무역 협정 때문에, 가난한 여자들은 불법 이주 노동자가 됩니다. 불법 이주 노동자는 극심한 성 폭행들에 시달립니다.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여자는 성 폭행들에 시달려야 합니다. 만약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런 성 폭행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자본주의는 사라져야 합니다. 이렇게 독자는 현실을 참고하고 문학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학이 현실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독자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비단 문학만 아니라 다른 텍스트들 역시 마찬가지이나, 문학이 반영, 거울, 비유이기 때문에, 문학 독자는 현실을 바라봐야 할 겁니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오직 텍스트 그 자체에만 매달립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독자가 오직 텍스트에만 매달리기 원한다고 해도, 솔직히 이건 불가능합니다. 좋든 싫든, 현실 속에서 독자는 존재합니다. 현실 속에서 독자가 존재함에도, 많은 독자들은 현실을 열심히 외면합니다. 독자들은 텍스트가 모든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독자는 텍스트 그 자체보다 "어디에서 텍스트가 비롯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만약 독자가 문학을 가볍게 즐기기 원한다면, 독자는 이것을 묻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독자가 이것을 묻지 않는다면, 독자가 문학에 좀 더 깊이 들어갈 때, 독자는 오류에 빠질지 모릅니다. 문학 외부에서 독자는 문학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많은 독자들은 평론가가 줄거리를 요약하고, 무엇이 재미있고 재미없는지 찾고, 간단하거나 기발한 의견을 덧붙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간단한 감상문과 평론은 다릅니다. 만약 이런 간단한 감상문이 평론이라면, 무엇이든 평론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소설 <울프 와일더>를 읽었다. 어떤 소녀는 늑대들을 돌보고 야생으로 돌려보낸다. 나 원, 어떻게 여자애가 늑대들을 야생으로 돌려보낼 수 있지? 솔직히 <울프 와일더>는 별로 재미있지 않다. 다른 독자들은 이것을 읽지 말아야 한다. 아, 시대 배경이 20세기 초반 러시아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블라디미르 레닌을 살짝 언급한다. 씨발 빨갱이 독재자 새끼."


이게 평론인가요? 많은 독자들은 이게 평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관객들, 게임 플레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주관적인 의견 피력이 평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론가가 그저 어려운 철학 용어들을 주절거릴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평론가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주관적인 의견을 피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론가는 "이 소설은 재미있다. 독자 여러분, 이 소설을 반드시 읽으시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평론은 "어디에서 텍스트가 비롯하는가?"라고 묻습니다. 특히, 근본적인 평론은 "어디에서 문학을 비롯해 예술 사조들이 나타나는가?"라고 묻습니다.



자, 이렇게 저는 <야생종>과 <홍수의 해>와 <다섯 번째 계절>과 <알파 센타우리>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와 <문명: 비욘드 어스>를 이야기했습니다. 이것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야생종>과 <홍수의 해>와 <다섯 번째 계절>은 SF 소설들이고, <알파 센타우리>와 <판도라: 퍼스트 콘택트>와 <문명: 비욘드 어스>는 SF 게임들입니다. 저는 SF 소설들과 SF 게임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이 게시글이 SF 평론이나 SF 감상문이 될 수 있나요? 제가 SF 소설들과 SF 게임들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게시글이 SF 감상문이 자동적으로 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 게시글에는 SF 요소들이 거의 없습니다.


<홍수의 해>에는 유전자 조작 동물이 있으나, 이 게시글은 유전자 조작 동물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문명: 비욘드 어스>에는 생체 잠수함(?)이 있으나, 이 게시글은 생체 잠수함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게시글은 (외계) 자연 생태계를 아주 살짝 언급했으나, 이런 언급이 사라진다고 해도, 이 게시글은 아무렇지 않게 주제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이 게시글은 오직 성 차별들과 문학 해석만 이야기했습니다. 주류 문학 평론가들 역시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제가 SF 소설들, SF 게임들을 떠든다고 해도, 이 게시글은 SF 평론, SF 감상문이 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 게시글은 간단한 SF 덕질조차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평론은 어떤가요? 흔히 사람들은 여자를 자연에 비유합니다. 자연이 생명체들을 낳고 먹이고, 여자 역시 생명체를 낳고 먹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야생종>에서 주인공은 여자 동물 변신술사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여자이고, 동시에 소설 주인공은 동물 변신술사입니다. 소설 주인공이 동물들로 변신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여자들보다 소설 주인공은 자연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래서 여자 동물 변신술사에게는 생명 현상을 추구하기 위한 욕구가 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여자 동물 변신술사는 여러 남자들과 동시 섹스를 즐기기 원하거나 여러 아기들에게 젖을 먹이기 원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분위기가 억압적이지 않다면, 여자 동물 변신술사는 이것을 즐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독자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평범한 인간 독자는 여자 동물 변신술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옥타비아 버틀러조차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아무리 천재적인 SF 작가로서 옥타비아 버틀러가 1인칭 주인공 시점을 비롯해 온갖 문학적인 장치들을 동원한다고 해도, 어떻게 평범한 인간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여자 동물 변신술사의 내면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나요? 만약 여자 동물 변신술사가 여러 남자들과 동시 섹스를 즐긴다고 해도, 이건 SF 설정, 초인 설정에 속하는지 모릅니다.



여자 동물 변신술사처럼,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펼칠 수 있습니다.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섹스를 비롯해 임신, 출산, 수유, 육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비일상적인 수유가 가부장적인 편견을 강조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SF 작가는 이게 그저 과학적 상상력에 불과하다고 반박할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소설 <이중 도시>가 유럽 기독교와 아라비아 이슬람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나, 차이나 미에빌은 오직 이런 해석만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중 도시>는 유럽과 이슬람 이외에 다른 많은 것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사변 문학이 총체적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사변 문학이 총체적이라면, 비일상적인 섹스 역시 가부장적인 편견을 반드시 강조하지 않을 겁니다. 생체 개조 사회에서 엄마와 아들이 섹스하든, 장거리 세대 우주선에서 여러 여자들과 여러 남자들이 집단 섹스하든,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복제 인간과 섹스하든, 똑똑한 개조 동물과 인간이 섹스하든, 이런 것들은 성 차별을 반드시 강조하지 않습니다. 특히, 주류 문학과 달리, 현실 속에는 SF 설정이 없습니다. 현실 속에는 똑똑한 개조 동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SF 독자는 오직 SF 설정에만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SF 독자가 오직 똑똑한 개조 동물에만 매달린다면, 독자는 커다란 오류에 빠질 겁니다.



자, 이런 평론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건 SF 평론이 될 수 있습니다. 평론가가 SF 소설을 평가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서 이것은 SF 평론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비단 사이언스 픽션만 아니라 중세 유럽 판타지에도 여자 동물 변신술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는 왜 <야생종>의 동물 변신술사가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속하는지 밝혀야 합니다. SF 평론가는 무엇이 SF 요소인지 찾아야 합니다. 무엇이 SF 요소인지 찾기 위해 SF 평론가는 어떻게 사이언스 픽션이 나타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좀 더 확실히 사이언스 픽션을 규정하기 위해 SF 평론가는 여러 창작물들을 비교하고 대조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문학 평론보다 기호학, 해석학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SF 평론은 평론보다 기호학, 해석학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가 평론보다 기호학, 해석학에 치우친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근본적인 SF 평론은 기호학, 해석학에 기울어져야 하는지 모릅니다. (솔직히 본론은 이겁니다. 이 게시글의 골자는 성 차별과 문학 해석보다 SF 평론 및 기호학, 해석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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