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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식물 아내>와 모스라 분류가 SF 평론이 되는가 본문

감상, 분류, 규정/다른 세계와 여러 관점들

<식물 아내>와 모스라 분류가 SF 평론이 되는가

OneTiger 2019. 11. 17. 21:54

[모성적인 모스라는 자연의 수호자이고, <식물 아내>에도 자연과 모성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이 타당한가요?]

 

 

"그날 밤, 나는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키스를 생각하며 잠들었다. 키스가 어떤 느낌일까? 잠자리에 들 시간에 엄마나 아빠가 해주는 입맞춤과 다르다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마 같은 개과 동물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짐승인 늑대와 휘핏의 경우처럼 말이다. 그 둘을 같은 범주에 넣는 것은 오직 과학뿐이다."

 

 

소설 <플립>에서 이렇게 줄리아나 베이커는 키스와 입맞춤을 분류합니다. 형식적으로 키스와 입맞춤은 비슷합니다. 만약 인간이 입술을 이용해 다른 인간에게 접촉한다면, 이건 키스와 입맞춤이 될 겁니다. 키스와 입맞춤 사이에는 형식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키스와 입맞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만약 엄마가 딸에게 입을 맞춘다면, 딸은 그저 친숙한 감정만 느낄 겁니다. 하지만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에게 입을 맞춘다면, 여자 친구 심장은 하늘을 향해 높이 솟구칠지 모릅니다. 심장이 쿵쾅쿵쾅거리기 때문에, 여자 친구는 잠을 청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렇게 키스와 입맞춤 사이에 형식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해도, 키스와 입맞춤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키스에게 아주 커다란 의미를 부여합니다. 문제는 키스와 입맞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로맨스 장르에서 주연 등장인물들은 '우연히' 입을 맞추거나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곤 합니다. 로맨스 장르에서 이런 우연들은 공식에 가깝습니다. 만화 <파르페틱>에서 주연 소녀와 주연 소년이 '우연히' 입을 맞추는 것처럼, 로맨스 장르에는 우연한 입맞춤들이 있습니다. 이런 우연한 입맞춤이 두근거리는 키스인가요, 아니면 그저 민망한 접촉에 불과한가요?

 

 

만약 소녀가 소년을 좋아하고, 소년 역시 소녀를 동경한다면, 이런 우연한 입맞춤은 키스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좋아하는 소녀와 소년이 입을 맞추기 때문에, 이건 키스가 얼마든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이게 키스가 아니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미, 미안해. 이건 그저 실수일 뿐이야. 나에게는 아무 뜻이 없어." 만약 소녀가 빨개진 얼굴로 사과한다면, 이 우연한 입맞춤은 키스가 되지 못할 겁니다. 소녀는 우연한 입맞춤이 감미롭고 두근거린다고 느끼나, 소녀는 자신이 소년을 좋아한다고 인정하기 원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소녀는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원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녀는 소년에게 사과하고 이게 키스가 아니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소녀는 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사과할지 모릅니다. 소년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소년은 심쿵심쿵한 키스가 우연한 실수였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분류는 반대가 될지 모릅니다. 소녀는 입술을 이용한 보드랍고 감미로운 접촉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지 않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소년은 우연한 입맞춤이 두근거리고 심쿵심쿵한 키스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건 첫키스일지 모르고, 평생 동안 소년은 이 순간을 잊지 못할지 모릅니다. 활기찬 말괄량이 줄리아나 베이커는 입맞춤과 키스가 다르다고 구분하나, 예상과 달리, 이것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계통 분류학이 늑대와 휘핏을 분류하는 것처럼, 분류는 통념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야성적인 늑대와 온순한 휘핏이 똑같은 울타리(개과 동물)에 들어가기 때문에, 줄리아나 베이커는 계통 분류학이 이상하다고 느낍니다. 줄리아나 베이커가 과학이 이상하다고 투덜거리는 것처럼, 분류가 통념을 뛰어넘을 때, 사람들은 분류가 이상하다고 느낄 겁니다. "아니, 잠깐. 이것과 저것이 비슷할 수 있나? 이게 오류가 아니야?" 이렇게 사람들은 분류를 의심할 겁니다. 줄리아나 베이커가 야성적인 늑대와 온순한 휘핏이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계통 분류학을 의심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분류를 의심할 겁니다. 소녀와 소년이 우연히 입을 맞춘다고 해도, 소녀는 이게 키스가 아니라고 의심할지 모릅니다.

 

소녀와 소년이 우연히 입을 맞춘다고 해도, 소년은 이게 그저 실수에 불과하다고 의심할지 모릅니다. 신체적인 접촉 그 자체는 존재하나, 사람들은 여기에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건 분류가 됩니다. 로맨스 만화 속에서 소녀와 소년은 우연한 입맞춤이 그저 실수에 불과하다고 분류할지 모르나, 만화 독자들은 이 사건 덕분에 소녀와 소년이 연인 관계로 승화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만화 독자들은 이게 키스에 가깝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만화 독자들은 로맨스 만화가 키스 장면을 이용해 성 폭력 분위기를 조장한다고 느끼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이런 성 폭력 비판 역시 분류가 될 수 있습니다.

 

 

입맞춤과 키스처럼, 늑대와 휘핏은 분류가 됩니다. 생명 진화 역사 그 자체는 존재하고, 늑대와 휘핏 그 자체는 존재하나, 계통 분류학자는 늑대와 휘핏이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간다고 분류하고, 줄리아나는 반대합니다. 그 자체로서 어떤 현상이 존재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하고, 다양하게 분류하고,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비단 키스와 입맞춤, 늑대와 휘핏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 초반 (이른바) 문명인들은 인간과 보노보와 오랑우탄이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문명인들은 이런 분류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과 보노보와 오랑우탄은 똑같은 울타리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서구 사람들에게 이건 신성 모독과 비슷했습니다.

 

"말도 안 돼! 신께서는 만물의 주인으로서 우리를 창조하셨어! 아담은 세상 만물들에게 이름들을 붙였어!" 이렇게 19세기 서구 사람들은 인간이 오랑우탄을 지배한다고 반박할 겁니다. 그래서 진화 생물학 지지자들은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 자체로서 인간과 보노보와 오랑우탄이 존재한다고 해도, 진화 생물학자는 세 가지들을 똑같은 울타리에 집어넣을 수 있고, 19세기 서구 교회는 이성적인 인간이 오랑우탄을 지배한다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반대 상황 역시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과 보노보와 오랑우탄이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간다고 믿습니다. 이런 믿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인간과 보노보와 오랑우탄이 완전히 똑같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오랑우탄은 노트북 컴퓨터를 이용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노트북 컴퓨터를 이용해 블로그를 운영하고, 생태적인 상상력들을 덕질하고,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숲 속의 드루이드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오랑우탄은 생태적인 상상력들을 덕질하지 못합니다. 오랑우탄에게 덕후 성향과 생태적인 상상력이 있다고 해도, 오랑우탄은 어떻게 폐쇄 인공 생태계가 순환할 수 있는지 연구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우주선이 인공 태양을 만들고, 인공 태양이 에너지를 공급하고, 식물 생산자들이 영양분을 만들고, 버섯 분해자들이 폐기물들을 처리하는지 탐구할 수 있습니다. 오랑우탄에게 이건 불가능한 탐구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오랑우탄은 다릅니다.

 

이건 오랑우탄보다 인간이 반드시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건 그저 차이를 지적할 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지적이 생물종 차별이라고 반박할 겁니다. "뭐야? 인간과 오랑우탄은 다르지 않아! 인간과 오랑우탄은 똑같아! 인간은 그저 동물에 불과해!" 네, 인간은 동물입니다. 분명히 인간은 동물입니다. 인간은 별로 고상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이 성적으로 흥분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장면이 '발정난 짐승'과 비슷하다고 비유합니다. '발정난 짐승'은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이건 정말 생물종 차별입니다. 왜 우리가 성적 흥분이 저속하다고 비하해야 하나요? 왜 성적 흥분과 섹스가 나쁜가요?

 

 

인간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나요? 사랑이 선택인가요?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선택이라고 단정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은 사랑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로맨스 만화에서 소녀는 소년과 사랑에 빠집니다. 소녀가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소녀는 소년을 선택합니다. 만약 소녀가 마음대로, 아무렇지 않게, 계산적으로, 냉철하게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면, 많은 문학들은 사랑을 찬미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사랑에는 여러 유형들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여러 유형들 중에서 특정한 사랑을 추구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계산적인 선택과 특정한 사랑 추구는 다를 겁니다. 소설 <플립>에서 줄리아나가 브라이스를 만나는 순간, 소녀가 소년과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사랑은 선택이 아닐 겁니다.

 

섹스 역시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는 '몸'을 떠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성적 흥분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게 구속인가요? 우리가 성적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게 감옥인가요?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섹스 덕분에, 동물들은 후손들을 낳고, 생물 다양성은 번성합니다. 생태학 덕후들은 '발정난 짐승'을 찬미해야 합니다. 분명히 인간은 짐승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적인' 짐승입니다. 자본가 계급은 산업 공장들을 늘리고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오랑우탄들은 자본주의 산업 공장들을 늘리지 못하나, 자본가 계급은 산업 공장들을 늘립니다. 오랑우탄들은 자본주의가 옳다고 맹목적으로 믿지 못합니다.

 

 

오랑우탄과 달리, 지배적인 관념은 무분별한 자원 착취가 옳다고 맹목적으로 믿습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식민지들을 수탈하고,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양민들을 학살하고, 핵 폐기물들을 버리고,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고, 행성급 환경 오염을 저지른다고 해도, 지배적인 관념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옳다고 광신적으로 믿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대숙청을 저질렀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은 소비에트 연방이 독재 국가라고 길길이 날뜁니다. 하지만 서구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한다고 해도, 지배적인 관념은 식민지 수탈을 열심히 미화하고 왜곡합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호수를 오염시켰기 때문에, 지배적인 관념은 길길이 날뜁니다.

 

하지만 서구 자본주의가 백화 현상을 일으킨다고 해도, 지배적인 관념은 "지구는 아파요."라고 그저 감정적으로 나불거릴 뿐입니다. 이게 정말 웃기지 않나요? 지배적인 관념은 상대적으로 작은 환경 오염을 향해 게거품을 물고 날뜁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정말 심각한 환경 오염을 간과합니다. 오랑우탄에게는 자본주의가 없습니다. 오랑우탄은 행성급 환경 오염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랑우탄이 자본주의 오염을 미화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인간과 오랑우탄은 다릅니다. 분명히 인간과 오랑우탄은 다릅니다. 이건 생물종 차별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사성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줄리아나 베이커는 오직 과학만 야성적인 늑대와 온순한 휘핏을 똑같은 울타리에 집어넣는다고 생각하나, 지배적인 관념이 자본주의와 환경 오염을 연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계통 분류학 이외에 온갖 기이한 분류들이 있습니다. 식품 매장 야채 코너에는 버섯들이 있습니다. 야채 코너에서 사람들은 버섯들을 아무렇지 않게 구경합니다. 계통 분류학자는 버섯이 식물보다 균류에 속한다고 외칠 겁니다. 버섯이 식물보다 균류에 속함에도, 어떻게 야채 코너가 버섯들을 전시할 수 있나요? 이건 엉터리 분류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야채 코너에서 사람들은 계통 분류학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저녁 반찬을 고민할 뿐입니다.

 

"자기야~, 오늘 저녁에 버섯 전골이 어때? 물론 자기는 오직 버섯만 먹기 원하지 않겠지?" 야채 코너에서 이렇게 신혼 부부는 대화할 겁니다. 양송이 버섯이 식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신혼 부부에게 이건 중요하지 않을 겁니다. 과학자에게 계통 분류학은 중요한 기준이나, 야채 코너에서 신혼 부부에게 반찬거리는 훨씬 중요한 기준입니다. 비디오 게임 <식물 대 좀비>는 식물과 버섯이 한 편이라고 분류합니다. 분명히 버섯과 식물이 다름에도, <식물 대 좀비>에서 버섯은 식물 편입니다. 하지만 게임 플레이어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타이토 에콜로지>는 계통 분류학을 탐구해야 하나, <식물 대 좀비>는 타워 디펜스 게임입니다.

 

 

<식물 대 좀비>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계통 분류학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그저 최면 버섯이 좀비들을 붙잡기 원할 뿐입니다. 솔직히 <식물 대 좀비>는 비단 버섯만 아니라 엉킨 켈프 역시 식물 편이라고 분류합니다. 엉킨 켈프는 해조류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조류는 식물에 속하나, 그렇다고 해도 많은 계통 분류학자들은 조류와 식물이 다르다고 분류할 겁니다. 하지만 야채 코너가 버섯과 호박을 함께 전시하는 것처럼, <식물 대 좀비>에서 엉킨 켈프는 식물 편입니다. 버섯과 켈프와 식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세 가지는 모두 생명체입니다. 세 가지는 모두 직접 움직이지 못합니다.

 

세 가지는 모두 수직으로 성장합니다. 많은 동물들과 달리, 버섯과 켈프와 식물에게는 얼굴과 사족과 장기가 없습니다. 이런 근본적인 유사성 때문에, 사람들은 버섯과 켈프와 식물이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식물 대 좀비>에서 최면 버섯과 선인장과 엉킨 켈프는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갑니다. 식품 매장 농산 코너에는 계통 분류학자가 헛웃음을 날리고 지적할 수 있는 또 다른 오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복숭아와 사과와 귤과 포도처럼 토마토가 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복숭아와 포도와 토마토가 똑같은 과일이라면, 복숭아 나무와 포도 나무와 토마토 나무가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가나요?

 

 

계통 분류학자는 '토마토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할 겁니다. 줄리아나 베이커가 계통 분류학을 싫어한다고 해도, 줄리아나 베이커 역시 토마토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인정할 겁니다. 하지만 토마토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복숭아와 포도와 토마토가 비슷한 과일이라고 분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토마토가 과일보다 야채라고 분류하나, 여전히 다른 많은 사람들은 복숭아와 포도와 토마토가 비슷하다고 분류합니다. 심지어 국가 정부와 농산물 법률조차 여기에 개입할지 모릅니다. 비록 토마토 나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복숭아와 토마토에게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하고, 분류하고, 해석합니다.

 

사람들은 복숭아와 포도와 토마토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건 비유적인 표현이나, 어머니 자연은 복숭아와 토마토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숭아와 토마토에게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합니다. 사람들은 복숭아와 토마토를 함께 묶거나 복숭아와 토마토를 분리합니다. 사람들이 토마토를 만들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토마토를 분류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뭔가를 만든다면, 사람들은 이것을 훨씬 적극적으로 분류하고 해석할 겁니다. 이런 적극적인 분류들과 해석들은 서로 부딪힐지 모릅니다. 야채 코너에서 계통 분류학자가 버섯과 호박과 토마토를 구분하는 것처럼, 적극적인 분류들과 해석들은 서로 크게 갈등할지 모릅니다.

 

 

[엉킨 켈프는 새빨간 눈초리로 헤엄치는 좀비를 노려봅니다. 해바라기처럼, 켈프가 식물이기 때문…인가요?]

 

 

사이언스 픽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사이언스 픽션이 무엇인가요? 무엇이 SF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나요? SF 팬들은 메리 셸리가 SF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SF 팬들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SF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메리 셸리 같은 19세기 고딕 호러 작가와 <마스터 오브 오리온> 같은 20세기 스페이스 오페라 비디오 게임이 똑같이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나요? 글자 매체는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이름처럼, 비디오 게임은 '비디오'를 강조합니다. 어떻게 글자 매체 소설과 시각 매체 비디오 게임이 똑같이 사이언스 픽션이 될 수 있나요?

 

어제 11월 16일 게시글은 단편 소설 <식물 아내>와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제노블룸>이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간다고 분류했습니다. 이게 오류가 아닌가요? 어쩌면 화성에 대기가 없다는 오류보다 이런 분류는 훨씬 심각한 착각인지 모릅니다. 소설 <붉은 화성> 3부작은 행성 환경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은 대표적인 생태학 SF 작가입니다. 애니메이션 <고지라: 괴수 행성> 3부작 역시 행성 환경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양쪽 모두 행성 환경 변화가 핵심 주제입니다. 그래서 <붉은 화성> 3부작과 <괴수 행성> 3부작이 비슷한가요? <붉은 화성>은 하드 SF 소설입니다. <괴수 행성>은 거대 괴수 애니메이션입니다.

 

 

어떻게 하드 SF 소설과 거대 괴수 애니메이션이 비슷할 수 있나요? 어떻게 정교한 화성 탐사 장비와 엄마 괴수 모스라가 비슷할 수 있나요? 여러 시리즈들에서 모스라는 자연 친화적인 거대 괴수입니다. 영화 <고지라: 괴수왕> 홍보 영상에서 모나크 연구는 모스라가 '자연의 수호자'라고 설명합니다. 동시에 여러 시리즈들에서 사람들은 모스라를 숭배합니다. 모스라는 여신과 마찬가지입니다. 모스라가 자연의 수호자이기 때문에, 모스라가 여신이기 때문에, 모스라는 자연의 여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올바른 해석인가요? 모스라는 자연의 여신이고, 동시에 모스라는 엄마 거대 괴수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돌보는 것처럼, 엄마 괴수 모스라는 자연 환경을 돌봅니다. 만약 영화 관객들이 이런 감성을 느낀다면, 이게 타당한 감성인가요? 이게 가부장적인 편견이 아닌가요? 영화 관객들이 엄마, 돌봄, 모성, 헌신을 억지로 연결하지 않나요? 아니, 왜 사이언스 픽션이 자연의 여신을 떠드나요? 사이언스 픽션은 근대적이고, 신화는 전근대적입니다. 19세기 교회가 진화 생물학에 반대하는 것처럼, 근대성과 전근대성은 대립해야 합니다. 하지만 왜 사이언스 픽션이 자연의 여신을 떠드나요? <괴수 행성> 3부작에서 마이나와 미아나는 주술적입니다. 왜 사이언스 픽션이 주술을 보여주나요?

 

 

여러 시리즈들에서 모스라가 자연의 여신인 것처럼, 중세 유럽 판타지에는 자연의 여신이 있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에서 루루에가 자연의 여신인 것처럼, 자연의 여신은 자연 환경을 돌봅니다. 드루이드들은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고 자연 환경을 돌봅니다. 드루이드는 자연의 수호자입니다. 삼림 레인저들 역시 자연의 수호자입니다. 그래서 모스라와 삼림 레인저는 똑같이 자연의 수호자입니다. 어쩌면 마이나와 삼림 레인저에게는 비슷한 측면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삼림 레인저는 중세 유럽 판타지에 속합니다. 마이나는 사이언스 픽션에 속합니다. 어떻게 중세 판타지와 사이언스 픽션에게 비슷한 측면이 있을 수 있나요?

 

중세 유럽 판타지 <워해머>에는 드워프 레인저들이 있습니다. 드워프 레인저들 역시 '레인저'입니다. 드워프 레인저가 레인저이기 때문에, 드워프 레인저들이 자연의 여신 루루에를 숭배할 수 있나요? 드워프 레인저와 모스라 주술사 마이나에게 비슷한 측면(자연의 수호자)이 있나요? 드워프 레인저가 레인저에 속하기 때문에, 만약 드워프 레인저와 마이나에게 비슷한 측면이 있다면, <괴수 행성> 3부작과 <붉은 화성> 3부작이 비슷하기 때문에, 드워프 레인저와 <붉은 화성> 3부작이 비슷할 수 있나요? 하지만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어떤 레인저들은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나, 어떤 레인저들은 그저 정찰과 매복을 담당할 뿐입니다.

 

 

숲 속에서 레인저는 활을 쏩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인 삼림 레인저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사람들은 숲 속에서 레인저가 활을 쏜다고 생각합니다. 숲 속에서 로빈 후드는 활을 쏩니다. 그래서 로빈 후드가 레인저가 되나요? <던전스 앤 드래곤스> 3.5 판본 제작자들은 로빈 후드를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로빈 후드는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네버윈터 나이츠>에서 레인저 와이번은 야생 동물들을 사랑하고 자연을 경외하나, 로빈 후드는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어떤 문헌에서 메리안은 봄의 여신이 되는지 모르나, 일반적으로 로빈 후드는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숲 속에서 로빈 후드는 그저 매복할 뿐입니다.

 

로빈 후드처럼, 어떤 레인저들은 그저 정찰과 매복을 담당할 뿐입니다. 이런 레인저들은 '자연의 힘'을 떠들지 않을 겁니다. <붉은 화성>과 모스라와 드루이드 사이에는 '자연의 힘'이 있으나, 이런 레인저들에게는 자연의 힘이 없습니다. 독자가 과잉 해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식물 아내>는 자연의 힘을 이야기할 수 있고, 게임 플레이어가 과잉 해석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노블룸>은 자연의 힘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은 <붉은 화성>과 모스라와 드루이드 편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드워프 레인저들이 자연의 여신을 숭배하지 않는다면, 이런 드워프 레인저들은 마이나와 비슷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분류들이 까다로운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묻습니다. "무엇이 사이언스 픽션인가?" 만약 우리가 사이언스 픽션을 논의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을 규정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사이언스 픽션을 규정하기는 까다롭습니다. 키스와 입맞춤처럼, 늑대와 휘핏처럼, 버섯과 켈프처럼, SF 평론가는 유사성의 함정에 빠질지 모릅니다. 소녀는 얼굴을 붉히고 키스가 그저 입맞춤에 불과하다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아, 아니야. 이건 키스가 아니야. 나에게는 아무 뜻이 없어." 하지만 소녀는 마음 속으로 입맞춤이 키스라고 분류할지 모릅니다. '세상에, 키스는 정말 감미로워. 그거 아니? 너는 내 첫째 키스 상대야. 만약 너와 내가 사귄다면….'

 

소녀가 키스와 입맞춤에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메리 셸리와 <붉은 화성>과 <식물 아내>와 모스라와 <제노블룸>과 드루이드에게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건 다양한 분류들, 해석들로 이어질 겁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은 이런 해석에 반대할지 모릅니다. "뭐야? 어떻게 <붉은 화성>과 <괴수 행성>이 똑같은 행성 변화 이야기가 될 수 있나? 이건 엉터리야! 어떻게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이 생태학 SF 울타리에 똑같이 들어갈 수 있지? 이건 사이비야! 이 블로그 <SF 생태주의>는 교묘한 말장난들을 늘어놓고 관계들을 억지로 연결하는 중이야! 젠장, 이건 모두 그저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해!"

 

 

줄리아나 베이커가 계통 분류학을 의심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붉은 화성>과 <괴수 행성>을 의심할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늑대와 휘핏은 똑같은(비슷한) 계통에서 비롯했습니다. 분명히 <붉은 화성>과 <괴수 행성>에는 거시적인 행성 환경 변화가 있습니다. 분명히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은 외계 식생과 번성과 풍요로움을 노래합니다. 동시에 <붉은 화성>과 <괴수 행성>과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은 서구 근대화를 이용해 상상합니다. 만약 현실 속에서 우리가 행성 환경을 거시적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붉은 화성>과 <괴수 행성>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현실 속에서 우리가 풍요로운 생명력을 찬미하지 않았다면,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지구 환경을 대대적으로 오염시키기 때문에, <붉은 화성>과 <괴수 행성>은 행성 환경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외계를 바라보고 경외하기 때문에,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은 외계 식생을 이야기합니다. <붉은 화성>과 <괴수 행성>은 비슷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은 생태학 SF 울타리에 똑같이 들어가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늑대와 휘핏이 똑같은 계통에서 비롯한 것처럼, SF 평론가는 어디에서 무엇이 비롯하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SF 평론가는 생산 조건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분류들과 해석들은 다양할 수 있으나, SF 평론가는 생산 조건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분류들과 해석들보다 생산 조건은 훨씬 근본적입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생산 조건을 파악하지 않는다면, SF 평론은 고유한 색깔을 잃을지 모릅니다. 첫 번째 문단부터 열 번째 문단까지, 이 게시글은 사이언스 픽션을 떠들지 않았습니다. 열 한 번째 문단이 사이언스 픽션을 떠들기 전에, 첫 번째 문단부터 열 번째 문단은 키스와 입맞춤, 늑대와 휘핏, 최면 버섯과 선인장과 엉킨 켈프, 복숭아 나무와 토마토 나무를 떠들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아닙니다. 소녀가 얼굴을 붉히고, 눈물들을 글썽거리고, "왜 너처럼 눈매가 깊은 사람이 내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니?"라고 소리친다고 해도, 이런 장면과 사이언스 픽션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엉킨 켈프가 붉은 눈초리로 헤엄치는 좀비를 노려본다고 해도, 이런 장면과 사이언스 픽션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키스와 입맞춤, <붉은 화성>과 모스라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최면 버섯과 엉킨 켈프,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지만 왜 이 게시글이 키스와 입맞춤, <붉은 화성>과 모스라, 최면 버섯과 엉킨 켈프,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을 함께 이야기하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런 분류들이 기호학, 해석학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분류 방법들이 다르다고 해도, 사람들이 뭔가를 분류할 때, 이런 행위 그 자체는 기호학, 해석학에 속합니다. 기호학, 해석학은 어떻게 사람들이 의미들을 부여하는지 파악합니다. SF 장르 규정은 이런 기호학, 해석학에 속합니다. SF 장르 규정은 일반적인 문학 평론보다 기호학, 해석학에 속합니다. 그래서 SF 장르 규정은 다른 규정들과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자, 이런 문단을 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호랑이와 재규어, 표범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재규어와 표범을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재규어가 훨씬 옹골차고, 재규어 얼룩무늬들이 훨씬 복잡하다고 해도, 재규어와 표범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호랑이와 재규어 역시 많이 비슷하다. 계통 분류학자에게 호랑이, 재규어, 표범은 동일한 대형 고양이과 맹수 Panthera 생물종이 된다. 하지만 이건 유일한 분류 기준이 아니다. 만약 생태학자가 아메리카 열대 밀림 생태계를 파악한다면, 생태학자에게 재규어와 맥(타피르)은 동일한 분류가 될지 모른다." 이런 문단은 생물학, 생태학 분야에 속합니다.

 

자, 또 다른 문단을 봅시다. "많은 사람들은 사이버펑크와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사이버펑크와 디스토피아를 쉽게 구분하지 못한다. 사이버펑크가 미래 자본주의를 풍자하고, 사이버펑크가 문학 사조 운동에서 비롯했음에도, 사이버펑크와 디스토피아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디스토피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역시 많이 비슷하다. SF 팬들에게 사이버펑크와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동일한 비극적인 SF 하위 장르가 된다. 하지만 이건 유일한 분류 기준이 아니다. 만약 SF 팬들이 기술적 특이점을 파악한다면, SF 팬들에게 사이버펑크와 로봇 이야기는 동일한 분류가 될지 모른다."

 

 

위에서 적갈색 문단은 생물학, 생태학 분야에 속합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지리학 잡지가 이런 생태학 기사를 짤막하게 싣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이런 생태학 기사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 겁니다. 반면, 녹색 문단은 SF 평론에 속합니다. 녹색 문단은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은 비극적인 SF 하위 장르들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건 SF 평론에 속합니다. 만약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이런 평론을 싣는다면, 독자들은 이게 다소 이상하다고 여길 겁니다. 이런 SF 평론은 지리학 잡지보다 SF 컨벤션에 훨씬 어울립니다. 지리 생태학 기사와 사이버펑크 평론은 다릅니다. 두 가지는 달라야 합니다. 두 가지는 똑같지 않습니다.

 

문제는 형식적으로 적갈색 문단녹색 문단이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적갈색 문단녹색 문단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호랑이, 재규어, 표범, 얼룩무늬,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 기술적 특이점 같은 여러 단어들을 바꾼다면, 형식적으로 적갈색 문단녹색 문단은 동일해질 겁니다. 적갈색 문단이 지리 생태학에 속하고, 녹색 문단이 사이버펑크 평론에 속한다고 해도, 구조적/형식적으로 양쪽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구조적으로 지리 생태학과 사이버펑크 평론은 똑같습니다. SF 평론가는 비단 지리 생태학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과 사이버펑크 평론이 구조적/형식적으로 똑같다고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습니다.

 

 

SF 평론가는 Ctrl+C, Ctrl+V를 이용해 사이버펑크 평론이 다른 많은 것들과 구조적/형식적으로 똑같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SF 평론가는 로코코 건축 양식을 분류하거나, 사회학 하위 학문들을 분류하거나, 마르크스주의 계보를 그리거나, 어떻게 장 미셸 바스키아와 벤 샨이 계급 투쟁을 비유하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로코코 건축 양식 분류, 사회학 하위 학문들 분류,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정당들과 집단들, 장 미셸 바스키아와 벤 샨의 표현 기법, 아메리카 열대 밀림 생태학과 사이버펑크 평론은 구조적/형식적으로 얼마든지 똑같아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상수시 궁전과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재규어는 완전히 다릅니다. 로코코 양식 건물과 미래 느와르와 고양이과 맹수가 다름에도,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까?

 

어떻게 SF 평론가가 Ctrl+C, Ctrl+V를 이용해 로코코 건축 양식 분류와 사이버펑크 평론과 아메리카 열대 밀림 생태학이 똑같다고 증명할 수 있나요? 이런 작업이 특정한 기호학들, 해석학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상수시 궁전, <블레이드 러너 2049>, Panthera onca에게 특정한 의미들을 부여하기 때문에, 상수시 궁전은 로코코 양식 건물이 되고,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사이버펑크가 되고, 재규어는 Panthera가 됩니다. 이건 모든 분류 작업이 동일한 속성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상수시 궁전과 <블레이드 러너 2049>와 Panthera onca는 다릅니다. 세 가지들이 다르기 때문에, 분류 작업은 특정한 생산 조건들에 기반합니다. 건축학자가 상수시 궁전을 파악할 때, 건축학자는 서구 근대화가 비일상적인 요소와 시대 격차에 영향을 미치는지 묻지 않습니다.

 

 

[메리 셸리와 이런 장면은 똑같은 울타리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메리 셸리에게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그래서 SF 평론가는 생산 조건을 파악하고 SF 장르 규정에 고유한 색깔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SF 평론가는 SF 그 자체보다 어떻게 사람들이 사이언스 픽션에 의미들을 부여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작업은 일반적인 문학 평론과 다릅니다. SF 평론이 키스와 입맞춤, 최면 버섯과 엉킨 켈프와 달라지기 위해 SF 평론가는 '특정한' 기호학자, 해석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화낼지 모릅니다. "아니, 이게 뭐야? 이건 문학 평론, SF 평론이 아니야. 이건 기호학, 해석학이야. 왜 SF 평론가가 문학 평론보다 기호학, 해석학을 떠들지?" 하지만 SF 평론가는 생산 조건을 파악하는 '특정한' 기호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어떻게 소설 <최후의 인간>에서 등장인물이 절절한 외로움을 느끼는지 묘사한다면, 사람들은 이게 SF 평론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어떻게 단편 소설 <차가운 방정식>이 냉철한 계산과 인간 심리를 극적으로 그리는지 분석한다면, 사람들은 이게 SF 평론이라고 간주할 겁니다. 평론가가 등장인물 심리를 통찰하고 보편적인 윤리에 호소할 때, 이건 문학 평론이 됩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이 문학 평론이라고 생각합니다. SF 평론가가 <붉은 화성>과 모스라와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에 고유하고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분석한다고 해도, 이건 문학 평론보다 기호학, 해석학이 됩니다.

 

 

하지만 <붉은 화성>과 모스라,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이 SF 평론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이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SF 평론가가 등장인물 심리를 통찰하고 보편적인 윤리에 호소하기 전에, SF 평론가는 하늘에서 사이언스 픽션이 뚝 떨어지지 않았다고 파악해야 합니다. SF 평론가는 어떻게 <붉은 화성>과 모스라가 행성 환경 변화를 이야기하고 어떻게 <식물 아내>와 <제노블룸>이 자연 환경을 과장하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 SF 평론가는 기호학, 해석학에 매달려야 합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이것에 매달리지 않는다면, 상수시 궁전과 <블레이드 러너 2049>와 Panthera onca 분류에서 고유한 색깔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분류들이 있는 것처럼, SF 장르 역시 분류입니다. (생태학 SF 장르 역시 분류입니다.) SF 평론가가 SF 소설을 평가하기 전에, SF 평론가는 무엇이 SF 소설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아무리 SF 평론가가 SF 평론 그 자체를 말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어려울지 모릅니다. SF 평론가가 기호학을 싫어한다고 해도, SF 평론가는 기호학에 매달려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SF 평론은 SF 평론 같지 않습니다. SF 평론은 SF 평론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분류들과 SF 장르를 구분하기 위해 SF 평론가는 SF 장르에 고유한 색깔, 고유한 생산 조건을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SF 평론가는 어떻게 키스와 입맞춤 분류, <붉은 화성>과 모스라 분류가 다른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2번째 문단은 근대성과 전근대성이 대립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모스라는 자연의 여신이고, 여신은 전근대적입니다. 오랜 동안 종교가 인류 문화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우리는 신화를 당장 버리지 못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에도 우리는 신화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16번째 문단이 말하는 것처럼, 모스라는 '근대적인' 자연의 여신입니다. 중세 판타지 <미들어스: 섀도우 오브 워>에는 자연의 여신 같은 카르난이 있습니다. 카르난은 악마 발록 타르-고로스와 싸웁니다. 자연의 여신으로서 모스라 역시 못된 고지라와 싸웁니다. 하지만 모스라와 카르난이 똑같이 자연의 여신이라고 해도, 카르난과 달리, 모스라는 핵 폐기물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모스라와 달리, 카르난은 핵 폐기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발록 타르-고로스는 권능에서 비롯했으나, 고지라는 광역 병기 실험에서 비롯했습니다. 그래서 모스라가 자연의 여신이라고 해도, 모스라는 '근대적인' 자연의 여신입니다. 이런 근대성이 고유한 생산 조건이기 때문에, 모스라는 카르난보다 <붉은 화성>에 가깝습니다. SF 장르에게 서구 근대화는 고유한 색깔, 고유한 생산 조건이 됩니다. SF 평론가는 SF 장르에 고유한 생산 조건, 서구 근대화를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게시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이 세상에는 온갖 분류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류들은 서로 크게 갈등할지 모릅니다. 2) SF 장르 역시 분류들에 속합니다. SF 장르 규정 역시 온갖 갈등들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3) 생산 조건 파악은 이런 온갖 갈등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합의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SF 평론가에게 생산 조건 파악은 아주 중요한 작업입니다. 어쩌면 이건 가장 중요한 작업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직 SF 장르에게만 생산 조건이 있나요? 하늘에서 SF 장르가 뚝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하늘에서 서구 근대화 역시 뚝 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SF 장르에게 생산 조건이 있는 것처럼, SF 장르에게 서구 근대화가 생산 조건이 되는 것처럼, 서구 근대화에게도 생산 조건이 있을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SF 평론가는 어디에서 서구 근대화가 튀어나왔는지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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