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팀펑크에서 '동전의 양면성', 빈곤과 진보 본문
'동전의 양면'은 어떤 현상 속에서 대조적인 두 특징이 함께 존재한다고 가리킵니다. 어떤 두 특징이 대조적이거나 적대적이라면, 두 특징은 대립하고 멀어져야 합니다. 만약 대조적인 두 특징이 어떤 현상에 필수적으로 속해야 한다면, 이건 모순 같을 테고, 사람들은 이것을 '동전의 양면'이라고 부를 겁니다. '야누스의 얼굴' 역시 비슷한 의미입니다. 야누스에게는 대조적인 두 얼굴이 있습니다. 하나는 밖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안을 가리킵니다. 밖과 안은 대조적이나, 야누스에게는 두 얼굴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동전의 양면'과 '야누스의 얼굴'은 비슷한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두 가지가 똑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전의 양면'은 모순적인 현상을 가리키고, '야누스의 얼굴'은 가식적인 성향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B 사감이 연애 편지를 들고 히히덕거리는 것처럼, 성향이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라면, 이런 성향은 '야누스의 얼굴'이 될 겁니다. 독자들은 B 사감이 '동전의 양면'보다 '야누스의 얼굴'이라고 평가할 겁니다. '동전의 양면'은 B 사감 같은 성향보다 모순적인 현상에 어울립니다. 어쩌면 스팀펑크는 '동전의 양면'을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스팀펑크에는 여러 종류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스팀펑크는 19세기~20세기 초반 서구 근대 산업 문명을 뻥튀기합니다.
19세기에서 산업 혁명, 대규모 산업 체계는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산업 혁명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분명히 19세기 서구 문명과 대규모 산업 체계는 비슷한 위상이 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대규모 산업 체계가 나타났든, 천천히 이것이 나타났든, 19세기 동안, 대규모 산업 체계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19세기 서구 사람들에게 이것은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기계가 아주 정확하고, 빠르고, 강하기 때문에, 나중에 전위적인 예술가들은 이런 기계 특징들을 찬양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19세기 사람들에게 대규모 산업 체계는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우리에게 대규모 공장 단지는 친숙합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우리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서구 근대화, 대규모 산업 체계는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자랐고, 그래서 (이른바) 21세기 초반 문명인에게 대규모 산업 체계는 아주 친숙합니다. 만약 우리가 17세기 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아무리 그 문명이 진보한 계몽주의 서구 문명이라고 해도, 우리는 충격과 공포를 느낄 겁니다. 17세기 문명에서 우리가 충격과 공포를 느끼는 것처럼, 19세기 서구 사람들에게 대규모 산업 체계는 경악이었습니다. 그들은 공장을 상상한 적이 없습니다. 18세기 전까지, 누가 공장을 상상할 수 있었나요?
아무리 뛰어난 지식인과 과감한 몽상가조차 대규모 산업 공장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아무리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신의 말씀을 적었다고 해도, 예언자 무함마드는 산업 공장에서 노동자가 메탄올에 중독되고 시각을 잃는다고 적지 않았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가족 같은 기업을 광고하는 자본가 계급이 산업 재해 노동자들을 개무시한다고 적지 않았습니다. 이런 위선적인 사례는 정말 '야누스의 얼굴'에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18세기 이전 문학들을 뒤적거린다고 해도, 우리는 자본가 계급이 야누스의 얼굴을 드러낸다는 서술을 찾지 못할 겁니다. 18세기 이후, 대규모 산업 체계는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 과정은 절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 수많은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자들은 지옥 같은 노동 과정에 직면해야 합니다. 비좁고 불결한 환경 속에서 그들은 질병에 걸리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정신병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습니다. 작업장이 부서지거나 망가진다면, 작업장 노동자들 역시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겁니다. 노동법이 허술하다면, 아동 노동자들, 여자 노동자들은 끔찍하게 착취를 당할 겁니다. 잉여 노동 시간에서 이윤이 비롯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착취 경제입니다. 자본가 계급은 임금 노동자들을 반드시 착취해야 합니다. 자본가 계급이 착취하지 않는다면,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만들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착취 경제입니다.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가 착취 경제임에도,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자본가 계급은 착취를 강화하기 원합니다. 강대국 자본가는 취약한 이주 노동자를 쉽게 착취할 수 있습니다. 남한 사회에서 동남 아시아 비정규직 여자 노동자는 성 폭행 위험에 시달려야 합니다. 인권 운동가들은 비단 인권만 아니라 착취 경제를 비판해야 합니다. 오직 인권만 부르짖는 목소리는 이주 노동자들을 돕지 못합니다. 이렇게 대규모 산업 체계에서 힘없는 노동자들은 지옥을 견뎌야 합니다. 만약 베트남 시골 처녀가 남한 대규모 공장에 들어간다면, 베트남 시골 처녀는 너무 이질적인 것들과 부딪혀야 할 겁니다.
19세기 서구 사람들에게 대규모 산업 체계는 훨씬 충격적이었고 이질적이었습니다. <공산당 선언>이 주장하는 것처럼, 19세기 이전까지, 아무도 이런 충격적이고 이질적인 변화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서구 근대화, 대규모 산업 체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나오미 클라인 서적 제목처럼, 이것들은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종교, 일상, 문화, 관습, 신념. 모든 것은 바뀌었습니다. 이건 너무 혼란스러운 '과도기'입니다. 스팀펑크는 이런 과도기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중세 유럽 판타지는 스팀펑크를 도입할 수 있고, 스팀펑크는 마법이 과학으로 넘어간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 <아누비스의 문>은 판타지 같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중세 판타지 게임 <던전 III>는 구닥다리 첨단 기계 장치를 보여줍니다.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에서 배경 무대와 설정은 중세 일본과 자연 정령들이나, <아누비스의 문>과 <던전 III>가 보여주는 것처럼, 마법과 중세는 얼마든지 스팀펑크가 되거나 스팀펑크를 도입할 수 있습니다. 관객들은 애니메이션 속의 엄청난 자연 파괴가 중세보다 근대에 가깝다고 느낄 겁니다. 소설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윌리엄 모리스가 미래 중세 사회를 묘사하는 것처럼, 흔히 중세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측면으로 이어집니다. 대규모 개발, 폭발, 파괴, 오염은 중세보다 근대와 어울립니다.
영화 <반지 원정대>를 보세요.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샤이어 및 임라드리스(리븐델)와 달리, 아이센가드는 불길들과 검은 연기들을 내뿜습니다. 샤이어와 임라드리스가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중세라면, 아이센가드는 칙칙하고 시끄러운 근대 산업화일 겁니다. 샤이어 및 임라드리스와 아이센가드가 똑같이 중세 유럽 판타지라고 해도, 양쪽은 대조적(목가적인 중세와 파괴적인 근대)입니다. 앙리 생시몽처럼, 우리는 '산업'이라는 단어를 근대에 연결합니다. 임라드리스와 아이센가드처럼, 아무리 <모노노케 히메>에서 배경 무대가 중세 일본이라고 해도, 지브리 스튜디오가 진짜 중세 일본을 의도했다고 해도, 관객들은 중세보다 근대를 느낄지 모릅니다.
[불길들과 검은 연기들, 시끄러운 작업장들과 거친 일꾼들. 이런 '중세' 풍경은 근대 산업화와 닮았습니다.]
아니면 관객들은 중세와 근대를 함께 느끼거나 중세가 근대로 넘어간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건 '과도기'입니다. 그래서 <모노노케 히메>는 스팀펑크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모노노케 히메>가 스팀펑크가 되거나 되지 않는다고 해도, 스팀펑크를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서구 근대화는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무엇보다 서구 근대화, 대규모 산업 체계,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사람들을 지옥 같은 노동으로 밀어넣기 시작합니다. 1960~70년대 남한 사회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좁고 불결한 환경에서 여자 노동자들은 질병에 걸리거나, 부상을 당하거나, 성 폭력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불결한 미싱 공장에서 어린 여자들은 폐병에 걸렸고 피를 토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남한 사회는 이런 여자 노동자들을 공순이라고 비하하고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칭송합니다. 심지어 남한 사회는 다카키 마사오를 숭배합니다. 분명히 남한 사회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습니다. 하지만 다카키 마사오가 반인반신이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린 여자 노동자들이 붉은 피를 토했기 때문에, 한강의 기적은 나타났습니다. 19세기 서구 문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은 진보가 무엇인지 보여줬습니다. 대규모 산업 자본주의가 엄청난 물량들을 쏟아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목격했고, 그들은 문명이 진보한다고 느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보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0순위 조건입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샤를 푸리에가 지적한 것처럼, 갑자기 하늘에서 진보는 뚝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서구 상류층 백인 남자들이 똑똑하기 때문에, 진보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지옥을 견뎌야 했기 때문에, 19세기 서구 문명은 진보했습니다. 비단 가혹한 노동들만 아니라 환경 오염들 역시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영국은 대규모 산업 자본주의를 대표하나, 대기 오염과 수질 오염, 도시 오염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럽이 깨끗하다고 칭송하나, 19세기 유럽에서 '진보는 환경 오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중국이 대기 오염 국가라고 욕하나, 누가 아나요. 200년이나 300년, 400년이 지난다면, 중국 역시 깨끗해질지 모릅니다. 대기 오염 국가 중국는 과거지사가 될지 모릅니다.
오늘날 유럽이 숭배를 받는 것처럼, 400년 이후, 중국은 숭배를 받을지 모릅니다. 유럽이 엄청난 환경 오염들을 일으켰음에도, 유럽이 진보했기 때문에, 우리는 유럽이 고상하고 우아하고 세련되었다고 숭배합니다. 어쩌면 400년 이후, 중국 역시 그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미 유럽이 환경 오염들을 저질렀고 진보했기 때문에, 중국 역시 그것을 추구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이 대기 오염 국가라고 욕하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중국을 욕하고 싶다면, 우리는 19세기 서구 환경 오염들을 비판해야 합니다. 19세기 서구 환경 오염들이 산업 자본주의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중국을 욕하지 못할 겁니다.
19세기 서구 문명은 진보한 문명이었고, 진보는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자본주의 반대 운동들은 진보 그 자체를 부정합니다. 국가 정부부터 첨단 과학 기술까지, 이것들이 진보이기 때문에, 어떤 자본주의 반대 운동들은 이것들을 거부합니다. 아무리 진보가 찬란하다고 해도, 진보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극심한 환경 오염들에서 진보는 비롯했고, 한편으로 19세기에서 성 해방 운동은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18세기 후반 지식인입니다. <여성의 권리 옹호>는 "남자보다 여자가 열등하다면, 여자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여자가 시기와 질투의 화신이고 여자의 적이 여자라고 말합니다.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여성의 권리 옹호>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 구조가 여자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여자는 열등한 인간, 보조적인 인간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가부장 문화이고,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는 열등한 인간, 보조적인 인간이 됩니다. 21세기 초반 수두룩한 잘나신 남정네들께서는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미 18세기 후반에 <여성의 권리 옹호>는 가부장 문화를 지적했습니다. 프랑수아 샤를 푸리에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샤를 푸리에는 성 해방을 논리적으로 파악하지 못했으나, 샤를 푸리에는 성 해방 운동이 이상적인 공동체를 뒷받침한다고 느꼈습니다. 비록 샤를 푸리에는 실패했으나, 이런 사고 방식은 상당히 선구적입니다.
21세기 초반 우리에게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샤를 푸리에는 미숙하고 어설프고 소극적인 것 같으나, 서구 근대화 동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샤를 푸리에는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샤를 푸리에가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19세기 진보가 좋은 것인가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성 차별에서 진보가 나왔다고 지적할 겁니다. 샤를 푸리에 역시 빈곤에서 진보가 나왔다고 지적할 겁니다. 허공에서 진보는 반짝 나타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굶주리기 때문에, 누군가는 진보합니다. 빈곤 없이, 진보는 없습니다. 착취 없이, 자본주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보에는 이런 '동전의 양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이런 착취를 은폐하기 원합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오직 입으로만 자유를 부르짖습니다. 어쩌면 이건 '동전의 양면'보다 '야누스의 얼굴'에 가까운지 모릅니다. 이것이 동전의 양면이든, 야누스의 얼굴이든, 스팀펑크는 이런 '동전의 양면'을 반영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스팀펑크들은 화려한 빅토리아 시대, 벨 에포크, 폰티스모를 찬양합니다. (시대가 겹치기 때문에, 셜록 홈즈 덕후들 역시 빅토리아 시대를 미화합니다.) 한편으로 또 다른 스팀펑크들은 비참한 하층민들과 극심한 환경 오염들을 이야기합니다.
빈곤에서 진보가 나타났기 때문에, 스팀펑크들 역시 '동전의 양면'을 반영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스팀펑크들은 벨 에포크를 찬양하고, 어떤 스팀펑크들은 비참한 하층민들과 극심한 환경 오염들을 이야기하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심지어 스팀펑크 작가들조차 왜 스팀펑크들이 대조적인 두 가지(벨 에포크와 대기 오염)를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만약 SF 평론가가 빈곤과 진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는다면, SF 평론가는 왜 스팀펑크들에 '동전의 양면'이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