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스톰 마스터>와 중세 판타지의 비행선 설계 본문
[게임 <스톰 마스터>의 한 장면. 아무도 이게 중세 유럽 판타지라고 쉽게 생각하지 못하겠죠.]
1991년 비디오 게임 <스톰 마스터>는 중세 판타지와 비행선 전투를 결합했습니다. 배경 설정은 중세 유럽 판타지와 비슷합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왕국을 다스리는 군주가 되고, 다른 왕국과 싸워야 합니다. 왕국들끼리 서로 싸우는 수단은 비행선입니다. 일반적인 왕국 운영은 순서 기반이나, 왕국들이 전투할 때, 게임은 실시간 액션으로 바뀝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바람에 따라 비행선을 조종해야 하고, 투석기나 노포를 이용해 상대 비행선을 물리쳐야 합니다.
게다가 게임 플레이어는 자신이 원하는 비행선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왕국을 운영할 때,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재료들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비행선을 설계합니다. 물론 그런 비행선이 훨훨 날아갈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비행선을 설계한 이후, 게임 플레이어는 실험 비행할 수 있으나, 매번 추락하는 불상사를 겪을지 모릅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여러 시행 착오들을 통해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비행선을 제작합니다. 게임을 직접 플레이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자세한 정보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대략적으로 <스톰 마스터>는 중세 유럽 판타지와 비행선이라는 스팀펑크 요소를 뒤섞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스톰 마스터>를 스팀펑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스톰 마스터>는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입니다. 이 게임은 그저 비행선을 집어넣었을 뿐입니다. 비행선은 분명히 중세 판타지보다 스팀펑크에 가까운 소재이고, 비행선을 설계하는 부분 역시 중세 판타지보다 스팀펑크 같습니다. 비행선이 시험 비행하는 장면은 중세 판타지 분위기를 풍기지 않아요. (활주로 풍경은 중세 분위기와 거리가 아무 멀죠.) 게다가 주된 전투가 비행선 전투이기 때문에 비행선 설계와 비행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죠. 하지만 아무리 비행선이 스팀펑크에 가까운 소재이고, 아무리 비행선 전투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결국 <스톰 마스터>는 중세 판타지일 겁니다.
아무리 게임 제작진이 스팀펑크 요소를 가미했다고 해도, 그건 중세 판타지를 스팀펑크로 바꾸지 않습니다. 비행선 전투는 드래곤과 그리폰이 싸우는 공중전보다 훨씬 현실적일 겁니다. 비록 현실에서 이런 비행선 전투는 벌어진 적이 없으나, 우리는 비행선 전투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열기구를 날리고, 비행선을 날리고, 항공기를 날립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우리는 비행선 전투가 현실적이라고 느낍니다. 적어도 비행선 전투는 드래곤과 그리폰의 전투보다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비행선 전투가 (상대적으로) 현실적이라고 해도, 이런 요소는 <스톰 마스터>의 전반적인 장르를 바꾸지 못해요.
왜 게임 제작진이 중세 판타지에 이런 비행선 설계를 집어넣었을까요? 아니면 왜 게임 제작진이 비행선 설계를 집어넣기 위해 중세 판타지를 이용했을까요? 저는 게임 제작진이 뭐라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게임 제작진은 중세 판타지 전략 게임을 좀 더 색다르게 만들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게임 제작진이 비행선 전투를 이야기하기 원했다면, 중세 판타지가 아니라 19세기 스팀펑크를 이용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스톰 마스터>는 중세 판타지고, 게임 제작진은 이런 중세 판타지가 좀 더 독특하게 보이기 원했을지 모릅니다. 비행선 설계와 시험 비행, 공중 전투는 <스톰 마스터>가 좀 더 독특하다고 강조할 수 있겠죠.
만약 <스톰 마스터>가 비행선이 아니라 그리폰을 집어넣었다면, 어떻게 게임 분위기가 바뀌었을까요? 어쩌면 <스톰 마스터>는 좀 더 유전 공학적인 바이오펑크 분위기를 풍겼을지 모릅니다. 만약 게임 플레이어가 자신이 원하는 그리폰을 생산하고 싶다면, 그리폰을 유전적으로 설계해야 할 겁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크고 무거운 그리폰, 작고 날렵한 그리폰, 시력이 뛰어난 그리폰, 전투에 유능한 그리폰 등을 생산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런 생산 과정은 바이오펑크에 가까울 겁니다.
1990년에 출시된 <드래곤 브레스>라는 비디오 게임이 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는 드래곤 마스터가 되고, 드래곤들을 생산하고, 다른 마을들을 습격합니다. <드래곤 브레스>에서 게임 플레이어가 드래곤을 생산하는 과정은 구닥다리 바이오펑크와 비슷합니다. 생산 설비를 마련하고 각종 재료들을 조합하는 모습은 중세 판타지보다 구닥다리 바이오펑크 같아요. 저는 <드래곤 브레스>가 스팀펑크(바이오펑크) 요소를 품은 중세 판타지라고 생각합니다. <드래곤 브레스>처럼, <스톰 마스터>가 비행선이 아니라 그리폰이나 드래곤을 이용했다면, <스톰 마스터>는 바이오펑크 분위기를 풍겼을 겁니다.
게임 제작진은 그런 분위기를 배제하고 싶었을지 몰라요. 그래서 그런 분위기 없이 공중 전투를 구현하기 위해 게임 제작진은 비행선 설계를 집어넣었을지 모르죠. 이는 순전히 개인적인 추측이고, 근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중세 판타지와 비행선 설계에서 이런 논의를 뽑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논의는 완전히 틀리지 않을 겁니다. 만약 판타지 창작가가 중세 판타지와 공중 전투를 구현하고 싶다면, 이런 스팀펑크나 바이오펑크를 고려해야 할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중세 판타지에게 구닥다리 스팀펑크 설정은 아주 유용한 도구입니다. 만약 어떤 창작가가 중세 판타지 설정을 아주 좋아한다면, 그렇다고 해도 현대적이거나 미래적인 공중 전투나 해상 전투나 인공 지능 이야기를 놓치고 싶지 않다면, 스팀펑크는 유용한 도구가 될 겁니다. 누군가는 왜 구태여 미래적인 이야기를 중세 판타지에 집어넣느냐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들 역시 제국과 황제와 귀족을 아무렇지 않게 이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르 창작가가 중세 판타지와 스팀펑크를 뒤섞는다고 해도,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겠죠. 게다가 아무도 미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면, 창작가가 미래적인 관점을 과거에 투영한다고 해도, 그건 나쁘지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