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소설 <야생종>과 영화 <애니멀>의 동물 같은 초인 본문
2001년 영화 <애니멀>은 동물적인 초인을 보여줍니다. 어느 날 영화 주인공 마빈은 커다란 사고를 당하고 기이한 수술을 받습니다. 마빈은 여러 동물 장기들을 받아들이고, 이런 수술 덕분에 마빈은 동물적인 초인이 됩니다. 마빈은 강하고 빠르고 출중한 운동 신경들을 발휘합니다. 문제는 이게 부작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빈이 육감적인 여자를 볼 때, 마빈은 '동물적인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사고를 칩니다. 마빈이 예쁜 여자를 볼 때, 마빈은 동물적인 충동으로 '영역 표시'해야 합니다. 마빈은 초인 영웅이 될 수 있으나, 마빈은 절대 멋지게 폼을 잡지 못합니다.
동물적인 충동은 너무 커다란 문제를 일으킬지 모릅니다. 영화 <애니멀>은 어떻게 마빈이 좌충우돌 초능력들을 다루는지 보여줍니다. 배경 설정은 바이오펑크에 가까우나, 영화 <애니멀>은 바이오펑크보다 초능력(동물적인 충동)에 초점을 맞춥니다. 알렉산드르 벨야예프가 쓴 <물고기 인간>과 영화 <애니멀>은 서로 비슷합니다. 소설 <물고기 인간>과 영화 <애니멀>에서 양쪽 주인공은 모두 수술을 거쳤고, 동물 기관들을 받아들였고, 뛰어난 능력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소설 <물고기 인간>은 어떻게 물고기 인간이 평범한 인간과 지고지순하게 사랑하고 새로운 인간으로서 수모를 겪는지 이야기합니다.
소설 <물고기 인간>은 전형적인 바이오펑크입니다. 소설 속에는 숱한 개조 동물들이 있고, 어떤 장소는 정말 환상적인 개조 동물원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개조 동물들을 의심하고, 물고기 인간 역시 의심을 받습니다. 여러 바이오펑크 소설들 속에서 사람들이 개조 인간을 멸시하는 것처럼, 물고기 인간 역시 부정적인 시선들을 피하지 못합니다. 바이오펑크 소설로서 <물고기 인간>은 어떻게 사람들이 개조 인간을 무시하고 개조 인간이 자신을 변호하는지 보여줍니다. 이런 부분은 소설의 절정이 됩니다. 물고기 인간이 사랑을 떠나고 인간 세상을 떠나고 야생으로 들어갈 때, 소설은 애잔한 느낌을 물씬 풍깁니다.
물고기 인간이 사랑을 만날 때, 소설은 다소 손발이 오그라드는 구닥다리 묘사를 늘어놓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열심히 오그라드는 손발을 어루만질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전반적으로 <물고기 인간>은 개조 인간을 둘러싼 애절한 느낌을 풍깁니다. 영화 <애니멀>은 크게 다릅니다. 영화 포스터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 영화는 애절한 느낌이나 생체 개조를 둘러싼 논란보다 코미디에 초점을 맞춥니다. 특히, 질펀한 농담은 빠지지 않습니다. 마빈이 육감적인 여자를 볼 때, 마빈은 아랫도리를 키우고 '동물적인 충동'을 억제해야 합니다. 아랫도리는 동물적인 것입니다. 이건 인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성이고, 동물은 (성적인) 본능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생각하는 두뇌와 도구를 다루는 손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반면, 아랫도리는 동물적인 것입니다. 성적인 충동은 인간적이 것이 아니고 이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성적인 욕구를 느낄 때, 아랫도리가 찌르르 충격을 전달할 때, 사람들은 이게 동물적인 감성이라고 말합니다. 이건 인간적인 감성이 되지 못합니다. 21세기 초반 오늘날, 섹스는 개방적이고,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적인 것(합리적인 이성)과 동물적인 것(끈적거리는 섹스)을 크게 구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 <애니멀>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런 고정 관념은 끈질깁니다. 사실 19세기 우생학은 이런 '동물적인 것'을 이용해 약자들을 차별했고 착취했습니다. 19세기 지배 계급은 노동자들이 동물적이고 성욕이 너무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동물적인 노동자들에게 너무 강한 성욕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계속 머릿수를 불립니다. 머릿수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제대로 먹고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은 가난합니다. 노동자 계급이 너무 동물적이기 때문에, 너무 강한 성욕 때문에, 그들은 멍청하고 무식하고 추잡하고 가난합니다. 이렇게 지배 계급은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착취하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은 가난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이런 착취를 은폐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 계급이 동물적이라고 모욕합니다. 물론 자본가 계급 남자들은 자신들 역시 '동물적'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매춘을 너무 좋아했음에도.
이런 왜곡과 세뇌는 비단 노동자 계급만을 노리지 않았습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이른바 호텐토트 비너스를 만듭니다. 동물원이 야생 동물을 전시하는 것처럼, 서구 제국주의는 아프리카 여자를 '전시'합니다. 유럽 백인 남자들은 아프리카 여자가 '동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호텐토트 비너스에게 독특한 성적 부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구 제국주의는 호텐토트 비너스가 동물적이기 때문에 아프리카 흑인들이 동물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인간적인 유럽 문명은 동물적인 아프리카 흑인들을 착취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것처럼, 유럽 문명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착취합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동물적이고, 그래서 그들은 인간적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이렇게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은 주장했습니다. 이런 사고 방식은 여전히 지배적입니다. 이른바 인구 폭발 이론은 서구 문명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인구 폭발 이론은 제3세계를 노립니다. 인구 폭발 이론은 동물적이고 원시적인 제3세계 인민들이 인구를 조절하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구 폭발 이론은 동물적인 제3세계 인민들 때문에 환경 오염이 심해질 거라고 걱정합니다. 하지만 자연 환경을 오염시키는 주범은 제3세계 인민들이 아니라 산업 자본주의입니다. 19세기 우생학이 그런 것처럼, 인구 폭발 이론은 착취와 수탈을 은폐하고, 지배 계급에게 충성하고, 인종 차별을 저지릅니다.
근대적인 마녀 사냥은 어떤까요. 근대적인 마녀 사냥은 자신이 과학이라고 주장했고 아름다운 여자가 사악한 마술이고 동물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근대적인 마녀 사냥은 여자들이 주도권을 쥐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들을 굴복시켜야 했고, 근대적인 마녀 사냥은 이런 가부장적인 폭력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마녀 사냥은 정말 끔찍한 가부장적인 폭력이었습니다.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굴복시킬 때 언제나 끔찍한 폭력이 따르는 것처럼, 마녀 사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유분방한 성은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사악한 마술이고 동물적인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여전히 21세기 도시 사회는 자유분방한 성을 거부합니다. 언뜻 21세기 도시 사회는 개방적인 성 문화를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젊은 세대는 아무렇지 않게 화끈하게 원 나이트 스탠드를 때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관념은 자유분방한 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동성애 부부는 불법입니다. 미성년자에게는 다른 수많은 권리들을 비롯해 성교 결정 권리가 없습니다. 미성년자는 자신이 성교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청춘들은 연애하기 원하나, 무한 경쟁 때문에, 청춘들은 스펙들을 쌓느라 바쁩니다. 청춘들이 스펙 대신 연애를 선택한다면, 청춘들은 굶주릴지 모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분방한 성을 억압합니다.
19세기 지배 계급은 아랫도리가 동물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전히 인구 폭발 이론은 우생학을 버리지 않습니다. 인구 폭발 이론은 제3세계 인민들이 동물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유분방한 성을 억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을 제대로 고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자유분방한 성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아랫도리가 동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유분방한 성은 인간적인 것이 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음문과 성기는 동물적인 것이 됩니다. 하지만 남자와 달리, 여자에게는 음문 이외에 또 다른 신체 부위가 있습니다. 여자에게는 비단 음문 이외에 젖가슴이 있습니다. 젖가슴은 생각하는 두뇌 및 도구를 사용하는 손과 다릅니다.
젖가슴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두뇌와 도구를 사용하는 손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될 수 있으나, 젖가슴은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들이 젖가슴을 예찬할 때, 그들은 이성과 합리를 운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젖가슴이 생식기와 비슷한가요? 젖가슴이 '아랫도리'에 들어가나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아랫도리처럼 젖가슴은 생식과 재생산과 번성에 속합니다. 아랫도리처럼 젖가슴은 성적인 신호가 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근대적인 서구화 사회에서 젖가슴은 성적인 신호입니다. 생식기처럼, 젖가슴은 생식과 재생산과 번성과 성적인 신호를 담당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생식기와 젖가슴은 다릅니다. 생식기는 식량을 생산하지 않습니다. 젖가슴은 식량을 생산합니다. 사실 젖가슴은 가장 기초적인 식량 생산자입니다. 인간이 고기와 과일과 곡물과 다른 식량들을 먹기 전에, 인간은 젖(모유)을 먹습니다. 인류 문명에서 여자(어머니)는 최초의 식량 생산자입니다. 페미니즘 인류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여자들이 아기에게 젖꼭지를 내밀고 젖을 먹일 때, 여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원초적인 식량 생산자라고 느꼈을지 모릅니다. 소녀들은 잠재적인 어머니들이고, 소녀들 역시 자신들이 가장 원초적인 식량 생산자가 될 거라고 예상했을지 모릅니다.
21세기 오늘날, 이런 사고 방식에는 별로 가치가 없을지 모릅니다. 식량 산업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에, 모유는 (원초적이고 건강한) 식량을 가리키는 상징이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젖가슴을 바라볼 때, 여전히 우리는 원초적인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이런 원초적인 풍요로움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영화 <애니멀>은 동물 같은 초인이 '아랫도리'를 내민다고 농담하나, 원초적인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사례 역시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옥타비아 버틀러가 쓴 <야생종>에서 안얀우는 젖을 뿜을 수 있습니다.
소설 <야생종>에는 야생적이고 강렬한 분위기, 가부장 문화에 저항하는 여자, 표범 같은 야생 동물 변신 능력, 풍만한 젖이 있습니다. 영화 <애니멀>과 소설 <야생종>은 똑같이 동물적인 초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양쪽은 대조적입니다. 영화 <애니멀>은 남자가 동물이라고 남성 판타지를 부추깁니다. 반면, 소설 <야생종>은 강렬한 야생을 풍성한 생명력으로 연결합니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정말 천재 작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