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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갈매기의 꿈>을 바라보는 여러 해석들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갈매기의 꿈>을 바라보는 여러 해석들

OneTiger 2019. 9. 8. 19:53

이웃집 영희는 리처드 바크가 쓴 <갈매기의 꿈>을 좋아합니다. 소설 <갈매기의 꿈>이 소외와 차별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소설 주인공 조나단 리빙스턴은 곡예 비행사를 꿈꿉니다. 조나단은 훨씬 멀리, 훨씬 빠르게, 훨씬 다양하게 날기 원합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날씨가 맑든 흐리든, 언제나 조나단 리빙스턴은 곡예 비행 연습을 빠뜨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른 갈매기들은 조나단이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곡예 비행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갈매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먹고 사는 것입니다. 곡예 비행은 먹고 사는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갈매기가 화끈하고 아슬아슬한 코브라 기동에 성공한다고 해도, 코브라 기동은 생선 대가리를 주지 않습니다. 갈매기들에게는 화끈하고 아슬아슬한 코브라 기동보다 생선 대가리가 훨씬 소중합니다. 그래서 다른 갈매기들은 조나단을 외면하고 생선 대가리를 따릅니다. 생선 한 조각을 먹기 위해 다른 갈매기들은 난리법석을 칩니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이런 광경이 한심하다고 느낍니다. 다른 갈매기들이 오직 먹고 사는 문제에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갈매기들은 생선 대가리 너머를 전망하지 못합니다. 생선 대가리보다 인생이 훨씬 드넓은데도, 다른 갈매기들은 드넓은 인생을 전망하지 못합니다.



다른 갈매기들이 조나단을 나무랄 때, 조나단은 이의를 제기합니다. 조나단은 갈매기 인생에서 생선 대가리 이외에 다른 것들이 중요할 수 있다고 항의합니다. 하지만 다른 갈매기들은 계속 조나단을 나무라고 따돌립니다. 조나단은 왕따 갈매기가 됩니다. 아무도 조나단을 무리에 끼워주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이건 차별입니다. 이건 소외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조나단이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고 조나단 리빙스턴, 차별을 받는 등장인물에게 공감합니다. 일상에서 이웃집 영희가 심한 차별에 시달리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조나단 리빙스턴에게 깊게 공감합니다.


일상에서 이웃집 영희는 영리 기업들을 비판합니다. 영리 기업들이 막대한 온실 가스를 뿜고, 산업 폐기물들을 버리고, 야생 동물들을 멸종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영리 기업들이 기후 변화를 일으킨다고 비판합니다. 아무리 기후 변화가 행성급 환경 오염이라고 해도, 영리 기업들은 온실 가스를 뿜고 산업 폐기물들을 버립니다. 영리 기업들에게 자연 환경보다 이윤 극대화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윤 극대화가 목적이기 때문에, 지구 자연 환경이 황폐해진다고 해도, 영리 기업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영리 기업들은 사라져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영리 기업들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역시 사라져야 합니다.



이웃집 영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이웃집 영희를 따돌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웃집 영희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웃집 영희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갈매기 무리에서 조나단 리빙스턴이 떨어지는 것처럼, 남한 사회에서 이웃집 영희는 떨어집니다. 다른 갈매기들이 조나단 리빙스턴을 따돌리는 것처럼, 남한 사회는 이웃집 영희를 따돌립니다. 이웃집 영희가 자본주의 경제를 남자 경제, 가부장 경제라고 부르기 때문에, 심지어 남한 사회는 이웃집 영희를 페미 나치 씨발년이라고 욕합니다.


레프 트로츠키는 아무리 소비에트 연방이 삐뚤어졌다고 해도 서구 제국주의보다 현실 사회주의가 낫다고 말했습니다. 레프 트로츠키가 현실 사회주의를 변호하는 것처럼, 이웃집 영희는 아무리 극단적인 여자들이 폭언들을 쏟는다고 해도 가부장 문화보다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남한 사회에서 이런 사고 방식은 사회적인 생매장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이웃집 영희는 차별을 당하고 소외를 겪습니다. 그래서 이웃집 영희가 소설들을 읽는 동안, 이웃집 영희는 차별과 소외에 깊게 공감합니다.


수많은 소설들은 수많은 차별들과 소외들을 묘사합니다. 소설 <갈매기의 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차별과 소외가 있습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전반적으로 초인 소설들이 차별과 소외를 묘사한다고 평가합니다. 낸시 크레스가 쓴 <스페인의 거지들>과 영화 <엑스맨>처럼, 초인은 차별과 소외를 쉽게 상징할 수 있습니다. 초인이 특별한 능력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이것을 두려워할 겁니다. 초인이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초인을 따돌리고 차별합니다. 초인은 소외를 느껴야 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조나단 리빙스턴 역시 초인이라고 평가합니다. 조나단 리빙스턴에게 초능력(순간 이동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조나단 리빙스턴은 늙은 갈매기 치앙을 만납니다. 치앙은 곡예 비행을 넘고 순간 이동 능력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치앙과 조나단은 다른 차원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소설 <타이거! 타이거!>에서 걸리버 포일이 엄청나게 존트하는 것처럼, 치앙과 조나단은 순간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조나단 리빙스턴이 초인이라고 평가합니다. 엑스맨 같은 초인들은 태생적인 초인입니다.


조나단은 태생적인 초인이 아니나, 곡예 비행 때문에, 조나단은 쫓겨났습니다. 갈매기 무리가 조나단을 쫓아냈기 때문에, 조나단은 초능력 갈매기들과 어울릴 수 있습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갈매기의 꿈>에 소외, 차별, 이질적인 성향, 초능력이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거지들>과 <엑스맨>처럼, <갈매기의 꿈>은 초인을 이야기하고 소외와 차별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정말 <갈매기의 꿈>이 초인 소설이 될 수 있나요? 아랫집 수진은 뒷동네 말자 할머니에게 반박합니다. 분명히 소설 속에서 치앙과 조나단과 다른 갈매기들은 초능력들을 발휘합니다. 치앙과 조나단과 초능력 갈매기들은 소외를 겪습니다. <갈매기의 꿈>에는 초능력과 소외가 있습니다.



초능력과 소외 때문에, <갈매기의 꿈>이 초인 소설이 되나요? 낸시 크레스는 자신이 초인 소설을 쓴다고 의식했을 겁니다. 낸시 크레스는 SF 공식들을 파악합니다. 반면, 리처드 바크는 SF 공식들을 의식하지 않았을 겁니다. 리처드 바크는 SF 소설을 쓰기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작가가 SF 소설을 쓰기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매기의 꿈>은 초인 소설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갈매기의 꿈>에 초능력과 소외가 나온다고 해도, <갈매기의 꿈>은 <스페인의 거지들> 및 <엑스맨>과 다릅니다. 아랫집 수진은 <갈매기의 꿈>이 전형적인 SF 소설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갈매기의 꿈>과 <스페인의 거지들>과 <엑스맨>에 초능력과 소외가 있다고 평가하나, 아랫집 수진은 말자 할머니에게 반박합니다. <스페인의 거지들>과 <엑스맨>은 SF 장르를 의식하나, <갈매기의 꿈>은 SF 장르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SF 컨벤션에서 낸시 크레스와 휴 잭맨은 환영을 받을 수 있으나, 리처드 바크는 환영을 받지 못할 겁니다. SF 컨벤션이 리처드 바크를 열정적으로 환영한다고 해도, 일반적인 독자들은 <갈매기의 꿈>이 초인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갈매기의 꿈>은 스티븐 굴드가 쓴 <점퍼>가 아닙니다. <점퍼>는 SF 장르를 의식하나, <갈매기의 꿈>은 의식하지 않습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다시 반박합니다. 비록 <갈매기의 꿈>이 SF 장르를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팬들은 얼마든지 <갈매기의 꿈>과 <스페인의 거지들>과 <엑스맨>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갈매기의 꿈>과 <스페인의 거지들>과 <엑스맨>에는 똑같이 초능력과 소외가 있습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장르가 고정적이지 않다고 설명합니다. 장르는 인위적이고 후천적입니다. 장르가 인위적이고 후천적이기 때문에, 장르 경계선은 흐릿하고 유동적입니다. <갈매기의 꿈>이 SF 장르를 의식하지 않고 SF 소설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SF 팬들은 <타이거! 타이거!>와 <스페인의 거지들>과 <엑스맨>과 <점퍼>를 <갈매기의 꿈>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SF 팬들은 유사성들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SF 팬들을 위한 재미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주장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계속 <갈매기의 꿈>이 SF 장르를 의식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갈매기의 꿈>이 SF 장르를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SF 팬들은 <갈매기의 꿈>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SF 팬들은 <갈매기의 꿈>을 다른 초인 소설들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정도가 아니라 사도입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아랫집 수진이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평범한 갈매기들과 비슷하다고 비판합니다.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 평범한 갈매기들이 편견(갈매기는 생선 대가리를 쫓아다녀야 한다)에 사로잡힌 것처럼,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아랫집 수진이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말자 할머니는 아랫집 수진이 '장르는 고정적이다'라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랫집 수진은 계속 SF 팬들이 <갈매기의 꿈>을 다른 초인 소설들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논란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말싸움을 벌일 겁니다. 심지어 이런 말싸움은 인신 공격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아랫집 수진은 뒷동네 말자 할머니가 어리석은 틀딱이라고 비아냥거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직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만 말싸움을 벌이지 않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 역시 다른 의견을 주장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갈매기의 꿈>이 차별과 소외를 말한다고 느낍니다. 반면, 옆동네 철수는 <갈매기의 꿈>이 차별과 소외를 미화한다고 비판합니다. "너 자신을 해방하라. 네가 너 자신을 해방한다면, 아무것도 너를 가로막지 못한다." 이렇게 <갈매기의 꿈>은 자아 해방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자아 해방이 전부인가요? 인간이 참된 자신을 찾는다면, 인간이 행복을 누릴 수 있나요? 옆동네 철수는 고개를 젓습니다.



마스다 미리가 그린 만화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에서 모리모토 요시코(수짱)는 자아 실현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모리모토 요시코는 연이어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부딪힙니다. 수직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 자아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억압적인 사회 구조는 자아 실현을 가로막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모리모토 요시코는 임금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 속에서 임금 노예의 자아 따위는 절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윤 극대화입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수짱을 비롯해 수두룩한 여자들은 인간보다 하녀가 되어야 합니다. 모리모토 요시코는 임금 노예와 하녀입니다. 결국 모리모토 요시코는 자아 실현에 실패하고 처절하게 울부짖습니다. <갈매기의 꿈>은 자아 실현이 중요하다고 설파하나, 수짱에게 이런 설교는 웃기지도 않는 신발 개나리입니다.


옆동네 철수는 <갈매기의 꿈>이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라고 비판합니다. 이웃집 영희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것처럼, 옆동네 철수 역시 자본주의를 비판합니다. 옆동네 철수가 (어설픈)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서구 자본주의보다 현실 사회주의가 백 배, 천 배, 만 배 낫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마르크스-레닌주의에게는 파쇼주의를 막기 위한 명분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에게 무슨 변명이 있나요? 자본주의에게 아무 변명이 없기 때문에, 남한 사회에서 옆동네 철수는 엄청난 소외를 겪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와 달리, 옆동네 철수는 <갈매기의 꿈>에 공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옆동네 철수는 <갈매기의 꿈>을 비판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갈매기의 꿈>에 차별과 소외가 있다고 주장하고, 옆동네 철수는 <갈매기의 꿈>이 소외를 미화한다고 비판합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갈매기의 꿈>을 다양하게 해석합니다. <갈매기의 꿈>은 소외를 동정하거나 미화합니다. <갈매기의 꿈>은 초인 소설이거나 그저 우화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문학을 해석할 때, 이렇게 사람들은 다양한 해석들을 내놓습니다. 이런 해석들은 충돌할지 모릅니다. 이런 해석들이 충돌한다면,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말싸움을 벌일 겁니다. 이건 문학 해석이 반드시 영원한 말싸움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문학을 해석하기 원한다면, 먼저 사람들은 문학이 무엇인지 논의해야 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어떻게 초인 장르가 나타났는지 탐구할 수 있습니다. 이건 주관적인 의견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가깝습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소외가 너무 심각한 문제라고 합의할 수 있습니다. 소외가 너무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갈매기의 꿈>에 공감하고, 옆동네 철수는 비판합니다. 영희가 공감하고 철수가 비판한다고 해도, 영희와 철수는 현실이 문학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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