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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어떻게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이 차별과 소외와 끔찍한 저항을 보편성으로 확장하는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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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이 차별과 소외와 끔찍한 저항을 보편성으로 확장하는가

OneTiger 2019. 9. 16. 19:55

※ 이 게시글에는 조 홀드먼이 쓴 <영원한 전쟁>과 노라 제미신이 쓴 <다섯 번째 계절>의 결말 누설이 있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 속에는 이질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차별합니다. 그들은 소외를 겪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몰아내고 죽이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죽이기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저항합니다. 그들은 너무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그들이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량 학살을 일으킵니다. 소외와 차별과 탄압은 대량 학살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권력자들입니다. 권력자들은 이질적인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권력자들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권력자들을 타파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질적인 사람들과 권력자들은 적대 관계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이질적인 사람들을 왜곡합니다. 권력자들은 거짓말들을 퍼뜨립니다. 권력자들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악당이라고 거짓말합니다. 민중들은 이런 거짓말을 믿습니다. 심지어 이질적인 사람들조차 거짓말을 믿습니다. 그래서 소외와 차별과 탄압은 훨씬 심각해지고, 이질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고, 이건 비극적인 대량 학살로 이어집니다. 만약 이웃집 영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가 조 홀드먼이 쓴 <영원한 전쟁>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소설 <영원한 전쟁>에는 외계인 토오란들이 있습니다. 외계인 토오란들은 지구 사람들과 다릅니다. 지구 사람들은 토오란들을 차별합니다. 심지어 지구 사람들은 토오란들을 몰아내고 죽이기 원합니다. 지구 사람들이 토오란들을 죽이기 원하기 때문에, 토오란들은 저항합니다. 토오란들은 너무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토오란들이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기 때문에, 토오란들은 대량 학살을 일으킵니다. 소외와 차별과 탄압은 대량 학살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권력자들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경제 공황을 두들겨 맞았습니다. 권력자들은 경제 공황을 해소해야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1930년대 경제 공황을 해소한 것처럼, 비극적인 전쟁은 경제 공황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권력자들은 전쟁을 일으키기 원합니다. 권력자들은 외계인 토오란들을 왜곡합니다. 권력자들은 거짓말들을 퍼뜨립니다. 권력자들은 외계인 토오란들이 무시무시한 악당이라고 거짓말합니다. 민중들은 이런 거짓말을 믿습니다. 그래서 소외와 차별과 탄압은 심각해지고, 외계인 토오란들은 지구 사람들에게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고, 이건 비극적인 대량 학살로 이어집니다. 옆동네 철수는 영희 이야기와 소설 <영원한 전쟁> 사이에 많은 유사성들이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이웃집 영희가 정말 <영원한 전쟁>을 이야기했나요?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이야기 구조와 시점이 다르다고 반박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이웃집 영희가 <영원한 전쟁>보다 <엑스맨>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엑스맨> 시리즈에서 사람들은 돌연변이들을 차별합니다. 돌연변이들은 일반적인 호모 사피엔스와 다릅니다. 돌연변이들은 소외를 겪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억압하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돌연변이들을 억압하기 원하기 때문에, 어떤 돌연변이들은 저항합니다. 매그니토와 미스틱과 세이버투스와 토드가 살인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돌연변이들은 너무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돌연변이들이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량 학살을 계획합니다. 소외와 차별과 탄압은 대량 학살로 이어집니다. 미스틱은 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차별했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 가기 싫었어." 어떤 엄마는 돌연변이 아들에게 묻습니다. "돌연변이 현상을 치료할 수 있어?" 엄마는 돌연변이가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호모 사피엔스가 병이 아니라 생물종인 것처럼, 돌연변이는 병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돌연변이들이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연변이들이 병이기 때문에, 보건부가 질병을 박멸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국가 정부가 돌연변이들을 박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그니토는 복수하기 원하고 대량 학살을 꿈꿉니다.



매그니토는 이게 끔찍한 비극이라고 인식합니다. 매그니토는 자신이 대량 학살자가 될 거라고 인식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매그니토는 묻습니다. 매그니토는 왜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묻습니다. 매그니토는 차별과 소외와 탄압 속에서 돌연변이들이 살아가지 못한다고 호소합니다. 이렇게 영화 <엑스맨> 시리즈는 차별, 소외, 탄압, 왜곡, 처절한 복수를 이야기합니다. 뒷동네 말자 할머니는 이웃집 영희가 영화 <엑스맨> 시리즈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반박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영화 <엑스맨>에서 권력자들이 돌연변이들을 적대하지 않는다고 반박합니다.


아랫집 수진은 노라 제미신이 쓴 <다섯 번째 계절>과 영희 이야기 사이에 많은 유사성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다섯 번째 계절>에는 오로진들이 있습니다. 오로진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차별합니다. 오로진들은 소외를 겪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몰아내고 죽이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오로진들을 죽이기 원하기 때문에, 그들은 저항합니다. 그들은 너무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오로진들이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량 학살을 일으킵니다. 소외와 차별과 탄압은 대량 학살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제국 권력자들입니다.



제국 권력자들은 오로진들을 싫어합니다. 제국 권력자들은 오로진들이 제국 권력을 타파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로진들과 제국 권력자들은 적대 관계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오로진들을 왜곡합니다. 제국 권력자들은 거짓말들을 퍼뜨립니다. 그들은 오로진들이 무시무시한 악당이라고 거짓말합니다. 민중들은 이런 거짓말을 믿습니다. 심지어 오로진들조차 거짓말을 믿습니다. 그래서 소외와 차별과 탄압은 심각해지고, 오로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고, 이건 대량 학살 비극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아랫집 수진은 이웃집 영희가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희 이야기와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정말 비슷합니다. 영화 <엑스맨>과 소설 <다섯 번째 계절>은 똑같이 초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엑스맨>보다 <다섯 번째 계절>은 차별과 소외와 복수를 훨씬 강조합니다. 분명히 영희 이야기와 <엑스맨>은 똑같이 차별과 소외와 복수를 언급하나, <엑스맨>보다 <다섯 번째 계절>이 훨씬 처절하기 때문에, 아랫집 수진은 이웃집 영희가 <엑스맨>보다 <다섯 번째 계절>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가 옳은가요?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 중에서 누가 옳은가요? 이웃집 영희가 무엇을 말하기 원했나요?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모두 잘못 짚었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을 이야기하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이웃집 영희는 사회주의자들을 이야기하기 원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질적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차별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외를 겪습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몰아내고 죽이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죽이기 원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저항합니다. 그들은 너무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그들이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량 학살을 일으킵니다.


소외와 차별과 탄압은 대량 학살로 이어집니다. 문제는 자본주의 권력자들입니다. 자본주의 권력자들은 사회주의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사회주의 운동이 자본주의를 타파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권력과 사회주의 운동은 적대 관계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사회주의를 왜곡합니다. 권력자들은 거짓말들을 퍼뜨립니다. 권력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무시무시한 악당이라고 거짓말합니다. 민중들은 이런 거짓말을 믿습니다. 심지어 좌파들조차 거짓말을 믿습니다. 그래서 소외와 차별과 탄압은 심각해지고, 사회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격렬하게 저항하고, 이건 비극적인 대량 학살로 이어집니다.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무시무시한 악당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독재 국가라고 말합니다. 이게 사실인가요?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외계인 토오란들과 돌연변이들과 오로진들 역시 무시무시한 악당일 겁니다. 외계인 토오란 사회가 독재 사회인가요? 아무 이유 없이, 매그니토를 비롯해 미스틱, 세이버투스, 토드가 대량 학살을 계획하나요? 왜 오로진들이 사람들을 죽이나요? 분명히 토오란들과 돌연변이들과 오로진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특히, 노라 제미신은 오로진들이 낭만적인 피해자라고 미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토오란들과 돌연변이들과 오로진들은 대량 학살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차별과 소외, 탄압입니다.


경제 공황을 해소하기 위해 지구 권력자들은 전쟁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돌연변이가 질병이라고 오해합니다. 제국 권력자들은 오로진들을 억제하기 원합니다. 토오란들과 매그니토를 비롯해 돌연변이들과 오로진들은 격렬하게 반발하고, 그들은 대량 학살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토오란들과 돌연변이들과 오로진들이 대량 학살을 일으킨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차별과 소외, 탄압입니다. 사회주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서구 자본주의는 인디언들을 학살했고, 흑인 노예들을 부려먹었고, 여자들을 길들였고, 열대 밀림들을 파괴했고, 탄광 노동자들을 착취했습니다. 사회주의가 나타나기 전에, 이미 서구 자본주의는 너무 많은 폭력들을 저질렀습니다.



인디언들과 흑인 노예들과 여자들과 열대 밀림들과 탄광 노동자들처럼,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폭력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이 자본주의를 직접 비판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훨씬 악랄하게 사회주의를 탄압합니다. 악랄한 탄압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은 고립되고, 결국 사회주의 운동은 저항과 해방 철학에서 멀어집니다. 이제 사회주의 운동에게는 오직 악과 깡만 남습니다. 사회주의는 독종이 되고 악과 깡으로 자본주의에게 저항합니다. 사회주의 독종은 대량 학살을 일으킵니다. 비단 사회주의만 독종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 저항 운동들은 독종이 됩니다. 인디언들 역시 백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왜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나요? 인디언들이 정말 무식하고 열등한 미개인들이기 때문에? 그건 아닙니다. 서구 자본주의가 아메리카 식민지를 수탈하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복수하기 원합니다. 비단 사회주의만 아니라 숱한 저항들은 악과 깡으로 자본주의에게 저항합니다. 자본주의가 너무 극심한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집 영희는 극심한 자본주의 폭력이 사회주의를 탄압하고 왜곡한다고 이야기하기 원했습니다. 이웃집 영희는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을 이야기하기 원하지 않았습니다.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모두 잘못 짚었습니다.



아니, 잠깐.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이 정말 잘못 짚었나요? 분명히 이웃집 영희는 사회주의자들을 이야기하기 원했으나, 영희 이야기와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은 많이 닮았습니다. 네 가지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들이 있습니다.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이 사회주의를 직접 옹호하지 않는다고 해도,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은 사회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전쟁>이 밀리터리 SF 장르라고 해도, 밀리터리 SF 장르 <영원한 전쟁>과 초인 장르 <엑스맨> 및 <다섯 번째 계절>은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엑스맨> 및 <다섯 번째 계절>과 달리, <영원한 전쟁>에서 토오란들은 주연 등장인물들이 아니나, 옆동네 철수는 토오란들이 차별을 상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구 국가들이 뻔뻔하고 야비하게 해외 난민들을 거부하는 것처럼, 지구 권력자들이 토오란들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옆동네 철수는 토오란들을 해외 난민들에게 대입합니다.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이 차별과 소외와 끔찍한 복수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웃집 영희는 사회주의가 소외를 당하고 몰락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은 틀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옆동네 철수와 뒷동네 말자 할머니와 아랫집 수진이 영희 이야기를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에 대입한다고 해도, 이건 잘못된 해석이 아닐 겁니다. 이렇게 어떤 이야기가 특정한 형식으로 뭔가를 비유할 때, 문학 평론가들은 문학성을 언급합니다. 영희 이야기에는 문학성이 있습니다. 영희 이야기에 문학성이 있기 때문에, 세 사람들은 <영원한 전쟁>과 <엑스맨>과 <다섯 번째 계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학성에는 이런 장점이 있습니다. 문학성은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에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문학성은 보편성을 얻습니다. 사회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이웃집 영희가 이질적인 사람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수구 꼴통 할아버지는 소외와 차별과 무모한 복수에 공감할지 모릅니다. 문학성이 보편성을 얻기 때문에, 수구 꼴통 할아버지는 영희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쓴 <상흔>에서 어떤 동물학자는 해상 선단 도시를 옹호합니다. 다른 사람은 선단 도시가 그저 해적 소굴에 불과하다고 무시하나, 동물학자는 선단 도시가 난민들과 천민들을 받아주기 때문에 선단 도시를 옹호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해상 선단 도시가 사회주의 국가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사회주의가 해방의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사회주의가 억압을 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소설 <상흔>은 사회주의를 직접 옹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차이나 미에빌은 사회주의를 극심하게 혐오할지 모릅니다. 차이나 미에빌은 악랄한 사회주의 빨갱이들이 접시물에 코를 처박고 뒈져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누가 차이나 미에빌의 속내를 직접 알 수 있나요? 그렇다고 해도 문학이 보편성을 얻기 때문에, 이웃집 영희는 해상 선단 도시가 사회주의 국가라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은 감동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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