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엄마 스라소니와 드워프 전사와 이질성 본문
[엄마 야생 동물과 아기들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엄마 야생 동물이 친숙한가요?]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다양한 외계인들이 있습니다. 온갖 스페이스 오페라 그림들, 소설들, 만화들, 애니메이션들, 영화들, 테이블 게임들, 비디오 게임들은 온갖 외계인들을 보여줍니다. 비단 스페이스 오페라만 아니라 중세 유럽 판타지와 스팀펑크 판타지 역시 온갖 유사 인간 종족들을 보여줍니다. 화성인, 금성인 같은 외계인은 스페이스 오페라를 대표합니다. 엘프, 드워프 같은 유사 인간 종족은 중세 유럽 판타지를 대표합니다. 화성인과 금성인과 엘프와 드워프 이외에 사변 장르(speculative fiction)는 수많은 비인간 존재들을 보여줍니다. 사변 장르에게 비인간 존재는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에서 우직한 드워프 전사가 전투 도끼를 휘두르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외계 우주 구축함이 어뢰를 날리는 것처럼, 스팀펑크 판타지에서 벌레 종족 여자와 인간 남자가 애무하는 것처럼, 특수 촬영 영화에서 엄마 나방 괴수가 도시를 파괴하는 것처럼, 바이오펑크에서 똑똑한 신종 돌고래가 우주선 선장이 되는 것처럼, 사이버펑크에서 인공 지능이 자신을 각성하고 의식을 개화하고 우주로 진출하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유럽 판타지를 비롯해 수많은 사변 소설들, 만화들, 애니메이션들, 영화들, 테이블 게임들, 비디오 게임들은 온갖 비인간 존재들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사변 장르에게 비인간 존재는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비인간 존재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비인간 존재는 이질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비인간 존재가 반드시 이질적인가요? 여기에서 '이질적이다'라는 문구가 무엇을 뜻하나요? <수달 타카의 일생>에서 수달은 비인간 존재입니다. 분명히 수달은 비인간 존재입니다. 아무리 <수달 타카의 일생>이 수달을 의인화한다고 해도, 수달은 인간이 아닙니다. <수달 타카의 일생>보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외계인들을 훨씬 의인화합니다.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들에서 외계인들은 그저 피부색이나 형태, 관습이 다른 인간에 불과합니다.
이런 스페이스 오페라들보다 <수달 타카의 일생>은 야생 동물을 훨씬 덜 의인화합니다. 온갖 외계인들보다 수달 타카는 훨씬 덜 인간적입니다. 엘프와 드워프와 하플링보다 수달 타카는 훨씬 덜 인간적입니다. 독자가 중세 판타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드워프가 정말 비인간적인 성향을 드러낼 거라고 기대하지 않을 겁니다. 중세 판타지 소설 속에서 드워프는 진짜 드워프가 아닙니다. 드워프는 튼튼하고 우직한 인간입니다. 하플링은 훨씬 인간적입니다. 아무리 중세 판타지 소설이 하플링을 비인간 존재라고 부른다고 해도, 하플링은 아주 인간적입니다. 하플링은 아주 목가적인 인간입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정말 이질적인 외계인들을 보여주고 중세 유럽 판타지들이 정말 이질적인 유사 인간 종족들을 보여준다면, 장르 독자들은 이런 설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스팀펑크 판타지에서 벌레 종족 여자와 인간 남자가 키스하고 애무하고 섹스한다고 해도, 이런 장면은 별로 끈적거리지 않습니다. 섹스 취향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섹스 장면을 좋아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여러 인류 문화들에서 벌레는 하찮거나 징그럽거나 혐오스러운 것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들은 커다란 거미와 지네와 전갈을 애지중지하나, 여전히 벌레는 혐오를 대표합니다.
만약 스팀펑크 판타지 소설에서 벌레 종족 여자가 인간 남자와 격렬하게 키스하고 애무하고 섹스한다면, 보편적인 정서(벌레는 징그럽다)를 뒤집기 위해 소설 작가는 벌레 종족 여자를 설정했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벌레 종족 여자에게 젖가슴이 있다고 해도, 만약 인간 남자가 벌레 종족 여자의 젖가슴을 어루만지거나 젖꼭지를 빤다면, '인간'으로서 독자는 얼굴을 찌푸릴지 모릅니다. "우웩, 염병할, 어떻게 벌레 여자와 섹스할 수 있지? 대가리가 돌았나?" 소설 <변신>은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신한다고 묘사합니다. 아니, 그레고르 잠자가 정말 벌레로 변신하나요? 왜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되나요?
소설 <변신> 원문(독일어 판본)에서 벌레는 'ungeziefer'입니다. 이건 벌레보다 미물, 미개한 생명체, 열등한 생명체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서구 문화에서 벌레와 미물과 미개한 생명체와 열등한 생명체는 비슷한 위상입니다. 국내 문화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여러 인류 문화들에서도 이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신한다고 간주할 겁니다. 다른 여러 인류 문화들 역시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가 된다고 간주할 겁니다. 벌레가 하찮기 때문에, 벌레 인간은 너무 비인간적입니다. 그래서 소설 <변신>은 부조리 문학이 될 수 있습니다.
숱한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중세 유럽 판타지들은 외계인들과 유사 인간 종족들을 보여주나, 그들보다 벌레 인간 그레고르 잠자는 훨씬 비인간적입니다. 그레고르 잠자는 정말 비인간 존재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많은 SF 독자들, 판타지 독자들은 그레고르 잠자보다 외계인들, 유사 인간 종족들을 선호합니다. 멋진 강화복 외계인과 우직한 드워프 전사와 그레고르 잠자는 모두 비인간 존재이나, 많은 SF 독자들, 판타지 독자들은 그레고르 잠자보다 강화복 외계인과 드워프 전사를 훨씬 좋아합니다. 강화복 외계인과 드워프 전사와 그레고르 잠자가 똑같이 비인간 존재라고 해도, 셋은 다릅니다.
수달 타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외계인들과 유사 인간 종족들보다 수달 타카는 훨씬 비인간 존재입니다. 만약 아늑한 주점에서 하플링 아주머니가 수다를 떨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바이스비어 한 파인트를 느긋하게 즐긴다면, 이건 아주 목가적이고 인간적일 겁니다. 하플링 아주머니와 수달 타카는 똑같이 비인간 존재이나, 느긋한 하플링 아주머니와 바이스비어 한 파인트는 비인간적이지 않습니다. 하플링 아주머니보다 수탈 타카는 훨씬 비인간적입니다. 판타지 독자 역시 아늑한 주점에서 수다를 떨고 바이스비어를 마시기 원할지 모릅니다. 반면, 독자는 개구리를 날것으로 잡아먹지 않을 겁니다.
수달 타카는 개구리를 날것으로 잡아먹으나, 독자는 개구리를 날것으로 잡아먹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먹고 살기 위해 생존자가 돌연변이 고기를 날것으로 물어뜯을 때, 독자는 얼굴을 찌푸릴 겁니다. "어휴, 이건 너무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야." 만약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자가 돌연변이 괴물을 죽인다면, 먹고 살기 위해 생존자는 괴물 고기를 먹을지 모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이런 장면은 드물지 않습니다. 만약 불을 피우기가 적당하지 않다면, 심지어 생존자는 피를 흘리고 괴물 고기를 날것으로 씹어먹을 겁니다. 이런 장면에서 생존자는 너무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입니다.
[외계인은 낯설어야 합니다. 하지만 호전적인 외계인, 우주 전쟁이 낯선 것, 전복적인 것, 새로운 것인가요?]
하플링 아주머니는 비인간 존재이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자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생존자가 괴물 고기를 날것으로 씹어먹기 때문에, 하플링 아주머니보다 생존자는 훨씬 비인간적입니다. 비인간 존재보다 인간은 훨씬 비인간적입니다. 하플링 아주머니와 수달 타카가 똑같이 비인간 존재라고 해도, 하플링 아주머니가 바이스비어를 마시기 때문에, 하플링 아주머니는 인간적입니다. (맥주들 중에서 바이스비어는 정말 최고가 아닙니까.) 하지만 중세 유럽 판타지 독자는 개구리를 날것으로 잡아먹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개구리 뒷다리가 통통하다고 해도, 독자는 개구리를 지글지글 구워먹기 원할 겁니다.
수달 타카는 개구리를 구워먹지 않습니다. 수달 타카는 요리를 알지 못하고 불을 다루지 못합니다. 하플링 아주머니는 불을 다루고 요리할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전수한 것처럼, 하플링은 불을 다룰 수 있습니다. 영화 <에일리언 3>에서 엘렌 리플리가 지적하는 것처럼,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불은 가장 커다란 차이입니다. 판타지 독자와 하플링 아주머니는 불을 똑같이 다룰 수 있습니다. 반면, 프로메테우스는 수달에게 불을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하플링 아주머니와 수달 타카가 똑같이 비인간 존재라고 해도, 하플링에게 문화가 있고, 수달에게 야성이 있기 때문에, 수달은 훨씬 비인간적입니다.
이렇게 하플링 아주머니보다 수달 타카는 훨씬 비인간적입니다. 어쩌면 수달 타카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자는 훨씬 비인간적인지 모릅니다. 수달이 비인간 존재이고, 생존자가 호모 사피엔스임에도, 수달 타카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자는 훨씬 비인간적인지 모릅니다. 하플링 아주머니와 수달 타카가 똑같이 비인간 존재라고 해도, 수달은 훨씬 비인간적이고, 이런 수달 타카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자는 훨씬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입니다. 강화복 외계인과 드워프 전사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자는 훨씬 비인간적인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비인간 존재'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사변 장르에서 비인간 존재는 가장 커다란 특징입니다. 하지만 '비인간 존재'가 무엇을 가리키나요? 만약 어떤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면, 이 존재가 반드시 '비인간 존재'인가요? 하지만 하플링 아주머니와 수달 타카가 보여주는 것처럼, 어떤 비인간 존재는 훨씬 인간적입니다. 현실 속에 하플링 아주머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플링 아주머니는 상상력입니다. 반면, 현실 속에는 수달이 있습니다. 아무리 수달이 희귀 야생 동물이라고 해도, 현실 속에는 수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상상력(하플링 아주머니)보다 현실(야생 동물 수달)은 훨씬 이질적입니다. 중세 판타지 소설보다 자연 다큐멘터리 문학은 훨씬 이질적입니다.
하플링 아주머니가 판타지 설정이라고 해도, 판타지 설정보다 야생 동물은 훨씬 이질적일 수 있습니다. '비인간 존재'는 이질적인 존재를 가리킬 수 있으나, 언제나 비인간 존재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만약 비인간 존재가 이질적인 존재라고 해도, 여기에서 '이질성'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플링 아주머니는 비인간적입니다. 왜 하플링 아주머니가 비인간적인가요? 하플링 아주머니가 아주 느긋하고 안락하고 목가적이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지친 도시 시민에게 아주 느긋하고 안락하고 목가적인 하플링 아주머니는 이질적입니다. 그래서 하플링은 비인간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느긋하고 안락하고 목가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하플링은 이것을 훨씬 과장합니다.
하플링은 과장된 느긋하고 안락하고 목가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이 긍정적인 측면들을 과장하고 조합하고 신을 숭배하는 것처럼, 하플링은 긍정적인 측면을 뻥튀기합니다.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하는 인간이 신을 만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신은 가장 초월적인 비인간 존재이나, 인간이 신을 만들기 때문에, 신은 인간적입니다. 하플링 아주머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플링은 비인간 존재이고, 동시에 하플링은 인간적입니다. 하지만 흔히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이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비인간은 부정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목가적인 하플링 아주머니보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자는 훨씬 비인간 존재가 됩니다. 생존자가 괴물 고기를 먹기 때문에, 생존자는 부정적입니다.
하플링 아주머니처럼, 언제나 비인간 존재는 낯선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플링 아주머니는 판타지 설정이나, 어떤 사람들에게 하플링 아주머니보다 수달 타카는 훨씬 낯설 겁니다. 아늑한 주점에서 하플링 아주머니가 바이스비어를 마시기 때문에, 이건 친숙합니다. 호수 주변에서 수달이 개구리를 날것으로 씹어먹기 때문에, 이건 낯섭니다. 수달은 낯설고 비인간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수달 타카의 일생>이 사변 문학이 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이런 자연 다큐멘터리 문학은 사변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소설은 사변 문학에 속하나, 자연 다큐멘터리 문학에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없습니다.
사변 문학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을 보여줘야 합니다. 현실 속에 하플링 아주머니가 없기 때문에, 하플링 아주머니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현실 속에 수달이 있기 때문에, 수달 타카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아닙니다. 하지만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반드시 낯선 것이 되나요? 많은 사람들에게 하플링 아주머니(비일상적인 상상력)보다 수달 타카(현실 속의 야생 동물)는 훨씬 낯설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느긋한 저녁 술자리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강물 속에서 개구리를 잡고 뜯어먹기 원하지 않을 겁니다. 사변 문학보다 자연 다큐멘터리 문학은 훨씬 낯설 수 있습니다. 사변 문학은 절대적으로 낯설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드워프 전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드워프 전사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현실 속에서 슈퍼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슈퍼걸, 크립톤 성인 카라 조엘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외계인과 유사 인간 종족은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그래서 크립톤 성인과 드워프 전사는 이질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저스티스 리그>를 시청하고 비디오 게임 <에이지 오브 원더스 III>를 플레이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저스티스 리그>와 <에이지 오브 원더스 III>가 정말 이질적이라고 느끼나요? 로자 룩셈부르크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체 게바라는 존재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외계인이 아니고, 체 게바라는 드워프가 아닙니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기 때문에, 서구 제국주의는 로자와 체 게바라를 죽였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너무 이질적이기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때문에, 제국주의는 로자와 체 게바라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제국주의에 충성합니다. 크립톤 성인과 로자 룩셈부르크 중에서, 드워프 전사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중에서 무엇이 훨씬 낯선가요? 아무리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낯선 것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이게 정말 낯선 것인가요? 숱한 SF 독자들은 낯선 것, 이질적인 것, 전복적인 것, 새로운 것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낯선 것,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나요? 오히려 그들이 친숙한 것을 새롭게 포장하지 않나요?
[전쟁과 정복보다 야생과 돌봄 노동은 훨씬 피지배적입니다. 피지배적인 것이 훨씬 낯설지 않나요?]
많은 사람들은 사변 장르가 낯설고 기이한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변 장르가 낯설고 기이한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변 장르는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하플링 아주머니보다 수달 타카가 훨씬 이질적인 것처럼, 사변 장르는 절대적으로 낯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에라곤> 같은 중세 유럽 판타지보다 <쉘터 2> 같은 자연 생태계 시뮬레이션이 훨씬 낯설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드워프와 드래곤과 마법사와 악령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이라고 해도, 이런 판타지 설정들보다 엄마 스라소니는 훨씬 낯설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가부장 문화는 지배적입니다. 가부장 문화와 달리, 돌봄 노동은 착취를 당하고 소외를 겪습니다.
<에라곤>은 전쟁, 가부장 문화를 이야기합니다. <에라곤>은 돌봄 노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반면, <쉘터 2>는 얼마나 힘들게 엄마 스라소니가 아기들을 돌보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는 침략, 전쟁, 정복, 학살이 없습니다. <에라곤>은 지배적인 것을 이야기합니다. <에라곤>과 달리, 현실 속에서 돌봄 노동이 착취를 당하고 소외를 겪는다고 해도, <쉘터 2>는 돌봄 노동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드워프 전사가 비일상적인 상상력이라고 해도, 드워프 전사는 지배적인 것에 충성합니다. 아무리 스라소니가 현실 속의 야생 동물이라고 해도, 엄마 스라소니는 피지배적인 것, 돌봄 노동을 보여줍니다. 엄마 야생 동물은 훨씬 낯섭니다.
비인간 존재는 이질적일 수 있으나, 이질성들은 똑같지 않습니다. 하플링 아주머니가 선망들을 과장하기 때문에, 하플링 아주머니는 이질적입니다. 벌레 종족 여자가 통념을 뒤집기 때문에, 벌레 종족 여자는 이질적입니다. 엄마 스라소니에게 문화보다 야성이 있고 돌봄 노동이 피지배적이기 때문에, 엄마 스라소니는 이질적입니다. 이것들 이외에 이질성에는 여러 속성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어떤 이질성보다 다른 이질성은 훨씬 낯설고 새롭습니다. 아무리 지배적인 것이 삐뚤어지고 틀리다고 해도, 지배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둔갑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배적인 것이 친숙하다고 느낍니다.
아무리 비주류가 옳다고 해도, 비주류가 유명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주류가 낯설다고 느낍니다. 아무리 비일상적인 상상력이 강화복 외계인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만약 강화복 외계인이 지배적인 관념에 충성한다면,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낯선 것, 전복적인 것, 새로운 것이 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이 엄마 야생 동물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엄마 야생 동물은 피지배적인 것, 낯선 것, 새로운 것인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강화복 외계인과 엄마 스라소니 중에서 강화복 외계인이 낯설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페라 속의 강화복 외계인이 정말 낯선가요?
만약 사변 문학 독자가 낯설고 새로운 비인간 존재를 좋아한다면, 아무리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유럽 판타지가 사변 장르에 속한다고 해도, 사변 문학 독자는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유럽 판타지를 외면할 수 있습니다. <에라곤>의 드워프 전사보다 <쉘터 2>의 엄마 스라소니에게서 사변 문학 독자는 낯설고 기이한 측면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블로그 제목에는 SF(speculative fiction)가 있으나, 이 블로그가 <에라곤>보다 <쉘터 2>를 훨씬 많이 떠든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