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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왜 사변 장르가 반인반수를 선호하는가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왜 사변 장르가 반인반수를 선호하는가

OneTiger 2019. 10. 18. 20:33

[스페이스 오페라는 반인반수 외계인을 선호합니다. 이건 야생 동물이 외계인 같은 이방인이라는 뜻입니다.]



비디오 4X 게임 <마스터 오브 오리온> 시리즈는 스페이스 오페라입니다. 다른 여러 우주 4X 게임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 게임 시리즈에서 다양한 외계인 세력들은 갈등하거나 협동하거나 싸우거나 동맹을 맺습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원조 우주 4X 게임이기 때문에, 이 게임 시리즈는 다른 여러 우주 4X 게임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이 시리즈가 여러 후배 스페이스 오페라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처럼, 여러 선배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게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울타리 안에서 여러 소설들, 만화들, 영화들, 게임들은 상호 작용할 겁니다.


이런 선배/후배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다양한 외계인들을 보여줍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외계인들을 설정할 때, 스페이스 오페라들은 야생 동물들을 이용합니다. 반인반수는 아주 흔한 외계인입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 역시 반인반수 외계인들을 보여줍니다. 알카리는 조류 종족입니다. 불라시는 불곰입니다. 클라콘은 개미입니다. 므르샨은 살쾡이입니다. 사크라는 도마뱀입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에는 유사 인간 종족과 암석 종족과 기계 종족이 있으나, 여러 외계인들은 반인반수입니다. 외계인들이 반인반수이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 그들은 사이언스 픽션보다 우화에 가깝습니다.



우화는 동물들에게 특정한 성향들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파충류는 차갑습니다. 곰은 우직합니다. 개미는 뛰어난 협동을 자랑합니다. 고양이는 나긋나긋하고 도도합니다. 우화는 이런 성향들을 이용해 동물들을 의인화합니다. 반인반수 외계인들 역시 이런 성향들을 보여줍니다. 불곰 외계인들은 호전적인 싸움꾼이 되어야 합니다. 불곰은 겁쟁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불곰 외계인들이 다른 외계인들과 싸운다면, 그들은 강력한 전투력을 증명할 겁니다. 조류 외계인들이나 살쾡이 외계인들은 감히 불곰 외계인들을 이기지 못합니다. 현실 속에서 새들이 불곰을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조류 외계인들보다 불곰 외계인들은 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동물 성향들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서 불곰은 떡대 싸움꾼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저 불곰에게 떡대 싸움꾼 성향을 대입하고 우화를 만들 뿐입니다. 동물 성향이 고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불곰은 떡대 싸움꾼보다 든든하고 느긋한 성향이 될 수 있습니다.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에서 불곰 인간 구라흘들은 온화한 치유사입니다. 그들은 떡대 싸움꾼이 될 수 있으나, 늑대 인간 가로우들과 달리, 그들은 치유사에 가깝습니다. 불라시와 구라흘은 똑같이 사변 장르 속의 불곰 반인반수이나, 구라흘처럼, 불라시가 자연 환경을 보호하기 원한다고 해도, 불라시와 구라흘은 정반대입니다. 이런 반인반수들에게는 우화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불라시와 구라흘이 보여주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중세 유럽 판타지들을 비롯해 사변 장르들에서 반인반수 종족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파올로 바치갈루피가 쓴 <십브레이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바이오펑크입니다. <십브레이커>에는 여러 반인반수들이 있습니다. 차이나 미에빌이 쓴 <페르디도 거리의 기차역>은 스팀펑크 판타지입니다. 소설 속에는 여러 반인반수들이 있습니다. <웨어울프 디 아포칼립스>에서 상당수 주연 등장인물들은 반인반수입니다. 어쩌면 허버트 웰즈가 <모로 박사의 섬>을 썼을 때부터, 사변 장르에서 이미 반인반수는 드문 소재가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아니, 허버트 웰즈가 <모로 박사의 섬>을 쓰기 전에, 17세기에 이미 마가렛 캐번디시는 <불타는 세계 The Blazing World>를 썼습니다. <불타는 세계>는 페미니즘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그래서 어떤 평론가들은 <불타는 세계>가 원형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라고 평가합니다. <불타는 세계>가 사이언티픽 로망스가 아니라고 해도, 페미니즘 유토피아로서 <불타는 세계>는 사변 문학입니다. 소설 속에서 젊은 여자는 여왕이 되고 '말하는 동물들'을 다스립니다. 소설 속에는 비인간 존재로서 말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본격적인 바이오펑크 소설이 나오기 전에, 이미 사변 문학은 반인반수를 이야기했습니다.



17세기 페미니즘 유토피아 문학 <불타는 세계>부터 21세기 우주 4X 게임 <스텔라리스>까지, 사변 장르에서 반인반수는 흔한 비인간 존재입니다. 만약 사변 소설 작가가 중세 유럽 판타지나 스페이스 오페라나 스팀펑크 판타지나 다른 어떤 사변 소설을 쓰고 비인간 존재를 집어넣기 원한다면, 반인반수는 가장 쉬운 선택일 겁니다. 이제까지 사변 장르에서 반인반수들은 엄청나게 많은 인기들을 끌었고, 앞으로도 반인반수들은 인기들을 계속 유지할 것 같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유럽 판타지와 다른 여러 사변 장르들에서 비인간 존재로서 반인반수들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기술적 특이점을 통과한다면,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사이버펑크들은 인조인간들을 훨씬 중시할지 모릅니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SF 문학 역시 현실을 반영합니다. 만약 현실 속에서 기술적 특이점이 화제가 된다면, SF 문학 속에서도 기술적 특이점은 화제가 될 겁니다. 어쩌면 중세 유럽 판타지 역시 골렘을 이용해 기술적 특이점을 반영하기 원할지 모릅니다. 심지어 이미 <토치라이트> 같은 핵 앤 슬래시 게임조차 중세 유럽 판타지가 골렘을 이용해 기술적 특이점을 비유한다고 보여줬습니다. 이건 어색한 설정이 아닙니다. 기계 골렘은 로봇과 비슷한 위상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에서 사이보그 종족 비중이 커진다고 해도, 반인반수들은 인기를 잃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만약 인조인간들과 기계 골렘들이 늘어난다고 해도, 사변 장르에서 반인반수들은 인기를 잃지 않을 겁니다. 여전히 반인반수들은 우주선 선장이 되거나, 삼림 레인저가 되거나, 컴퓨터를 해킹하거나, 해골 병사에게 마법 화살을 날릴 겁니다. 사변 장르는 반인반수들을 계속 사랑할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왜 고전 페미니즘 유토피아부터 최신 스페이스 오페라까지, 사변 장르가 반인반수들을 사랑하나요? 만약 앞으로도 사변 장르가 반인반수들을 계속 사랑한다면, 이유가 무엇인가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야생 동물이 가장 흔한 비인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비인간 존재를 만나기 원한다면, 야생 동물은 가장 쉬운 대안입니다.


사변 소설 작가가 외계인이나 유사 인간 종족을 상상할 때, 사변 소설 작가에게는 모델이 필요합니다. 작가는 모델을 이용해 외계인이나 유사 인간 종족 같은 이방인을 설정해야 합니다. 작가는 신이 아닙니다. 작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못합니다. 작가는 뭔가를 본떠야 합니다. 아니, 심지어 기독교 신화조차 창조주가 자신을 본뜨고 인간을 창조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인간을 만들기 위해 창조주에게도 모델이 필요합니다. 만약 작가가 '이방인'을 만들기 원한다면, 작가는 비인간 존재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무엇이 가장 흔하고 쉬운 모델이 되나요? 대답은 야생 동물입니다. 야생 동물은 가장 흔한 이방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변 장르에서 반인반수는 외계인이 됩니다.



야생 동물들 이외에 작가는 다른 모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가는 인간 성향을 과장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바람, 불꽃, 강물 같은 자연 현상을 의인화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무생물에게 숨결을 불어넣고 무생물이 살아움직인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중세 유럽 판타지들과 여러 사변 장르들에는 아름다운 외계인, 바위 거인, 에너지 종족이 있습니다. 심지어 에너지조차 외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스페이스 오페라 게임 <FTL: 패스터 댄 라이트>에서 에너지 종족 승무원은 우주선 동력을 충전합니다. <페르디도 기차역>의 캑터케이처럼, 식물 역시 유사 인간 종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미 원형적인 사이언티픽 로망스 역시 식물 종족을 이야기했습니다. 어슐라 르 귄과 패트리스 머피는 식물 종족을 이용해 단편 소설을 썼습니다. 중세 유럽 판타지 <길드 워 2>와 스페이스 오페라 <스텔라리스>에는 식물 종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성향, 자연 현상, 무생물, 식물보다 야생 동물은 훨씬 좋은 대안입니다. 인간 역시 동물입니다. 야생 동물과 인간은 닮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철학과 과학이 있습니다. 철학과 과학 덕분에, 인간과 야생 동물은 다릅니다. 인간은 동물에 속하나, 인간과 야생 동물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철학과 과학)가 있습니다. 그래서 <종의 기원>은 커다란 화제가 되었습니다.



<종의 기원> 논란이 보여주는 것처럼, 인간은 동물에서 비롯했으나, 인간과 동물은 다릅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미묘한 관계, 미묘한 거리가 있습니다. 엉터리 사회 생물학은 이런 미묘한 거리를 이용해 지배적인 관념을 강화하고 우생학에 빠집니다. 인간과 동물이 닮았고 동시에 닮지 않았기 때문에, 엉터리 사회 생물학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야생 동물을 바라볼 때, 우리는 친숙함을 느끼고, 동시에 우리는 이질성을 느낍니다. 비록 마가렛 캐번디시가 진화 생물학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해도, 마가렛 캐번디시는 야생 동물에게 미묘한 친숙함과 미묘한 이질성이 있다고 느꼈을 겁니다. 우리가 진화 생물학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미묘한 거리가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동물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직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생 동물에게는 외계인이 되기 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모델들에는 이런 미묘한 관계, 미묘한 거리가 없습니다. 외계인은 이질적이어야 하나, 동시에 인간과 외계인은 교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스페이스 오페라와 중세 유럽 판타지와 여러 사변 장르들에서 이방인이 너무 불가해하다면, 인간과 이방인은 교류하지 못할 겁니다. 이방인은 이질적이어야 하나, 동시에 이방인은 인간에게서 너무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방인에게 친숙함과 이질성은 적절한 균형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사변 소설 작가가 이런 적절한 균형, 적절한 친숙함과 이질성을 원한다면, 야생 동물은 좋은 모델이 됩니다. 미묘한 거리 덕분에, 친숙함과 이질성은 공존할 수 있습니다.



야생 동물 이외에 다른 모델들에는 이런 균형이 없습니다. 인간 성향이 뻥튀기된다고 해도, 이건 너무 인간적입니다. 하플링은 그저 과장된 목가적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어제 10월 17일 게시글이 이야기한 것처럼, 과장된 인간 성향은 너무 친숙합니다. 과장된 인간 성향보다 야생 동물은 훨씬 낯설고 나은 모델입니다. 암석 외계인은 생명 현상을 풍기지 못합니다. 에너지 종족은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물의 정령 운디네는 그저 여자 형태를 빌릴 뿐입니다. 이런 것들보다 식물은 훨씬 나은 모델입니다. 어슐라 르 귄은 나무를 아주 사랑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은 동물입니다. 인간은 동물에 속합니다.


동물이 움직이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이 닮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에게 의지가 있다고 느낍니다. 반면, 식물에게는 의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식물은 너무 수동적입니다. 그래서 결국 식물 아내가 플랜테이션 농부를 몰아낸다고 해도 패트리스 머피는 수동적인 여자를 식물에 비유했을 겁니다. 식물 외계인은 흥미로운 설정이나, 식물과 인간보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 미묘한 관계를 찾기는 훨씬 쉽습니다. 그래서 사변 장르는 반인반수를 사랑합니다. 사변 장르가 비인간 존재를 설정하기 원할 때, 야생 동물은 가장 쉬운 모델입니다. 앞으로도 이건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야생 동물은 이방인입니다.



[오소리 가족에게는 친숙하고 낯선 감성, 미묘한 관계와 거리, 이방인이 되기 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야생 동물에게서 외계인(이 되기 위한 가능성)을 봅니다. 만약 야생 동물이 외계인(이 되기 위한 가능성)이라면, 야생 동물 이야기에도 친숙하고 낯선 감수성, 미묘한 거리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역시 친숙하고 낯선 감수성을 풍기고 미묘한 거리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쉘터> 같은 생태계 게임은 사변 장르가 아닙니다. 하지만 야생 동물에게서 외계인이 비롯하기 때문에, <쉘터>에는 친숙하고 낯선 감수성, 미묘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변 문학 독자가 <쉘터>를 좋아한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건 당연한 현상입니다.


<쉘터> 시리즈에는 친숙하고 낯선 감동이 있습니다. <쉘터> 시리즈는 정말 감동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게시글이 <마스터 오브 오리온>으로 시작하고 <쉘터> 호평으로 끝난다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쉘터>가 생태계 시뮬레이션임에도, 어떻게 <쉘터>를 호평하기 위해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이용할 수 있나요? 이게 오류가 아닌가요? 하지만 야생 동물은 외계인을 설정하기 위한 생산 조건입니다. 그리고 <쉘터>는 야생 동물들을 감동적으로 묘사합니다. <쉘터>를 호평하기 위해 이 게시글은 <마스터 오브 오리온>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은 <쉘터> 시리즈를 호평합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게임 플레이어들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이용해 생태계 시뮬레이션을 호평하나요? 솔직히 'SF'와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덕질이 스페이스 오페라를 이용해 생태계 시뮬레이션을 호평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이것을 하겠습니까. <마스터 오브 오리온>이 반인반수 외계인을 설정하는 것처럼, <쉘터> 시리즈에는 친숙하고 낯선 감동이 있습니다. <쉘터 3> 역시 좋은 작품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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