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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A와 A´,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SF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A와 A´, 현실과 비현실, 그리고 SF

OneTiger 2020. 2. 28. 20:18

[엄마 거대 괴수는 비현실입니다. 비현실 덕분에, 현실은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토끼와 거북은 달리기 경주합니다. 거북보다 토끼가 훨씬 빠르기 때문에, 토끼는 핸디캡을 받고, 토끼보다 먼저 거북은 출발합니다. 거북이 출발한 이후, 시간은 어느 정도 지나고, 토끼는 출발합니다. 전형적인 동화와 달리, 비록 달리기 경주에서 토끼가 자만하지 않고 잠들지 않는다고 해도, 토끼는 거북을 앞지르지 못합니다. 거북이 선두를 계속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거북은 출발했습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이후, 토끼는 출발했습니다. 거북과 토끼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토끼가 이 간격을 채우고 새로운 간격을 벌린 이후, 토끼는 거북을 앞지를 겁니다.


시간 간격을 채우고 새로운 시간 간격을 벌리기 위해, 토끼는 달립니다. 하지만 토끼가 달리는 동안, 거북은 쉬지 않습니다. 거북은 계속 움직입니다. 비록 거북이 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해도, 거북이 느릿느릿 걷는다고 해도, 거북은 계속 움직입니다. 토끼는 시간 간격을 줄일 수 있으나, 토끼가 시간 간격을 줄이는 동안, 거북이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거북은 선두를 유지합니다. 아무리 토끼가 빨리 달린다고 해도, 이미 거북이 선두를 차지했고, 토끼가 달리는 동안, 거북 역시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토끼는 간격을 완전히 좁히지 못합니다. 거북은 선두를 유지하고, 이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제논의 역설'은 이런 고정적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거북이 먼저 출발했고, 토끼와 거북 사이에 간격이 있고, 토끼가 달리는 동안, 거북이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간격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토끼는 거북을 앞지르지 못합니다. 거북이 먼저 출발했기 때문에, 거북은 선두를 계속 유지합니다. 사람들은 이게 엉터리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제논의 역설'은 토끼가 거북을 앞지르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나, 현실에서 토끼는 거북을 얼마든지 앞지를 수 있습니다. '제논의 역설'에서 논증 구조는 타당한지 모르나, 거북보다 토끼는 훨씬 빠르고, '제논의 역설' 명제는 엉터리입니다.


'제논의 역설'에서 명제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제논의 역설'은 오류입니다. 하지만 비록 이게 오류라고 해도, '제논의 역설'은 아주 유명합니다. 왜 '제논의 역설'이 유명한가요? 왜 사람들이 이것을 계속 언급하나요? 존재론 철학에서 존재가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제논의 역설'은 무, 변화, 생성보다 존재가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서구) 철학에서 존재론은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존재가 무엇인가?" (서구) 철학에서 여러 철학자들은 존재를 물었습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있는 것은 없지 않고, 없는 것은 있지 않습니다. 왜 없는 것이 있지 않나요?



없는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뭔가가 없을 때, 우리는 이것을 무(無)라고 부릅니다. 없는 것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것은 있지 못합니다. 없는 것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無)보다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사고 방식은 무론(無論)보다 존재론(存在論)입니다. 존재론 철학은 무보다 존재가 중요하다고 간주합니다. 뭔가가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은 없는 것이고, 철학은 있는 것, 존재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고대 파르메니데스부터 근대 앙리 베르그송까지, 철학은 무보다 존재를 중시합니다. 이 세상에는 존재가 있습니다. 존재는 충만합니다.


있는 것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는 충만합니다. 존재는 불변입니다. 존재는 근본적입니다. 존재가 충만하고, 불변이고, 근본적이기 때문에, 생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성은 "어떻게 뭔가가 나타나는가?"라고 묻습니다. 엄마가 딸을 낳는 것처럼, 출산 이후, 수유가 가능한 것처럼, 생성은 어떻게 뭔가가 나타나는지 묻습니다. 하지만 이 물음은 존재, 불변, 근본을 부정합니다. 만약 뭔가가 나타난다면, 그 이전에, 이것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뭔가가 존재하지 않을 때, 생성은 가능합니다. 엄마에게 딸이 없기 때문에, 엄마는 딸을 낳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딸은 불변이 아니고 근본이 아닙니다.



엄마가 딸을 낳기 때문에, 만약 엄마가 결혼하지 않는다면, 딸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생성'은 존재론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생성은 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정할 수 있습니다. 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무(無)를 가리킵니다. 존재와 무는 대립하고, 그래서 생성은 존재를 부정할 수 있습니다. 존재론 철학이 존재를 중시하기 때문에, 존재론 철학에서 생성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존재론 철학에서 생성이 중요하다고 해도, 생성보다 존재는 훨씬 중요합니다. 이미 뭔가는 존재하고, 철학은 존재가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존재가 나타나는가?" 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오직 존재자(存在者)만 인식했는지 모릅니다. 존재자 배후에서 존재는 존재자를 뒷받침하나, 존재자가 가시적이고, 존재가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존재자만 인식했는지 모릅니다. 철학은 가시적인 존재자 너머 비가시적인 존재를 탐구해야 합니다. 철학은 존재자를 중시했고 존재를 간과했으나, 이건 너무 중대한 착각입니다. 철학은 존재자 배후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철학이 존재자 배후를 들여다본다고 해도, 결국 존재자 배후에는 있는 것(존재)이 있습(존재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생성, 변화, 무보다 존재입니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생성보다 존재입니다.



어쩌면 철학 흐름에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남자들이기 때문에, 철학은 생성보다 존재를 중시하는지 모릅니다. 여자는 아기를 낳고 젖을 먹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여자가 생산적이라고 표현하고 여자와 자연을 비유합니다. 여자가 생산적이기 때문에, 여자가 생태(자연)이기 때문에, 여자와 생성은 잘 어울립니다. 반면, 남자는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남자가 뭔가를 생산한다고 해도, 남자는 직접 생산하지 못합니다. 여자에게는 자궁과 젖가슴이 있고, 여자는 아기와 모유를 직접 생산하나, 남자(의 육체)는 뭔가를 직접 생산하지 못합니다. 남자와 생성, 변화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고 젖을 먹일 때, 여자는 엄마가 됩니다. 엄마가 딸을 낳았기 때문에, 여자는 엄마가 됩니다. 이건 변화입니다. 생성은 변화로 이어집니다. 생명체들이 후손들을 낳기 때문에, 생명 현상이 진화하고, 진화가 변화인 것처럼, 생성은 변화로 이어집니다. 아기 때문에, 여자가 엄마가 되는 것처럼, 아기 이전에, 엄마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성은 무(無)로 이어집니다. 생성, 변화, 무는 함께 어울립니다. 여자가 생태적이기 때문에, 여자, 생성, 변화, 무는 함께 어울립니다. 반면, 비록 남자가 뭔가를 생산하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직접적이지 않습니다. 남자는 도구를 이용해야 합니다.



남자가 도구를 이용하기 때문에, 남자는 그저 간접적으로 생산할 뿐입니다. 남자는 생태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여자와 남자가 함께 섹스한다고 해도, 결국 임신과 출산과 수유는 여자 역할입니다. 가부장 제도는 이것을 악용하고, 돌봄 노동을 착취하고, 여자를 차별합니다. 그래서 돌봄 노동 사회화는 필수적입니다. 돌봄 노동 사회화가 필수적인 것처럼, 여자는 생태적입니다. 남자는 그저 여자에게 정자를 제공할 뿐입니다. 남자가 생태적이지 않기 때문에, 남자는 생성, 변화, 무와 어울리지 못합니다. 남자가 뭔가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자는 생성보다 존재 그 자체에 치중하는지 모릅니다.


남자가 생태적이지 않기 때문에, 남자는 생성보다 존재 그 자체에 치중하는지 모르고, 유명한 철학자들이 남자들이기 때문에, 철학은 생성, 변화, 무보다 존재를 중시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자 배후를 들여다본다고 해도, 결국 존재론에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존재론 철학은 원자(atom)를 강조합니다. 원자는 절대 쪼개지지 않습니다. 원자는 불변입니다. 원자는 근본입니다. 존재가 불변, 근본이기 때문에, 원자는 존재를 아주 강조합니다. 존재론 철학이 있는 것, 불변, 근본을 강조해야 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존재론 철학은 원자를 설정했습니다.



만약 오래 전부터, 유명한 철학자들이 여자들이었다면, 철학이 존재보다 생성, 변화, 무를 중시했을까요? 여기에 대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건 대체 역사 설정입니다. 대체 역사, 사이언스 픽션은 이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고대부터 근대까지, 인류 문명이 가부장 제도가 아니고, 그래서 수많은 여자들이 유명한 철학자들이 되고, 그들이 존재보다 생성, 변화, 무를 중시한다면? 사이언스 픽션은 이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어떤 SF 작가는 이런 상황을 상상했고 소설을 썼는지 모릅니다. 만약 아무도 이것을 쓰지 않았다면, 페미니즘 유토피아 문학에게 이건 흥미로운 소재인지 모릅니다.


캐롤린 머천트는 원자론보다 전체론을 중시합니다. 문자 그대로 자연 생태계, 네이처 에코시스템은 체계, 시스템입니다. 체계, 시스템은 총체적인 것입니다. 원자는 너무 작습니다. 철학은 작은 원자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싸이-파이 채널 드라마 <듄>에서 챤니가 아라키스 생태학 모식도를 그리고 체계를 강조하는 것처럼, 자연 생태계는 체계, 전체적이고 거시적이고 총체적입니다. 어머니 자연을 보세요. 애니메이션 <모아나>에서 테 피티를 보세요. 테 피티가 작은 원자인가요? 아니, 테 피티는 거대하고 웅장합니다. 테 피티는 역동적인 생명 현상을 사방으로 퍼뜨립니다.



비록 테 피티가 그저 상업 애니메이션 설정에 불과하다고 해도, 테 피티는 '자연'이 전체적이고 총체적이고 거시적이라고 웅변합니다. 캐롤린 머천트가 전체론을 설명하는 것처럼, 챤니가 체계를 말하는 것처럼, 테 피티가 생명 현상을 사방으로 퍼뜨리는 것처럼, 이런 사고 방식, 세계관은 너무 작은 원자론과 대립합니다. 물론 원자론 역시 생성과 변화를 중시할 수 있습니다. 이미 고대 그리스 원자론 역시 생성과 변화를 중시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명맥은 끊어졌고, 캐롤린 머천트가 지적한 것처럼, 철학은 생성, 변화, 전체론을 간과합니다. 어쩌면 생태학 SF 장르에게도 이건 흥미로운 소재인지 모릅니다.


생성, 변화, 전체론과 달리, 기계적이고 딱딱한 원자론, 존재론 철학은 존재, 불변, 근본을 중시하나, 여기에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은 바뀝니다. 세상은 계속 바뀝니다. 세상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인류 문명, 자연 환경, 심지어 우주조차 바뀝니다. 중요한 것은 존재보다 생성, 변화, 무입니다. 존재론은 이것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비록 존재론이 이것을 설명한다고 해도, 토끼가 거북을 앞지르지 못하는 것처럼, 거북이 선두를 계속 유지하는 것처럼, 존재론은 뭔가가 바뀌지 않는다고 표현합니다. 거북이 선두를 계속 유지하는 것처럼, 세상은 고정적입니다. 하지만 정말 세상이 고정적인가요?



아니, 인류 문명과 자연 환경과 우주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바뀝니다. 이제까지 세상은 계속 바뀌었고, 앞으로 세상은 계속 바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바뀌는 중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 자체로서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자체로서 존재가 충만하고 불변이고 근본이라면, 어떻게 세상이 바뀔 수 있나요? 그래서 존재보다 무는 훨씬 중요합니다. 여자에게 딸이 없기 때문에, 여자가 딸을 낳고 엄마가 되는 것처럼, 무는 생성과 변화를 설명합니다. 충만한 존재보다 무, 없는 것은 훨씬 중요합니다. 존재가 충만하기 때문에, 존재는 다른 뭔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존재는 고정적입니다.


무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뭔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는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무는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무는 다른 것이 되고, 무는 생성, 변화로 이어집니다. 존재 그 자체는 생성과 변화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존재보다 무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만약 어떤 세계관이 존재보다 무를 중시한다고 해도, 이런 세계관은 변화를 얄팍하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여러 세계관들은 인류 사회를 자연 환경에 귀속하거나, 자연 환경을 인류 사회에 귀속하거나, 인류 사회와 자연 환경을 완전히 가릅니다. 만약 이런 세계관들이 변화를 인정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얄팍한 변화들일 겁니다.



자연 환경에서 인류 사회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많은 야생 동물들처럼, 인간은 동물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 사회는 자연 환경에 속합니다. 하지만 많은 야생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계급 의식을 각성하고 자연 속의 인간 위치를 파악합니다. 인간은 지배 계급이 돌봄 노동들을 착취한다고 깨닫습니다. 인간은 줄무늬 다람쥐와 갑오징어를 대조하고 생물 다양성에 감탄합니다. 얄팍한 세계관들은 이런 공통점들과 차이점들을 간과하고, 지배적인 관념을 미화하고, 저항을 허무하게 포기합니다. 이런 세계관들은 야생 동물 생태를 인류 사회에 단순무식하게 대입하고 성별 역할을 단순무식하게 설명합니다.


얄팍한 세계관들은 우주 멸망을 아주 거창하게 주절거리나, 이런 세계관들은 너무 간단한 지배 계급 세뇌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특히, 세계관이 인류 사회 변화를 설명할 때, 세계관은 기계적인 사고 방식을 경계해야 할 겁니다. 미래 전망에도 무, 생성, 변화는 중요합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는 심쿵심쿵 연인입니다. 두 사람은 근사한 까페에서 저녁 데이트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약속 시간에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근사한 까페에 갑니다. 근사한 까페에서 손님들은 북적거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손님들이 북적거린다고 해도, 아직 장 폴 사르트르는 오지 않았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지각합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지각하기 때문에, 근사한 까페에서 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하지 않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것을 의식합니다. "어머, 장이 없네? 교통이 막히나? 이 둔탱이가 길을 잘못 찾았나? 왜 장이 없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무를 의식합니다. 근사한 까페는 북적거리나, 북적거는 소란 속에서 '무(장 폴 사르트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떠오릅니다. 그래서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여기에 만족하나요? 아니, 시몬 드 보부아르는 생성, 변화를 기대합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장 폴 사르트르가 올 거라고 기대합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미래를 상정합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는 전망이 있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미래를 전망하는 것처럼, 무는 생성, 변화, 미래, 전망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존재와 무는 다릅니다. 사실 존재와 무는 대립합니다. 그 자체로서 존재가 충만하기 때문에, 존재는 변화를 갈구하지 않습니다. 존재가 변화를 갈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는 미래를 전망하지 않습니다. 무는 다릅니다. 무는 뭔가를 받아들입니다. 무가 뭔가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무는 무가 아닙니다. 무는 다른 것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A=A'입니다. 하지만 이건 존재론입니다. A는 A이나, 동시에 A에게는 다른 것(A가 아닌 것)이 되기 위한 가능성, 잠재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A는 A´이 될 수 있습니다.



A=A이고, 동시에 A=A´입니다. 여기에서 A´은 다른 것(A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오직 A=A만 참이라면, A=A´은 나타나지 못할 테고, 생성과 변화 역시 나타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생성과 변화가 나타나지 못한다면, 아무도 미래를 전망하지 못할 겁니다. 반면, A가 A´이 될 때, 우리는 미래를 전망할 수 있습니다. A는 자신을 포기하고 A´이 되어야 합니다. A는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A는 A´이 되어야 합니다. 현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직 현실만 중요하다고 간주하고 비(非)현실을 조롱합니다. 사람들은 비(非)현실이 그저 황당무계한 공상, 허풍, 구라에 불과하다고 조롱합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어떻게 현실이 나타납니까? 그 자체로서 현실이 현실인가요? 현실이 고정적인가요? 현실이 바뀌지 않나요? A=A 공식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A가 충만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현실은 충만하게 존재합니다. 그 차체로서 현실이 충만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현실이 나타나는지 묻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자체로서 현실이 고정적이고 불변이라고 간주합니다. 반면, A=A´ 공식에서 그 자체로서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은 현실이 아닌 것이 됩니다. 비(非)현실은 현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이 아닌 것을 비현실이라고 부릅니다.



[그 자체로서 A는 A가 아니고, 그 자체로서 현실은 현실이 아니고, 그래서 A´(비현실)은 중요합니다.]



A=A´ 공식에서 현실은 비현실이 되고, 비현실 덕분에, 세상은 바뀌고, 우리는 미래를 전망합니다. 비현실은 황당무계한 공상, 허풍, 구라가 아닙니다. 비현실은 생성, 변화입니다. 만약 그 자체로서 충만한 현실이 존재한다면, 충만한 현실은 변화를 절대 추구하지 않을 겁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그 자체로서 자본주의가 존재한다고 지랄지랄하는 것처럼,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자본주의가 영원불멸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여자들을 착취하고, 빈민들을 억압하고, 기후 변화를 저지른다고 해도, 보수 우파 지식인들은 오직 자본주의 만만세만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A=A´ 공식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실은 현실이고, 동시에 현실은 비현실입니다. 비현실은 중요합니다. 문화 예술에서도 비현실은 중요합니다. 문제는 이른바 주류 문학이 비현실을 과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현실에서 주류 문학은 멀리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류 문학과 달리, 사이언스 픽션은 비현실을 직접 제시합니다. 인류 문명은 돌봄 노동 사회화를 추구합니다. 개척 과학자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띄웁니다. 엄마 거대 괴수는 전투 병기들을 몰아내고 환경 오염들을 정화합니다. 돌봄 노동 사회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엄마 거대 괴수는 비현실, 비일상적인 상상력입니다.



현실에서 돌봄 노동 사회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엄마 거대 괴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사이언스 픽션이 황당무계한 공상이라고 조롱합니다. 하지만 문화 예술에서 비현실이 중요한 것처럼, 돌봄 노동 사회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엄마 거대 괴수는 중요하고, 비일상적인 상상력은 중요합니다. 현실에서 우리는 벗어나고, 비현실에서 우리는 현실을 바라보고, 우리는 현실을 바꿉니다. 이건 모든 사람이 사이언스 픽션을 만나고 변화를 수미일관하게 거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현실에 속합니다. 현실 속에서 하드 SF 작가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씁니다.


아무리 사이언스 픽션이 비일상적으로 상상한다고 해도, 현실 속에서 사이언스 픽션은 상상합니다. 현실은 사이언스 픽션과 비현실에 영향을 미칩니다. 현실이 억압적이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과 비현실은 억압적인 존재를 미화할지 모릅니다. 솔직히 많은 SF 팬들은 고정 관념을 돌파하기보다 지배적인 관념을 떠받듭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자본주의 만만세를 부르짖는 것처럼, 많은 SF 팬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떠받듭니다. 다행히 현실에는 무(無)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여자들을 착취하고, 빈민들을 괴롭히고, 기후 변화를 저지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뭔가를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 차별, 빈부 격차, 폭염을 바라보고 자본주의가 이상하다고 깨닫습니다. 보수 우파 지식인들이 자본주의 만만세를 부르짖는 것처럼, 지배적인 관념이 강력하기 때문에, 깨달음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성 차별과 빈부 격차와 폭염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우연히' 깨닫습니다. 비록 깨달음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변화를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사이언스 픽션이 비현실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이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변화를 절대적으로 돕지 못하나, 사이언스 픽션에게는 돕기 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돌봄 노동 사회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엄마 거대 괴수는 변화를 절대적으로 돕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돕기 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근에 코로나 19 사태 때문에, 전국은 난리법석이나, 이건 그저 사소한 난리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코로나 19 사태보다 기후 변화는 훨씬 심각한 재앙일 겁니다. 코로나 19 사태는 3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지 않으나, 기후 변화는 3차 세계 대전을 유발할지 모릅니다. 과학자들은 기후 변화 세상을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고, 그래서 본격적인 기후 변화 세상은 비(非)현실입니다. 환경 아포칼립스들은 비현실, 심각한 기후 변화 세상을 묘사할 수 있습니다.



SF 팬들은 환경 아포칼립스들을 바라보고, 행성급 재앙(비현실)을 현실에 대입하고, 현실을 새롭게 고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 속에서 코로나 19 사태는 그저 사소한 난리에 불과한지 모릅니다. 이건 코로나 19 사태가 가볍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코로나 19 사태는 중대한 위기입니다. 국가 정부는 모든 의료 시설과 병원 시설을 동원하고 방역/치료에 치중해야 합니다. 심지어 국가 정부는 병원들을 국유화해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남한 정부는 병원 시설들을 제대로 동원하지 않습니다. 동원 작업이 자유 시장 경제보다 계획 경제에 가깝고, 남한이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남한 정부에게 사람 목숨보다 자유 시장 경제는 훨씬 중요합니다. 기후 변화 역시 비슷합니다. 전염병 사태보다 기후 변화는 훨씬 심각하나,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별로 떠들지 않습니다. 세계화 자본주의 때문입니다. 세계화 자본주의가 행성급 환경 오염 범죄자이고, 지배 계급 관념이 환경 운동을 가로막기 때문에, 기후 변화는 연이어 심각해집니다. 환경 아포칼립스에서 엄마 거대 괴수는 환경 오염을 정화하고 자연 환경을 보호하나, 이건 비현실입니다. 현실에서 엄마 거대 괴수는 무(無)입니다. 현실에서 엄마 거대 괴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기후 변화에 직접 대처해야 합니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세계화 자본주의는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이렇게 SF 팬들은 새롭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SF 팬들은 돌봄 노동 사회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엄마 거대 괴수를 바라보고 변화를 전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이언스 픽션은 재미있습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어머, 장 폴 사르트르가 없어?"라고 묻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처럼, SF 팬들은 "어머, 현실에서 엄마 거대 괴수가 존재하지 않아?"라고 인식하고, 비현실 덕분에, SF 팬들은 현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 그림 <MOTHRA> 출처: 2jspaleoart,

https://www.deviantart.com/2jspaleoart/art/MOTHRA-796220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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