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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테메레르>에서 로맨스 소설 분위기 본문

SF & 판타지/외계인과 이방인

<테메레르>에서 로맨스 소설 분위기

OneTiger 2019. 12. 20. 20:39

이웃집 영희: (애타는 목소리로 부른다) 철수야!


옆동네 철수: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영희?


이웃집 영희: (철수에게 달려가고 철수를 끌어안는다) 철수야, 보고 싶었어. 나는 너를 정말 보고 싶었어. 하지만 만약 네가 멀리 떠나기 원한다고 해도, 나는 괜찮아.


옆동네 철수: (영희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다) 아니, 이제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나 역시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위 장면은 전형적인 로맨스 장르입니다.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는 서로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멀리 떠나야 합니다. 이웃집 영희는 옆동네 철수를 사랑하나, 만약 옆동네 철수가 떠나기 원한다면, 이웃집 영희는 옆동네 철수를 보낼 겁니다. 영희가 철수를 사랑하기 때문에, 영희는 철수를 보낼 겁니다.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가 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야수가 미녀를 보내는 것처럼, 이웃집 영희는 옆동네 철수를 보낼 겁니다. 이웃집 영희와 달리, 아직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이웃집 영희를 깊이 사랑한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웃집 영희가 옆동네 철수에게 고백했기 때문에, 이제 옆동네 철수는 깨닫습니다.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이웃집 영희를 사랑한다고 깨닫습니다. 오늘부터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는 1일입니다. 오늘부터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는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만약 다른 여자들이 옆동네 철수에게 다가온다면, 이웃집 영희는 "이 남자는 내 남자야!"라고 경계할지 모릅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로맨스 장면입니다. 만약 독자가 로맨스 소설을 읽고 비슷한 장면을 찾는다고 해도, 이건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 이건 전형적인 로맨스 장면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등장인물들이 바뀐다면?



윌리엄 로렌스: (애타는 목소리로 부른다) 테메레르!


테메레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로렌스?


윌리엄 로렌스: (테메레르에게 달려간다) 그래, 테메레르. 나야, 윌리엄이야.


테메레르: (로렌스를 끌어안는다) 로렌스, 보고 싶었어. 나는 당신을 정말 보고 싶었어. 하지만 만약 당신이 공군 조종사보다 해군 함장을 원한다고 해도, 나는 괜찮아.


윌리엄 로렌스: (테메레르의 콧잔등에 자신의 이마를 맞댄다) 아니, 이제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나 역시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만약 이렇게 이웃집 영희와 옆동네 철수가 윌리엄 로렌스와 테메레르로 바뀐다면, 이게 전형적인 로맨스 장면이 되나요? 소설 <테메레르>는 위와 같은 장면을 묘사합니다. 윌리엄 로렌스는 해군 함장입니다. 우연히 윌리엄 로렌스는 드래곤 테메레르를 만납니다. 테메레르는 윌리엄 로렌스가 드래곤 조종사라고 인정하고, 그래서 로렌스와 테메레르는 함께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공군 지휘부는 공군 장교가 테메레르 조종사가 되어야 한다고 결정합니다. 윌리엄 로렌스는 해군으로 복귀하나, 로렌스는 마음이 불편하다고 느낍니다. 공군 장교는 테메레르에게 다가가나, 테메레르는 공군 장교를 거부합니다.


테메레르가 공군 장교를 거부하기 때문에, 윌리엄 로렌스는 테메레르에게 돌아갑니다. 윌리엄 로렌스는 허겁지겁 달려가고, 마침내 윌리엄 로렌스와 테메레르는 감동적으로 재회합니다. 테메레르는 자신이 윌리엄 로렌스를 그리워했다고 말하고, 윌리엄 로렌스는 자신이 테메레르를 원한다고 깨닫습니다. 윌리엄 로렌스는 해군을 포기하고 테메레르와 함께 공군에 들어갑니다. 소설 <테메레르> 초반부에는 이런 줄거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테메레르>가 로맨스 장르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테메레르>는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이 아닙니다. 이건 대체 역사 나폴레옹 전쟁, 드래곤 기사 이야기입니다.



만약 <마스터 앤 커맨더>와 <혼블로워>와 <펀의 드래곤 라이더>가 합친다면, 이런 종합은 <테메레르>가 될 겁니다.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은 여기에 끼어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테메레르>가 전형적인 로맨스 장르가 아님에도,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 초반부는 비슷합니다. 영희x철수 이야기는 전형적인 로맨스 장르이고, <테메레르>는 영희x철수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테메레르>는 전형적인 로맨스 장르가 됩니다. 물론 <테메레르>에서 이런 '로맨스'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는 다른 많은 설정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로맨스'는 존재합니다.


소설 속에서 '로맨스'보다 다른 설정들, 줄거리들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분명히 '로맨스'는 뚜렷한 영역을 확보합니다. 소설 초반부에서 테메레르와 윌리엄 로렌스가 서로를 원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이 인상적인 장면은 소설 후반부에 영향을 계속 미칠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이 '로맨스' 장면이 소설을 관통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테메레르>는 다른 무엇보다 드래곤 기사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혼블로워>와 <테메레르>가 비슷하다고 해도, <테메레르>는 SF 소설, 대체 역사 소설, 사변 소설에 속합니다. 테메레르를 비롯해 드래곤들이 비일상적인 상상력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속에는 비단 윌리엄 로렌스와 테메레르 '커플'만 아니라 다른 많은 드래곤 기사 커플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로맨스 장면, 커플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윌리엄 로렌스와 테메레르가 모두 남자인 것처럼, 성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 공군 장교와 여자 드래곤 역시 커플 분위기를 얼마든지 풍길 수 있습니다. 어떤 독자는 윌리엄 로렌스와 테메레르가 동성 연애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드래곤 기사가 <테메레르>를 관통하고, 기사와 드래곤이 동성 연애이기 때문에, <테메레르>는 퀴어 문학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어떤 독자는 <테메레르>가 퀴어 문학이거나 퀴어 문학과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테메레르>에서 윌리엄 로렌스와 테메레르는 공동 주인공입니다. <테메레르>가 드래곤 기사 소설이기 때문에, 윌리엄 로렌스와 테메레르는 함께 존재해야 합니다. 테메레르 없이, 윌리엄 로렌스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테메레르는 윌리엄 로렌스를 간절하게 원합니다. 심지어 테메레르는 "로렌스는 내 거야!"라고 외칩니다. 이건 연인을 지키기 위한 외침에 가깝습니다. 이웃집 영희가 "철수는 내 남자야!"라고 외칠 때, 테메레르가 "로렌스는 내 거야!"라고 외칠 때, 두 장면은 아주 비슷합니다. 그래서 <테메레르>는 로맨스 소설이 되거나 로맨스 소설과 비슷합니다. <테메레르>는 퀴어 문학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렇게 독자들은 <테메레르>가 로맨스 소설과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독자들은 그들이 로맨스 소설을 읽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독자들은 작가 나오미 노빅을 고려할지 모릅니다. 나오미 노빅은 여자 작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로맨스 장르를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성 차별인지 모릅니다. 로맨스가 가정적이고, 여자가 가정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여자-가정-로맨스를 연결하는지 모릅니다. 로맨스 장르에서 연애-결혼-가정-출산은 당연한 순서, 차례입니다. 결국 로맨스 장르는 가정을 만듭니다. 여자는 가정적입니다. 여자는 육아를 맡아야 합니다.


이런 연결 고리들에는 성 차별, 성 착취가 있습니다. 왜 오직 여자만 육아를 맡아야 하나요? 여자가 아기를 낳기 때문에? 하지만 남자가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해도, 남자는 아기와 함께 얼마든지 놀아줄 수 있습니다. 오직 여자만 아기를 낳는다고 해도, 남자는 모성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뭐야? 이게 무슨 헛소리야? 남자는 돈을 벌어야 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반박할 겁니다. 하지만 왜 오직 남자만 돈을 벌어야 하나요? 아니, 왜 인간이 돈을 벌어야 하나요? 여기에서 '돈'이 무엇인가요? 무슨 상황에서 인간이 돈을 버나요?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인간은 임금 노동자가 되고 돈을 법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우선 목표는 이윤 극대화입니다. 아니, 자본주의에서 유일한 목표는 이윤 극대화입니다. 이윤 극대화 이외에 다른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뒈지든, 여자들이 끔찍한 폭행들을 당하든, 생물 다양성이 대대적으로 감소하든, 자본주의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경제 공황을 일으키고, 기후 변화를 일으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 노동자가 돈을 번다고 해도, 이건 절대 정당하지 않습니다. 임금 노동 제도를 빙자하는 임금 노예 제도는 사라져야 합니다. 임금 노예 제도는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임금 노동 제도를 철폐하고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육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임금 노동 제도가 정당하지 않기 때문에,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가족 역시 정당하지 않습니다. 중산층 가족 전형이 임금 노동 제도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족 전형을 철폐해야 합니다. 가족 전형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수구 꼴통 할배들은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국가가 무너진다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지랄염병하겠으나, 가족 전형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빅토리아 시대 가족 전형을 없애고 공공 육아, 돌봄 노동 사회화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중산층 가족 전형은 성 차별, 성 착취입니다. 여자-가정 연결 고리 역시 성 차별, 성 착취입니다. 이건 그저 개인적이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임금 노동 제도와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은 돌봄 노동을 착취합니다. 이건 착, 취입니다. 이건 /착취/입니다. 중산층 가족 전형이 '착취'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임금 노동 제도와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종종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 차별이 오직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 계급 차별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가족 임금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가족 임금은 헛소리입니다.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족 임금을 운운한다고 해도, 이건 정신 나간 헛소리입니다. 왜 계급 투쟁을 논의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가 망상을 지어내고 헛소리하나요? 프롤레타리아-부르주아 계급 관계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벗어나고 성 착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미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는 성 착취를 파악하기 위한 좋은 기반이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최신 판본 가부장 제도이고, 가부장 제도가 돌봄 노동을 착취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자와 가정을 연결합니다. 로맨스 장르가 가정적이기 때문에, 가정과 여자와 로맨스 장르는 이어집니다.



나오미 노빅이 여자 작가이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테메레르>가 등장인물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로맨스에 치중한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분명히 이건 성 차별적인 해석이나, 독자들이 이런 해석을 비판한다고 해도, <테메레르> 속에는 로맨스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테메레르>가 로맨스 소설과 비슷하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이게 논리적인 해석인가요? 이게 오류가 아닌가요? 어떻게 드래곤 기사 소설이 로맨스 장르가 될 수 있나요? 어떻게 조종사와 드래곤이 퀴어 커플이 되나요? 어떻게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가 비슷할 수 있나요? 이건 엉터리 해석입니다.


하지만 정말 이게 과잉 해석인가요? 이게 엉터리인가요?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유사성이 있습니다. 독자들은 유사성을 이용하고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 노빅이 여기에 동의하나요? 나오미 노빅이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가 비슷하다고 인정하나요? 어쩌면 나오미 노빅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두 가지가 비슷하다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로렌스는 내 거야!"는 아주 의미심장한 대사입니다. 나오미 노빅은 이 대사를 의도적으로 썼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뭔가를 해석할 때, 우리는 그것 그 자체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 사이에 연결 고리가 있는 것처럼, 우리는 연결 고리를 찾습니다. 물론 연결 고리는 뭔가를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소설 <테메레르>는 로맨스 장르를 직접 가리키지 않습니다. 연결 고리가 뭔가를 직접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해석들은 다양해집니다. 어떤 독자들은 <테메레르>가 로맨스 장르와 비슷하다고 느끼나, 또 다른 독자들은 두 가지가 비슷하지 않다고 느낄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테메레르>가 로맨스 장르보다 <혼블로워>에 가깝다고 느낄 겁니다. 해석들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해석들이 다양하다고 해도, 로맨스 장르에는 전형적인 재회 장면이 있습니다. 어쩌면 나중에 독자들은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가 비슷하지 않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해석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있고, 이건 사실입니다. 뭐라고 독자들이 느끼고 해석들이 바뀌든, 이건 바뀌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로맨스 작가는 전형적인 재회 장면을 쓰는 중인지 모릅니다. 로맨스 작가가 <테메레르>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윌리엄 로렌스와 테메레르처럼, 로맨스 소설 속에서 두 연인은 감동적으로 재회할 겁니다.



그래서 해석보다 해석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은 훨씬 중요할 겁니다. 만약 독자들이 로맨스 장르를 절대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독자들이 <테메레르>를 열심히 읽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를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독자들이 로맨스 장르를 알고 로맨스 장르에 친숙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고 방식들 속에서 로맨스 장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영희x철수 이야기와 <테메레르>를 연결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들이 <마스터 앤 커맨더>를 알지 못한다면, 독자들은 <마스터 앤 커맨더>와 <테메레르>가 비슷하다고 절대 연결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SF 독자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면, SF 독자는 소설 줄거리를 어느 정도 기대하고 짐작할 겁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세대 우주선일 테고, 우주선에는 사회 구조가 있을 겁니다. 우주선 사회는 작은 문명입니다. 생태 구역들에서 심각한 위기는 나타날 테고, 꼬마 지구로서 생태 구역들은 환경 오염을 경고할 겁니다. 이렇게 SF 독자는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요? 현실 속에 전제 조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전형, 공식입니다. SF 독자가 전형, 공식을 알기 때문에, SF 독자는 소설 줄거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건 FPS 게임 스크린샷입니다. 하지만 SF 독자들은 생태학 SF 공식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짐작은 틀릴지 모릅니다. 우주 탐사 소설에서 생태 구역들은 무너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아무 사고 없이,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외계 행성에 도착할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전형, 공식은 존재하고, SF 독자는 이런 전형, 공식을 우주 탐사 장르에 폭넓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독자가 SF 공식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독자가 SF 공식에 친숙하지 않다면, 독자들의 사고 방식들 속에서 SF 공식이 자리를 잡지 못했다면, 독자는 공식을 적용하지 못할 테고 소설 줄거리를 짐작하지 못할 겁니다. 중세 독자가 우주 탐사 소설을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중세 독자는 줄거리를 짐작하지 못합니다.


중세 사회에 전제 조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세 사회에는 SF 전형이 없습니다. 서구 근대화 이후, SF 전형은 나타납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20세기 이후 SF 전형입니다. 아무리 고대 사람들이 거대한 방주가 수많은 생물종들을 태운다고 상상했다고 해도, 거대한 방주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다릅니다. 거대한 방주는 신의 기적으로 이어지나,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은 진보, 과학, 계몽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중세 독자는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짐작하지 못합니다. 20세기 이후, SF 독자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SF 독자는 SF 공식을 위한 전제 조건, 서구 근대화를 인식해야 할 겁니다.



그 자체로서 소설 같은 창작물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실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창작물들은 나타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창작물 그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지 찾기 원합니다. 현실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직 창작물 그 자체만 파악하지 못함에도, 이게 불가능함에도, 사람들은 이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사람들이 이게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현실은 뒷전이 되고, 창작물은 우선이 됩니다. 하지만 중세 독자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에 관심을 기울이기 원한다고 해도, 이게 불가능한 것처럼, 중요한 것은 창작물보다 현실입니다.


현실이 우선이기 때문에, 해석 그 자체보다 "어떻게 해석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이 나타나는가?"라는 물음은 훨씬 중요할 겁니다. 이 블로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블로그에는 여러 해석들이 있습니다. 어떤 해석들은 너무 황당무계하고, 사람들은 이런 해석들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깐풍기가 깜풍기가 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런 오타를 너그럽게 용서할지 모릅니다. 이건 그저 실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바이오스피어 우주선과 생태계 시뮬레이션 게임 사이에 연결 고리가 존재하나요? 생체 우주선과 동물원이 비슷할 수 있나요? 어떻게 수경 재배 실험실의 여자 식물학자와 어머니 자연이 가까워질 수 있나요?



왜 이런 황당무계한 해석들이 존재하나요? 이런 해석 '배후'에 아무 의도가 없나요? 이런 해석들을 위한 전제 조건들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해석하거나 해석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배후'를 파악해야 합니다. 소설 <테메레르> 해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 노빅은 여자 작가야. 여자들은 가정적이고,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로맨스 장르를 훨씬 좋아해. 그래서 <테메레르>와 로맨스 소설은 비슷해." 그 자체로서 이런 해석이 존재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런 해석 '배후'에는 해석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여자들은 가정적이다)에서 배후, 전제 조건은 가부장적인 편견입니다.


돌봄 노동 착취에서 이런 편견은 비롯할 겁니다. 가부장적인 편견 없이, 독자들은 <테메레르>와 로맨스 장르가 비슷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독자들은 <테메레르>를 해석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현실은 가부장 제도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가부장적인 현실 속에서 독자들은 <테메레르>를 해석합니다. 나오미 노빅은 여자 작가이고, 가부장적인 편견은 독자 사고 방식에 크게 영향을 미칠지 모릅니다. 독자들은 해석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을 주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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