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소설 속에서 화자가 맡은 역할 본문
소설에는 화자, 이야기를 전달하는 주체가 있습니다. 이건 소설이 드러내는 가장 커다란 특징들 중에서 하나입니다. 소설에는 화자가 있고, 화자는 서사를 전개합니다. 소설을 읽기 위해 독자는 화자와 만나야 합니다. 사실 화자 없이 독자는 소설을 읽지 못합니다. 화자가 서사를 전개할 때, 독자는 그걸 읽을 수 있습니다. 독자가 화자를 피하기 원한다고 해도, 그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건 완전히 불가능할 겁니다. 언제나 화자의 시각에서 독자는 소설을 읽어야 할 겁니다. 소설 작가는 여러 시점들을 제시합니다. 1인칭 시점, 3인칭 시점, 전지적인 시점.
하지만 작가가 무슨 시점을 선택하든, 결국 화자의 시각에서 독자는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어슐라 르 귄이 쓴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독자는 쉐벡의 관점을 따라가야 합니다. <빼앗긴 자들>은 장편 소설이고 여러 등장인물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등장인물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그들의 속마음들을 직접 표현하지 않습니다. 기나긴 서사에서 오직 쉐벡만 자신의 속마음을 직접 드러냅니다. 쉐벡은 세계를 관찰하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독자들은 오직 그것만 따라갈 수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을 읽을 때, 독자는 쉐벡을 우회하고 다른 관점으로 세계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빼앗긴 자들>에서 쉐벡은 소설 속의 세계와 독자를 이어주는 유일한 연결 통로입니다. 다른 연결 통로들은 없습니다. 독자는 다른 연결 통로를 이용해 소설 속의 세계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독자는 거의 전적으로 쉐벡의 관점에 의지해야 합니다. 이건 독자가 쉐벡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부장적인 독자들은 쉐벡을 비난하겠죠. "여자와 남자가 평등하게 살아야 해? 이게 무슨 헛소리야!" 이렇게 가부장적인 독자들은 주장할 테고 쉐벡을 믿지 않을 겁니다. 가부장적인 독자들은 쉐벡이 헛소리를 늘어놓는다고 여길 겁니다. 쉐벡이 화자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부장적인 독자들은 화자를 거부하고 동시에 <빼앗긴 자들>을 거부하겠죠.
쉐벡이 유일한 연결 통로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쉐벡을 비난하고 <빼앗긴 자들>을 거부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빼앗긴 자들>을 읽고 싶다면, 독자들은 쉐벡의 관점을 이용해야 합니다. <빼앗긴 자들>을 비난하고 싶다고 해도, 독자가 쉐벡의 관점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독자는 소설을 읽지 못하겠죠. 소설을 읽지 못한다면, 독자는 소설을 비난하지 못할 겁니다. 종종 어떤 독자들은 어떻게 장편 소설이 오직 한 사람의 속마음만을 보여줄 수 있는지 물을 겁니다. 기나긴 서사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 속마음을 직접 드러낸다면, 기나긴 서사는 균형을 잃을지 모릅니다. 오직 한 사람의 시각만이 기나긴 서사를 모두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기나긴 서사와 한 사람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기나긴 서사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대 소설들에서 이런 3인칭 시점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드미트리 글루홉스키가 쓴 <메트로 2033>은 꽤나 방대합니다. 이 소설은 방대한 던전 탐험입니다. 복잡하고 어둡고 위험하고 방대한 러시아 지하철은 던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소설 주인공 아르티옴은 수많은 역들을 들리고, 수많은 통로들을 지나고,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메트로 2033>에서 다른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속마음들을 직접 드러내지 않습니다. 설사 등장인물이 속마음을 말한다고 해도, 그건 대사입니다.
드미트리 글루홉스키는 다른 등장인물들의 의식들을 직접 파헤치지 않습니다. 오직 아르티옴의 관점에서만 독자는 다른 등장인물들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아르티옴이 있기 때문에 독자는 소설 <메트로 2033>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러시아 지하철이 방대한 던전이라고 해도, 아무리 방대한 던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 중에서 오직 아르티옴만 유일하게 속마음을 직접 드러냅니다. 아르티옴은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입니다. 이런 창문 없이 독자는 소설을 읽지 못합니다. 만약 창문이 깨지거나 지저분하다면, 독자는 세계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메트로 2033> 같은 소설에게는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삐뚤어지거나 잘못 판단한다면, 세계를 들여다보는 시각 역시 삐뚤어지거나 잘못될 겁니다. 만약 독자가 화자를 비판할 수 있다면, 독자는 소설을 비판할 수 있습니다. 화자가 삐뚤어지고, 세계를 들여다보는 시각이 삐뚤어진다고 해도, 독자는 그걸 알아차리고 비판적으로 소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지하철 던전을 여행하는 동안, 파쇼주의자들은 아르티옴을 붙잡습니다. 아르티옴은 죽을 위기에 처했죠. 그때 아르티옴은 공산주의 빨치산들을 만납니다.
공산주의 빨치산들은 파쇼주의 세력을 교란하고, 아르티옴을 구출하고, 멀리 달아납니다. 공산주의 빨치산들 덕분에 아르티옴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파쇼주의자들을 괴롭히는 중이라고 밝힙니다. 강력한 파쇼주의 제국과 달리, 공산주의 빨치산들은 아주 미약합니다. 그들은 파쇼주의 제국과 대등하게 맞서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제국을 괴롭힙니다. 빨치산들이 제국과 싸우고 아르티옴을 구했기 때문에 아르티옴은 그들이 고맙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믿습니다. 문제는 아르티옴이 공산주의 사상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빨치산들이 사상 철학을 논의할 때, 아르티옴은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평생 동안 아르티옴은 변증법이나 유물론을 들어본 적이 없겠죠. 아르티옴은 공산주의 사상을 알지 못합니다. 공산주의 사상을 알지 못함에도, 아르티옴이 공산주의 빨치산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까요? 여기에 왜곡이나 편견이 없을까요? <메트로 2033>을 읽을 때, 어떤 독자들은 아르티옴을 비판할지 모릅니다. 아르티옴이 공산주의 사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아르티옴이 빨치산들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어떤 독자는 아르티옴이 빨치산들을 너무 선량하게 묘사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떤 독자는 아르티옴이 빨치산들을 너무 낭만적으로 묘사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르티옴은 빨치산들에게 고마워하고 그들이 친근하다고 느낍니다. 분명히 그들은 아르티옴을 구출했고, 무사히 배웅했고, 여행의 안녕과 축복을 기원했습니다. 비참하고 폭력적이고 위험한 지하철 던전에서 공산주의 빨치산들은 한 줄기 서광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다를지 모릅니다. 어쩌면 지하철 던전 빨치산들은 아주 음흉하거나 사악할지 모릅니다. 아르티옴은 오직 그들의 긍정적인 측면만 봤을 뿐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부정적인 측면은 훨씬 클지 모릅니다.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크다고 해도, 지하철 던전 빨치산들이 무자비한 악당들이라고 해도, 아르티옴은 그걸 알지 못합니다. 아르티옴은 그걸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반공 독자들은 아르티옴이 멍청하게 공산주의 빨갱이들을 믿는다고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반공 독자들이 비난한다고 해도, 소설 <메트로 2033>의 내용은 바뀌지 않습니다. 반공 독자들은 소설 <메트로 2033>을 비난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소설을 읽을 때, 그들은 계속 아르티옴의 관점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런 사례와 달리, 어떤 사례에서 심지어 독자들은 아예 소설 화자를 비판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소설 <드래곤 라자>는 기나긴, 정말 기나긴 여정입니다. <드래곤 라자>가 짧다고 말하는 독자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소설 <반지 전쟁> 이후, 중세 유럽 판타지들은 장대한 서사를 쏟아내기 시작했고, <드래곤 라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장대한 서사 속에서 소설 화자는 오직 후치 네드발뿐입니다. 다른 주연 등장인물들은 절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영도 작가는 절대 다른 등장인물들의 의식들을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드래곤 라자>가 아주, 아주 기나긴 여정이라고 해도, 독자는 오직 후치 네드발의 관점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오직 후치 네드발만 아주 기나긴 여정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영도 작가는 칼 헬턴트, 샌슨 퍼시발, 네리아, 엑셀핸드, 아프나이델, 제레인트 같은 등장인물들의 관점들을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오직 후치 네드발의 관점으로만 그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후치를 의심하고 소설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자는 무엇이 진실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후치는 이루릴 세레니얼이 정말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후치는 이루릴 세레니얼이 예쁘다고 직접 생각합니다. 독자가 이걸 의심하고 반박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이건 엉터리야! 이루릴은 예쁘지 않아! 이루릴은 그저 평범한 엘프 처자에 불과해! 후치는 눈에 뭔가가 들어갔거나 눈이 삐었을 거야!"
일반적으로 독자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후치는 이루릴 세레니얼이 예쁘다고 말했고, 따라서 이루릴은 예쁩니다. 독자는 그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독자가 후치를 의심하고 소설을 비판하고 싶다면, 독자는 논리적인 근거를 들이대야 합니다. 채만식이 쓴 소설 <치숙>에서 소설 화자는 제국주의를 동경하고 사회주의를 비난합니다. <치숙>을 읽을 때, 독자는 소설 화자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논리적인 근거를 들이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 속에서 사회주의는 제국주의에 치열하게 저항했습니다. 이미 19세기부터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 급진적인 사회 민주주의 모두 제국주의에 치열하게 저항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제국주의와 가장 치열하게 싸운 세력은 현실 사회주의(소비에트 연방)였습니다. 유럽이나 미국보다 소비에트 연방 사상자들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여전히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와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중입니다. 현실은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논리적인 근거를 들이댈 수 있고 소설 화자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치숙>은 의도적으로 그런 근거를 유도합니다. <치숙>은 일부러 엉터리 소설 화자를 제시합니다. <치숙>은 독자가 소설 화자를 비판하기 원하고 독자가 소설 화자를 믿지 않기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독자들은 소설 화자를 믿을지 모릅니다.
이런 독자들은 소설 화자가 올바르게 세계를 파악한다고 간주할 겁니다. 이런 독자들은 소설 화자의 관점을 따라갈 겁니다. 독자들은 제국주의가 옳고 사회주의자 삼촌이 나쁘다고 판단하겠죠. 소설은 논설문이나 설명문이 아닙니다. 소설을 해석하는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어쩌면 제목처럼 <치숙>은 정말 사회주의자 삼촌을 비난하는 소설일지 모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치숙>을 해석하는 절대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문학 평론가들은 <치숙>이 풍자적이라고 말하나, 절대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치숙>은 정말 제국주의를 동경하고 찬양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독자들은 얼마든지 <치숙>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현실이 그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은 <치숙>과 소설 화자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반면, 독자들이 후치 네드발을 의심하고 <드래곤 라자>를 비판할 수 있을까요? "후치는 틀렸어! 후치는 두 눈이 삐었어! 이루릴은 절대 예쁘지 않아!" 어떤 독자들은 이루릴이 그저 평범한 처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독자들이 논리적인 근거를 들이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루릴 세레니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루릴 세레니얼은 소설 등장인물이고 이루릴의 외모는 허구입니다. 아무도 이루릴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이루릴을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영도 작가조차 이루릴을 본 적이 없을 겁니다.
설사 <드래곤 라자>가 중세 유럽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적인 로맨스 소설이라고 해도, 이루릴이 우드 엘프 아가씨가 아니라 현실적인 여자 대학생이라고 해도, 문제는 바뀌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로맨스 소설 역시 창작물이고 허구입니다. 현실적인 여자 대학생의 외모 역시 허구입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후치를 의심하고 싶다고 해도, 독자들은 이루릴의 외모가 평범하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들이대지 못합니다. 글자들로서 이루릴의 외모는 존재합니다. 독자들은 이루릴이 예쁘지 않다고 반박하지 못합니다.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칼 헬턴트가 정말 허허 웃는 평범한 중년 아저씨일까요? 글쎄요.
샌슨 퍼시발이 엑셀핸드를 묘사할 때, 샌슨은 엑셀핸드가 고주망태 추레한 드워프라고 묘사합니다. 후치는 그런 묘사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샌슨의 관점에서 엑셀핸드는 고주망태 추레한 드워프입니다. 후치나 칼 헬턴트나 이루릴이나 아프나이델의 관점은 다를 겁니다. 이렇게 화자가 바뀔 때마다, 세계를 바라보고 묘사하는 시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후치는 이루릴이 우아하다고 말하고 칼 헬턴트가 평범한 중년 아저씨라고 말하나, 진실은 다를지 모릅니다. 문제는 독자가 논리적으로 그걸 증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후치 네드발을 믿어야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독자는 후치 네드발을 의심할 수 있으나, 어떤 부분에서 독자는 후치 네드발을 믿어야 합니다. 후치가 칼 헬턴트의 외모를 묘사할 때, 독자는 후치를 믿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런, 젠장. 이건 엉터리야! 칼 헬턴트는 초절정 꽃중년일 거야! 후치 같은 촌구석 소년이 초절정 꽃중년을 알아볼 수 있겠어?" 이렇게 독자는 반박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후치는 어느 정도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칼 헬턴트가 평범한 중년 아저씨라고 후치가 말할 때,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반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칼 헬턴트 본인조차 반박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후치는 다른 등장인물들을 이용해 어느 정도 객관성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물론 칼 헬턴트가 평범한 중년 아저씨라고 후치가 말할 때, 다른 등장인물들은 마음 속으로 반박했을지 모릅니다. 그저 후치와 갈등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직접 반박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사실 칼 헬턴트가 초절정 꽃중년임에도, 등장인물들은 그저 후치에게 고개들을 끄덕였을 뿐인지 모릅니다. 칼 헬턴트의 외모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칼 헬턴트가 대륙 최고의 미남이라고 해도, 그것은 크림슨 드래곤이 깨어나는 사건과 아무 관계가 없죠. 후치는 칼 헬턴트의 외모를 잘못 묘사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소설이 객관성을 보장하고 싶다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관점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이 쓴 소설 <쥬라기 공원>은 숱한 등장인물들의 관점들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소설 주인공 앨런 그랜트를 비롯해 엘리 새틀러, 존 해먼드, 도널드 제나로, 데니스 네드리, 로버트 멀둔 같은 등장인물들의 관점들을 연이어 보여줍니다. 심지어 <쥬라기 공원>은 어른이 아닌 팀 머피의 관점 역시 보여줍니다. 독자는 숱한 관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아이언 말콤은 자신의 관점을 직접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아이언 말콤의 관점을 직접 서술하지 않습니다.
아이언 말콤은 가장 말들이 많은 등장인물입니다. 아이언 말콤은 계속 쥬라기 공원을 비판하고 비판하고 다시 비판합니다. 독자는 아이언 말콤의 속마음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사실 아이언 말콤은 등장인물보다 목소리에 가깝습니다. 아이언 말콤은 작가의 목소리에 가깝죠. 그래서 독자들은 아이언 말콤의 목소리를 통해 <쥬라기 공원>을 읽습니다. <쥬라기 공원>은 숱한 관점들을 보여주나, 아이언 말콤의 목소리는 다른 관점들을 장악합니다. 결국 아이언 말콤의 목소리는 가장 중요한 화자가 됩니다. <쥬라기 공원>을 읽는 동안, 독자는 아이언 말콤의 까탈스러운 목소리를 계속 의식해야 합니다.
만약 아이언 말콤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쥬라기 공원>이 훨씬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쥬라기 공원>은 그럴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완전히 객관적인 창작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소설이 완전히 객관적일 수 있을까요? 소설이 특정한 관점을 완전히 배제하고 완전히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하겠죠. 소설은 객관적인 지점을 향해 수렴할 수 있으나, 절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할 겁니다. 화자 없는 소설을 쓰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겁니다. 등장인물들이 화자가 되지 않는다면, 작가는 화자가 되어야 할 겁니다.
킴 스탠리 로빈슨이 쓴 소설 <붉은 화성>은 숱한 관점들을 보여줍니다. 사회 구조를 중시하는 소설로서 <붉은 화성>은 특정한 관점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서로를 비판하거나 긍정합니다. 그런 비판들과 긍정들은 많고 많습니다. <붉은 화성>은 등장인물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균형을 잃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붉은 화성>은 꽤나 건조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말? 정말 <붉은 화성>이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을까요? 사실 이 소설은 꽤나 당파적입니다. 아무리 <붉은 화성>이 여러 관점들을 골고루 제시한다고 해도, 독자들은 특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붉은 화성>은 그런 목소리를 직접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건이 특정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독자들은 특정한 목소리가 있다고 의식할 수 있습니다. 작가 킴 로빈슨은 사건을 특정한 방향으로 전개하고, 그래서 (특정한 목소리가 직접 떠들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들은 특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설이 객관적으로 여러 화자들을 골고루 보여준다고 해도, 소설에는 어떤 특정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종종 그런 목소리는 아주 희미하나, 그렇다고 해도 그건 목소리가 없다는 뜻이 아닐 겁니다. 작가 역시 인간이고, 인간은 완전히 객관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계속 소설 화자를 의식해야 합니다. 작가는 소설 화자와 비슷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소설 화자를 조롱하거나 비판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소설 화자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소설 화자를 바라보는 시각들은 다양하고, 이 게시글이 설명한 방법들 이외에 다양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걸 모두 설명하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중요한 것은 소설 화자가 소설을 전개하는 커다란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작가들은 소설 화자를 이용해 아예 독자의 혼을 빼놓을 수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소설 <로봇 비전>은 그런 사례입니다.
<로봇 비전>은 소설 화자를 아주 영특하게 이용합니다. 만약 <로봇 비전>이 소설이 아니라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나 게임이었다면, 느낌은 완전히 바뀌었을 겁니다. <로봇 비전>은 SF 설정과 소설 화자를 멋지게 결합했습니다. 물론 비단 <로봇 비전>만 아니라 다른 장르 소설들 역시 화자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모리스 르블랑이 쓴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 역시 소설 화자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모리스 르블랑은 다소 꼼수를 부립니다. 이와 달리, <로봇 비전>은 SF 설정을 이용해 꼼수에서 벗어납니다. <로봇 비전>은 어떻게 SF 설정과 소설 화자가 만날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