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SF 생태주의

소설 <로드>의 안락하고 편안한 암울함 본문

SF & 판타지/디스토피아, 아포칼립스

소설 <로드>의 안락하고 편안한 암울함

OneTiger 2017. 5. 20. 20:00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암울한 소설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우리나라 번역본 표지를 보면, 온갖 찬사와 함께 암울하고 어둡고 막막하다는 비평들이 실렸습니다. <로드>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그 중에서 특히 핵전쟁 아포칼립스처럼 보입니다. 세상은 항상 어둠침침하고, 매일 눈이 내리고, 날씨는 혹독하고, 모든 게 시커멓게 불탔습니다. 어디에도 밝은 구석은 없습니다. 주인공은 어느 남자와 소년이고, 두 사람은 멸망한 세상을 정처없이 떠돕니다. 그들은 아주 원시적이고 단순한 것에만 집중합니다. 먹고, 자고, 싸고, 걷고, 도망치고, 기타 등등. 그게 전부입니다.


이 소설은 오직 그런 것들만 이야기합니다. 종종 남자는 고차원적인 생각을 떠올리지만, 그런 생각들은 허무에 다다르곤 합니다. <로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것들만 이야기합니다. 희한하게도 왜 세상이 멸망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남자와 소년은 멸망한 세상을 떠돌지만, 그들은 왜 세상이 멸망했는지 이야기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핵전쟁 아포칼립스처럼 보이지만, 사실 핵전쟁이 터지지 않았을 수 있어요. 혹시 모르죠. 저기 외로운 산에서 거대한 스마우그가 날아왔고, 포악한 화룡이 세상을 몽땅 불태웠는지 모르죠.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이 참 안락하고 편안한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그리 어둡거나 암울하거나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왜 세상이 멸망했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이 멸망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남자는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지만, 누구에게 책임을 묻거나 죄를 묻지 않습니다. 그냥 세상 자체가 암울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네, 아주 편리한 생각입니다. 누구에게 죄를 묻지 않기 때문에 남들에게 욕을 먹을 이유가 없어요. 누군가에게 죄를 묻는 사람은 그 대상에게 욕을 먹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 운동가들이 대기업들을 비판하면, 대기업은 환경 운동가들이 빨갱이라고 욕합니다. 극우파들은 기후 변화 이론이 빨갱이들의 음모이고, 환경 운동가들도 전부 빨갱이라고 욕합니다. 우리나라처럼 색깔 논쟁이 심한 나라에서는 그런 경향이 훨씬 더합니다. 환경 운동가들은 친북 좌파로 몰리기 일쑤입니다. 참 재미있는 현상이죠. 김정은이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대기업을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나요? 북한이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나요? 기후 변화 이론이 친북 좌파라니, 하하.



이 세상에서 착취나 오염이나 멸종이나 학살은 그냥 벌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잘못을 저지르고, 그 잘못 때문에 애꿎은 생명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대기업들이 미세 먼지를 뿜고 온실 가스를 내보내고 폐기물을 버리면, 환경이 오염되고 (사람을 비롯한) 수많은 생물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그래서 환경 운동가들은 대기업이나 토건족을 규제해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게 바로 착취와 오염과 멸종과 학살을 막기 위한 순리이고 방법입니다. 환경 운동가들은 욕을 많이 먹고 힘들고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는 중이지만, 그런 싸움만이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멸망이나 멸종이 눈 앞에 닥쳤다면, 누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는지 비판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소설 <로드>는 아무도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냥 상황이 암울하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이 굉장히 안락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냥 암울한 상황만 느끼면, 그걸로 땡입니다. 누구에게 욕을 먹지 않습니다. 누명을 쓰지 않고 변명할 필요가 없고 극단적으로 행동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도 욕하지 않으면, 그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아요. 너무 편하고 쉽죠.



아, 그렇다고 해서 <로드>가 아무 의미도 없는 소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도 코맥 매카시의 글을 좋아합니다. <국경을 넘어>는 최고의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로드> 역시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고, 정말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매카시가 미국 문학계만 아니라 문학계 전반에 정말 큰 흔적을 남긴 것 같습니다. 책 표지에 적힌 그 수많은 찬사들은 그냥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 무조건 강대국이나 대기업을 비판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순수하게 멸망 그 자체에만 주목해도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로드>가 훌륭한 작품이라는 것과 <로드>가 암울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비평입니다. 저는 <로드>가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뭐 그리 암울하거나 막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진짜 암울하고 막막한 일들이 거대한 기득권 때문에 벌어지고, 저에게는 그걸 다루는 이야기들이 훨씬 어둡게 들립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