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소마>가 말하는 현실과 발터 벤야민의 현실 본문
"현실. 당신이 그걸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필립 딕은 현실을 정의했습니다. 동시에 이런 문구로서 비디오 게임 <소마>는 시작합니다. 왜 <소마>가 필립 딕의 문구를 첫머리에 배치했을까요? 이 게임이 현실을 인정하라고 강조하기 때문일 겁니다. 현실은 현실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부인하기 원한다고 해도,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소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가깝습니다. 이 게임에는 사이버펑크 요소들이 많고, 기반적인 설정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사이버펑크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모두 우울합니다.
사이버펑크에서 사람들은 가상 세계에 빠지고 정체성을 잃습니다. 사이버펑크에서 수많은 (전자) 정보들은 인간들을 대신합니다. 인간은 그저 걸어다니는 살덩이 정보에 가깝죠. 사이버펑크에서 인간은 쉽게 희망을 찾지 못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인류 문명은 무너집니다. 인류 문명이 무너진다면, 당연히 그건 암울하고 절망적이겠죠. 종종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고 인류 문명이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소설 <최후의 인간> 역시 인류 문명이 무너진 이후 또 다른 지적 존재들이 나타날 거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종말은 희망적이지 않죠.
필립 딕이 쓴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인류 문명은 엄청난 재난을 맞이했고, 부자들은 지구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쓸쓸하고 더러운 폐허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쓸쓸한 지구에서 사람들은 어떤 공감 장치에 매달리고 여러 감정들을 느낍니다. 그런 감정이 진짜일까요? 정말 공감 장치를 이용해 사람들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게 그저 착각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가짜 동물들이 판치는 것처럼, 가짜 감정들이 판치지 않을까요? 여기에는 사이버펑크 요소가 있습니다.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는 사이버펑크 요소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합쳤습니다. 이건 암울하고 진절머리가 나는 현실이나,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가야 합니다.
비디오 게임 <소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주인공이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당황스러움일 겁니다. 여러 사이버펑크들이 그런 것처럼, <소마>에서 게임 주인공은 묻습니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누구지? 세상에, 내가 정말 나인가?" 게임 플레이어는 게임 주인공과 함께 낯선 심해를 돌아다닙니다. 그러는 동안 당황스러움은 무기력함과 좌절로 바뀔 겁니다. 게임 주인공은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기 원할 겁니다. 하지만 게임 주인공이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현실은 현실입니다. 동전 던지기 게임에서 졌다면, 게임 주인공은 패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을 말할 때, 현실에는 어느 정도 자포자기가 있습니다. "야, 야,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해. 포기해."
물론 <소마>는 희망을 아예 배제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점에서 <소마>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암울한 현실은 사라지지 않고,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래서 필립 딕은 현실이 혼란스럽다고 말했을 테고 숱한 혼란스러운 소설들을 썼을 겁니다. 그래서 <소마>는 첫머리에 아무도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썼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인정할 겁니다. 현실은 암울합니다. 현실은 절망적입니다. 현실은 혼란스럽죠.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암울하고 절망적이고 혼란스러운 현실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어쩌면 결국 이런 감성은 허무에 닿을지 모릅니다. 현실이 계속 암울하고 절망적이고 혼란스럽다면, 결국 그건 허무에 닿을 겁니다. 그래서 온갖 사이버펑크들, 디스토피아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허무를 조장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개똥밭에 구른다고 해도 이승이 좋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매일 개똥밭을 구른다면, 사람들은 세상이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온갖 사이버펑크들, 디스토피아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그렇게 이 세상이 추악하고 사람들이 발버둥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거보다 세상이 훨씬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이런 허무는 훨씬 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세상이 부정적일까요? 정말 현실이 무조건 힘들고 어려울까요? 분명히 객관적인 조건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이걸 인정하고 굴복해야 할까요? 문학 평론 서적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에서 작가 김중혁은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권태와 허무라고 말했습니다. 계절들이 계속 똑같이 바뀌기 때문에 김중혁은 이게 권태와 허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레이첼 카슨은 계절들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자연에 치유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은 반복적인 굴레가 아닙니다. 이건 살아있는 순환입니다. 그래서 레이첼 카슨은 자연의 영속적인 리듬을 말했습니다.
칩코 운동가 이트와리 데비는 숲과 초원에 샤크티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자연은 계속 번성하고, 무한하고 살아있는 순환에서 자연을 돌보는 인도 여자들은 샤크티를 느꼈습니다. 사실 자연은 번성하고, 멸종하고, 다시 번성하고, 다시 멸종하고, 또 다시 번성합니다. 어떤 관점에서 이건 굴레입니다. 하지만 어떤 관점에서 이건 영속적인 리듬이고 위대한 주술입니다. 김중혁과 이동진은 허무와 권태를 말했으나, 레이첼 카슨과 이트와리 데비는 영성과 주술을 말했습니다. 영성과 주술을 봤기 때문에 레이첼 카슨과 이트와리 데비는 투쟁해야 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자연을 파괴하기 때문에 레이첼 카슨과 이트와리 데비는 투쟁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다르게 분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투쟁하고 현실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건 현실을 바꿀 수 있겠죠. 그건 객관적인 조건을 바꿀 수 있을 겁니다. 오히려 객관적인 조건이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저항해야 할 겁니다. 우리가 무조건 굴복해야 하는 이유는 없을 겁니다. 사실 현실에는 기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짝사랑하는 남자에게서 고백을 들었을 때, 여자는 현실이 정말 기쁘고 아름답다고 느낄 겁니다. 여자와 남자가 감미롭게 키스하고 황홀하게 섹스할 때, 두 연인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겠죠. 두 연인은 정말 현실을 붙잡고 싶을 겁니다. 현실이 두 연인에게서 달아날 때, 두 연인은 말할 겁니다. "현실아, 멈추어라!" (누군가는 이게 괴테가 쓴 희곡 <파우스트>의 최고 대사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현실을 멈추기 바라는 것처럼, 현실에는 기쁘고 아름답고 놀라운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건 무조건 현실이 아름답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글프게도 분명히 현실에는 불가항력적인 비극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현실에서 우리는 놀랍고 위대한 마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계절들이 바뀌고, 자연 생태계가 진화하고, 인간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여자와 남자는 황홀하게 섹스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적인 리듬은 권태가 아니라 황홀함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황홀함을 찾고 황홀함을 지키기 원할 수 있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연인이 된다면, 다른 어려움들이 공격한다고 해도, 두 연인은 공격들에 저항하기 원할 겁니다. 저항하기 원할 때, 두 연인은 다시 현실을 멈추어야 할 겁니다. 왜 현실이 힘들고, 왜 문제들이 생겼고, 무엇이 원인인지 파악하고 싶다면, 두 연인은 현실을 멈추고 현실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두 연인은 현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죠.
"현실아, 멈추어라!" 사진 작가들은 이런 주문을 좋아합니다.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사진 작가들은 현실을 멈추기 원합니다. 사진 작가가 카메라 셔터 단추를 누를 때, 사진은 현실을 담습니다. 사진 작가들은 놀라운 현실을 포착합니다. 그런 사진을 봤을 때, 사람들은 현실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현실을 살아가나, 사진 작가들은 놀라운 순간들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화가들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화가가 식탁 위의 바구니와 바구니 속의 과일들과 빵을 그린다면, 다들 그림이 멋지다고 말할 겁니다. 현실 속의 과일들과 빵보다 그림 속의 과일들과 빵은 훨씬 인상적일 수 있습니다. 화가가 어떤 특정한 순간을 포착했고 거기에 자신의 사상과 감성을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정물화를 감상한 이후, 사람들은 현실 속의 과일들과 빵을 다르게 바라볼지 모릅니다.
물론 사진 기술은 역동적이고 빠른 장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할 수 있습니다. 물총새가 재주넘기로 물고기를 낚을 때, 용수철처럼 치타가 영양을 쫓을 때, 수많은 물방울들을 뿌리며 혹등고래가 웅장하게 솟구칠 때, 사진 기술은 놀라움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회화는 오랜 시간을 요구하고, 그래서 회화보다 사진 기술은 나을 수 있죠. 사진 기술이 물총새의 재주넘기를 포착할 때, 우리는 현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발터 벤야민은 사진 기술에 주목했는지 모릅니다. 현실을 바라보는 방법들은 다양합니다. 현실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도, 우리가 무조건 거기에 굴복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기쁘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위해 우리는 투쟁할 수 있습니다. 레이첼 카슨과 이트와리 데비처럼, 사랑을 지키는 두 연인처럼, 우리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저항하고 싶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문제가 비롯했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멈추고 분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문명이 선형적으로 흘러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정말 인류 문명이 선형적일까요? 역사가 선형적일까요? 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때, 많은 서구 지식인들은 절망했습니다. 그들은 인간 이성이 절망적이라고 말했죠. 그들은 인류 문명이 선형적으로 흘러가고 그래서 세계 대전이 터졌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죠. 1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숱한 사회주의자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했습니다. 그런 투쟁들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구 지식인들은 그저 인류 문명이 선형적으로 흘러간다고 믿었을 뿐입니다. 식민지 수탈들을 비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인류 문명이 선형적으로 흘러간다고 믿었을 뿐입니다. 서구 지식인들이 현실을 멈추고 재구성했다면, 그들은 세계 대전을 논리적으로 분석할 수 있었겠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현실을 멈추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현실을 멈출 때, 우리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바라볼 수 있고, 그걸 유지하고 싶다고 소망할 수 있고,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할 수 있습니다. 필립 딕과 <소마>는 아무도 현실을 부인하지 못한다고 말했으나, 아름다운 순간들을 위해 우리는 현실을 멈추고 저항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