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기시감>과 게이트 우주선 속의 작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본문
※ 이재창이 쓴 소설 <기시감>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소설 <기시감>은 어떻게 인공 지능이 자아와 세계를 인식하는지 이야기합니다. <기시감>은 기술적 특이점을 묘사하는 소설입니다. 하지만 작가 이재창은 오직 인공 지능에게만 몰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시감>은 인공 지능보다 지구환이나 하늘 기관이나 게이트 우주선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우주를 바라본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시감>은 우주를 바라보는 동경을 담았습니다. 만약 이 소설에서 그런 동경이 없어진다면, 소설 분량은 꽤나 줄어들 겁니다. 어떤 독자들은 우주를 바라보는 동경이 군더더기라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왜 기술적 특이점을 묘사하는 소설이 구태여 우주를 바라봐야 할까요? 인공 지능과 우주가 무슨 관계를 맺었을까요? 여러 우주 탐사 소설들이나 스페이스 오페라들처럼, 인류가 우주에 진출한다면, 인공 지능 우주선은 아주 유용할지 모릅니다. 기술적 특이점은 우주 항해에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겠죠. 승무원들이 냉동 수면에 빠진다고 해도, 항법 인공 지능은 우주선을 조종할 수 있겠죠. 그래서 <기시감>이 로가디아와 게이트 우주선을 이야기했을까요? 그런 이유는 없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인공 지능과 상관없이, 작가는 우주 항해를 멋지게 그리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아득한 우주는 SF 작가들을 자극합니다.
우주에 인류 문명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를 동경할 수 있습니다. 녹색과 빨간색은 보색입니다. 빨간색 덕분에 녹색은 더욱 두드러지게 보일 수 있죠. 우주 항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SF 소설을 쓰고 읽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문명인들입니다. 사실 현대 문명을 접하지 못한다면, SF 소설을 쓰거나 읽거나 평가하지 못할 겁니다. SF 소설은 현대 문명(서구적인 근대화, 자본주의, 산업 혁명)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현대 문명을 파악할 수 있을 때, 작가는 SF 소설을 쓰고 독자는 SF 소설을 읽을 수 있겠죠. 문제는 숲 속에서 우리가 숲 전체를 쉽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문명 속에서 문명인이 문명을 고찰할 수 있을까요? 그건 좀 어려울 겁니다.
문명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다면, 인간은 문명에게서 거리를 벌려야 합니다. 인간은 문명이 미치지 못하는 장소를 찾고 거기에서 문명을 바라봐야 합니다. 심해, 사막, 고산, 극지, 동굴 등은 그런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원대한 장소는 우주일 겁니다. 거기에는 인류 문명이 없고, 우주에서 인간은 또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우주에서 문명인은 더 이상 문명인이 아닙니다. 그런 신비하고 적막한 감성 때문에 SF 작가들은 우주를 동경할 겁니다. 다른 이유들 역시 있겠으나, 신비하고 적막한 감성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겠죠. 분명히 <기시감>은 어느 정도 그런 로망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기시감>은 기술적 특이점과 함께 우주 항해를 이야기할 겁니다. 그래서 기술적 특이점에 크게 관심이 없는 독자 역시 <기시감>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거대한 우주선, 수많은 사람들, 우주속 속의 사회 구조, 우주선 생활을 보조하는 각종 첨단 기술들, 놀라운 타키온 항해. 하지만 타기온 엔진을 가동하는 동안, 게이트 우주선은 기이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장교들과 병사들, 민간 과학자들 모두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지휘 체계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아비규환이 펼쳐집니다.
이건 소규모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게이트 우주선은 일종의 소규모 사회입니다. 기이한 실종 사건이 게이트 우주선을 강타했기 때문에 사회는 무너졌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거대한 우주선이 소규모 사회가 될 수 있다면, 우주 탐사 소설 역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 될 수 있겠죠. 여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이 야만적인 폭력을 보여주는 것처럼, <기시감> 역시 그런 상황들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아비규환에서 성 폭행은 빠지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무력한 소녀를 폭행합니다.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들은 이런 성 폭력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기시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는 섹스에 굶주린 동물이고, 그래서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남자는 섹스하고 싶어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해요. <기시감> 역시 그런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게 정말일까요? 정말 남자가 섹스에 굶주린 동물일까요? 모든 남자가 섹스에 환장하는 짐승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게이트 우주선에서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원했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약탈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성향과 세계관과 사상과 철학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행동합니다. 남자의 본질은 섹스에 굶주린 미치광이가 아닙니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이런 본질을 결정하고 싶어합니다. 생물적인 본질이 존재할 때, 권력자들은 약자들을 차별할 수 있습니다. 흑인은 흑인이라는 생물적인 본질을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흑인이 자신의 신체를 유전 공학으로 뜯어고치지 않는다면, 흑인은 절대 니그로이드라는 생물적인 본질을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흑인이 똑똑하고, 재주가 좋고, 많은 돈이 있다고 해도, 흑인은 흑인입니다. 생물적인 본질은 태생적이고, 따라서 생물적인 본질에서 벗어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생물적인 본질은 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생물적인 본질이 낙인이 될 때, 아무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토마스 맬서스 같은 지식인은 이런 생물적인 본질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건 편협한 차별에 불과합니다. 토마스 맬서스는 노동자들이 우둔하고 짐승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마스 맬서스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많이 준다면 노동자들이 더 많이 섹스하고 더 많이 아이들을 낳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불어난 피지배 계급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정말 섹스에 굶주리고 무분별하게 아이를 낳는 짐승일까요? 왜 맬서스가 노동자들을 개무시했을까요? 지배 계급을 옹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맬서스주의는 권력의 나팔수죠.
성 폭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원래 남자가 섹스에 굶주렸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회학자들은 사회 구조가 평등할수록 성 폭행이 줄어든다고 주장합니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더 많은 권력을 차지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그저 여자들을 종속적인 존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입니다. 가부장적인 편견 때문에 남자들은 여자들을 차별하고 폭행합니다. 지배적인 관념은 남자들을 편들고 여자를 남자에게 얽매이는 존재로서 만듭니다. 생물적인 본질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남자들(을 장악한 가부장적인 편견)은 생물적인 본질을 들이댑니다. "어쩌겠어? 남자는 섹스에 굶주렸어. 여자는 수동적이야. 남자는 여자를 덮쳐야 해."
생물적인 본질을 들이댈 때, 억압적인 사회 구조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습니다. 그게 태생적이기 때문에. 원래 그게 그렇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남자들이 공격적으로 섹스하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여자들이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폭력은 사라지고, 오직 생물적인 낙인만 남습니다.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이런 생물적인 본질과 낙인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합니다. <기시감>은 어떨까요? <기시감> 역시 그런 편협한 차별을 아무 비판 없이 묘사합니다. <기시감>은 성 폭력을 묘사하나, 왜 성 폭력이 발생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시감>을 비롯해 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에게 생물적인 낙인을 비판해야 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소설은 설명문이 아니고 논설문이 아닙니다. 소설은 그저 현실을 부분적으로 반영할 뿐입니다. 소설 작가에게 현실을 완전히 파악해야 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사실 그건 불가능하죠. 어떻게 소설 작가가 현실을 아주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겠어요. 문제는 소설을 읽는 우리의 사고 방식입니다. 현대 문명에는 생물적인 낙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따라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읽은 이후, 독자들은 아주 쉽게 생물적인 낙인들을 머릿속에 떠올릴 겁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들은 그런 생물적인 낙인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차별을 조장하는 사회 구조입니다. 사회 구조가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자꾸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에, 소설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삐뚤어집니다. 그런 시각은 또 다른 왜곡을 부르고, 그렇게 우리는 왜곡들을 재생산합니다. 심지어 지식인들들은 이걸 부추깁니다. 책을 좀 많이 읽는다고 자랑하는 블로거들이나 유튜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역시 인간의 본질과 생물적인 낙인을 아무렇지 않게 떠듭니다. 이런 부정적인 재생산을 막고 싶다면, 우리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동시에 소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우리가 평등한 사회를 만든다면, 소설 역시 성 폭행을 아무 생각 없이 묘사하지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