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새로운 환경과 노동 역할, 사회 관계, 심리 본문
소설 <바다의 노동자>는 크게 세 부분들로 나뉩니다. 세 부분들 중에서 두 번째 부분은 제목 '바다의 노동자'와 가장 잘 어울립니다. 험준한 해안에서 소설 주인공 질리아가 온갖 육체 노동들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좌초한 선박에서 엔진을 건지기 위해 소설 주인공 질리아는 험준한 해안 생활을 극복해야 합니다. 해안에서 질리아는 수많은 어려움들을 거칩니다. 이런 과정은 왜 소설 제목이 바다의 노동자인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질리아는 비단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생존자입니다. 질리아가 커다란 문어에게 잡혀갈 때, 소설 <바다의 노동자>는 무인도 생존 소설 같습니다.
소설 제목은 바다의 노동자보다 '바다의 생존자'가 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빅토르 위고는 <로빈슨 크루소>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지 모르나, <바다의 노동자>가 거친 자연 속에서 소설 주인공이 살아남는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독자는 <로빈슨 크루소>와 <바다의 노동자>의 두 번째 부분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생존 소설로서 <로빈슨 크루소>와 <바다의 노동자>를 비교한다고 해도, 이건 무리가 아닐 겁니다. 질리아가 혼자 노동과 생존을 감당하는 것처럼, 사실 생존자로서 로빈슨 크루소 역시 혼자 노동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질리아는 똑같이 생존자, 노동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로빈슨 크루소보다 질리아는 훨씬 외롭습니다. <바다의 노동자> 두 번째 부분에는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거친 해안 지역에서 질리아가 혼자 노동하고 생존하기 때문에, 질리아에게는 대사가 없습니다. 세계적인 대문호로서 빅토르 위고는 온갖 것들을 묘사하고 설명하고 표현하고 찬양하고 비판하나, 노동자이고 생존자인 질리아는 떠들지 않습니다. 질리아는 과묵하게 노동하고 생존합니다. 빅토르 위고는 육체 없는 화자가 되고 열심히 떠드나, 소설 주인공은 오직 행동만으로 말할 뿐입니다. 질리아가 떠들고 싶다고 해도, 거친 해안 지역에는 대화 상대가 없습니다. 질리아는 그저 하늘을 올려다보고 "목이 마르다. 물이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릴 뿐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는 프라이데이와 떠들 수 있으나, <바다의 노동자>에서 질리아는 아무와도 떠들지 못합니다. 어쩌면 질리아가 혼자 노동하고 생존하기 때문에, <바다의 노동자>는 고된 노동과 생존을 강조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만약 여러 사람들이 함께 생존한다면, 그들은 노동 역할들을 분담할 테고, 노동들은 상대적으로 쉬워질 겁니다. 노동들이 상대적으로 쉬워진다면, <바다의 노동자>는 노동과 생존이 고되다고 강조하지 못할 겁니다. 소설 <신비의 섬>에서 노동과 생존은 고되지 않습니다. 노동과 생존이 힘들다고 해도, 무인도 생존자들은 지치지 않습니다. 그들이 동료들과 즐겁게 일하기 때문입니다. 동료들 때문에, 무인도 생활은 안락한 유토피아 같습니다.
쥘 베른은 무인도 생존자들을 이용해 유토피아를 꾸립니다. 물론 이건 제한적인 유토피아입니다. 이건 그저 19세기 서구 백인 남자 지식인을 위한 유토피아에 불과합니다. 쥘 베른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묘사하나, 이런 공동체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무인도 생존자들은 작은 문명을 이룩하나, 여자는 이런 과업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여자는 그저 아기를 낳고 아기를 키우고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보조적인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작은 무인도 문명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소녀, 아가씨, 아줌마, 할머니, 아무도 없습니다. <신비의 섬>에서 비단 성 차별만 아니라 인종 차별 역시 문제입니다.
흑인은 그저 백인 시타바리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흑인이 자발적으로 백인들을 떠받든다고 해도, 이건 그저 노예 근성에 불과합니다. 소설 <신비의 섬>은 무인도 생존자들이 유토피아를 이룩한다고 이야기하나, 이건 오직 19세기 서구 백인 남자 지식인만을 위한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소설 <신비의 섬>에 여러 한계들과 단점들이 있다고 해도, 분명히 <신비의 섬>은 이상적인 공동체를 그립니다. <바다의 노동자>가 이상적인 공동체를 그리기 원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소설 주인공이 훌륭하게 생존한다고 해도, 1인 문명은 공동체가 되지 못할 겁니다. 1인 문명은 사회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독자가 사회 관계들을 싫어한다고 해도, 독자가 <바다의 노동자>를 읽고 일탈을 느낀다고 해도, 사회 속에서 독자는 살아가야 합니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노동 역할들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혐오합니다. 어쩌면 어떤 독자들은 1인 문명이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아니면 이브와 아담처럼, 어떤 독자들은 커플 문명이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영화 <블루 라군 (푸른 산호초)>은 이런 커플 문명을 보여줍니다.
소설 <트리피드의 날>에서 소설 주인공 남자가 근사한 여자와 함께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동안, <트리피드의 날> 역시 이상적인 커플 문명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트리피의 날>이 안락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라고 비판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1인 문명과 커플 문명이 이상적이라고 해도, 결국 우리는 사회적인 존재이고, 우리는 사회적인 관계들을 보고 싶어합니다. 아무리 낯선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고 해도, 여기에는 사회적인 관계들이 있을 겁니다. 자연 환경이 낯설기 때문에, 사회적인 관계들은 새롭게 바뀔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설 <신비의 섬>에서 배경 무대는 무인도일 겁니다.
앤디 위어가 쓴 <마션>에서 소설 주인공은 정말 낯선 환경과 마주칩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달리, <마션>에서 소설 주인공은 지구를 벗어나고 외계 행성으로 나갑니다. 무인도보다 외계 행성이 훨씬 낯선 환경이기 때문에, 외계 행성에서 사회적인 관계들은 훨씬 새롭게 바뀔 겁니다. 소설 <마션>에서 소설 주인공은 낯선 화성 풍경과 마주칩니다. 화성에서 소설 주인공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열심히 식물들을 키우고, 뚝딱뚝딱 주거지들을 짓고, 주변 환경을 탐사합니다. 외계 불모지에서 소설 주인공이 노동하고 생존하기 때문에, 소설 <신비의 섬>이 그러는 것처럼, <마션>은 어떻게 문명이 시작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사회적인 관계들이 없습니다. 소설 주인공이 지구 사람들과 농담 따먹기한다고 해도, 여기에는 노동 역할 분담이 없습니다. 제프리 랜디스가 <태양 아래 걷다>를 쓴 것처럼, 1인 생존자는 사회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돌아보기 원한다면, 인간은 사회에서 벗어나고 혼자 지내야 할 겁니다. 그래서 1인 생존 이야기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1인 생존 이야기에는 이런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사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혼자 지내지 못합니다. 심지어 연극 <닫힌 방>이 타인들 속에서 인간이 자신을 의식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회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돌아봐야 할지 모릅니다.
연극 <닫힌 방>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타인들은 지옥이다."입니다. 그래서 많은 관객들은 <닫힌 방>이 부조리한 인간들과 갈등들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전부가 아닐 겁니다. 타인들이 서로 의식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이야, 나는 정말 멋있어." 이렇게 옆동네 철수가 거울을 보고 떠든다고 해도, 옆동네 철수는 자신이 정말 멋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이건 그저 혼잣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옆동네 철수가 거울에 자신을 비추지 않는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가 "어머, 철수야. 너는 정말 멋있어."라고 말한다면, 옆동네 철수는 홍조와 함께 슬쩍 미소를 지을 겁니다.
옆동네 철수가 거울에 자신을 비춘다고 해도, 이웃집 영희가 칭찬했기 때문에, 옆동네 철수는 이웃집 영희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거울에 자신을 비출 겁니다. 이웃집 영희가 타인이 되기 때문에, 타인이 바라보기 때문에, 타인들이 사회 관계를 이루고 이런 사회 관계들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의식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서 흑인은 노예가 아닙니다. 흑인이 비참한 노예가 된다면, 사회 관계들이 노예 제도 사회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닫힌 방>이 '닫힌 방'이라는 낯선 공간, 낯선 장소, 낯선 환경을 제시하는 것처럼, 낯선 환경에서 우리는 사회 관계들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습니다.
소설 <마션>과 달리, 존 발리가 쓴 <화성의 왕궁에서>는 새로운 사회 관계들을 보여줍니다.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 화성 탐사 대원들은 생존자들이 됩니다. 화성 연구 기지가 무너졌기 때문에, 외계 행성에서 탐사 대원들은 살아남아야 합니다. <화성의 왕궁에서>는 바이오펑크와 외계 생태계를 보여주나, 동시에 소설 속에서 새로운 사회 관계들, 새로운 노동 역할들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심지어 어떤 생존자는 여자들이 '자원'이라고 말합니다. 여자와 남자는 똑같이 노동할 수 있습니다. 여자보다 남자 근력이 훨씬 강하다고 해도, 여자 역시 노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절대 아기를 낳지 못하고 아기를 몸으로 먹이지 못합니다.
오직 여자만 아기를 낳을 수 있습니다. 화성에 아기를 위한 적당한 먹거리가 없다고 해도, 여자는 자신의 몸(젖)으로 아기를 먹일 수 있습니다. 외계 행성에 갓난아기를 위한 먹거리가 없다고 해도, 여자는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 있습니다. 오오, 포유류는 위대합니다. 심지어 불모지 행성에서조차 여자는 생명을 먹입니다. 사실 포유류(Mammalia)는 남자(수컷)보다 여자(암컷)를 가리킵니다. 수많은 남자(수컷)들은 젖을 먹이지 못하고, 이런 남자(수컷)들은 포유류(Mammalia)라는 학명을 대표하지 못합니다. 여자(암컷)들은 학명 포유류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화성에서 인간 여자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인다면, 외계인들은 "아하~, 그래서 인간은 포유류구나!"라고 무릎을 칠 겁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포유류 암컷들은 젖을 키웠을 겁니다. 주변 환경이 가혹하다고 해도, 모유 덕분에, 포유류는 아기를 키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자들은 특별합니다. 이렇게 여자의 몸은 특별합니다. 그래서 화성 생존자는 여자가 '자원'이라고 말했을 겁니다. 하지만 어떤 여자 생존자는 발끈합니다. 아무리 여자의 몸이 특별하다고 해도, 여자의 몸이 '자원'인가요? 이건 가부장적인 편견일 겁니다. 이른바 21세기 문명 사회는 가부장 문화이고, 가부장 문화에서 여자의 몸은 가부장 문화를 위한 자원이 됩니다. 가부장 문화는 임산부가 여자보다 생체 인큐베이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들에서 가부장 문화는 엄마가 반드시 모유를 먹여야 한다고 강요합니다.
이런 상황들에서 엄마는 가부장적인 강요를 쉽게 거부하지 못합니다. 엄마가 인간보다 수유 기계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가부장 문화는 엄마가 인간보다 두 다리로 걸어다니는 젖소라고 간주합니다. 엄마는 정말 젖소 부인이 됩니다. 21세기 문명 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폭력과 억압과 차별을 쉽게 느끼지 못할지 모릅니다. 이미 우리가 21세기 가부장 사회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여자들 역시 노예 근성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어떤 여자들은 여자가 생체 인큐베이터, 수유 기계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노예 근성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옥타비아 버틀러는 <블러드 차일드>를 쓰지 않았을 겁니다.
반면, 화성 환경은 낯설고, 화성 환경은 21세기 가부장 사회를 훨씬 강조하거나 타파할 수 있습니다. 화성에서 생존자들이 성별 역할들을 분담하는 동안, 독자는 새로운 사회 관계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런 작은 문명에서 인구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노동 역할 분담들과 사회 관계들을 파악하기는 훨씬 쉽습니다. 이런 작은 문명은 사회학 실험을 위한 좋은 도구인지 모릅니다. 사회학 실험이 심리 묘사들에 주목하는 것처럼, 새로운 사회 관계들은 새로운 감정들로 이어질 겁니다. 낯선 환경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감정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설 <화성의 왕궁>에서 화성 생존자들은 새로운 문명을 이룩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새로운 문명을 이룩하지 않는다고 해도, 낯선 환경은 사회 관계들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은 새로운 감정들을 낳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똑같은 김밥들을 먹는다고 해도, 집안보다 소풍 장소에서 김밥은 훨씬 맛있습니다. 소풍 장소에서 친구들과 함께 우리가 떠들고 김밥을 먹는 동안, 새로운 환경(소풍 장소)은 사회 관계들(우정과 신뢰)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은 새로운 감정들을 낳습니다. 그래서 소풍 김밥은 특별히 맛있습니다. 소풍 김밥은 그저 조야하고 유치한 사례에 불과할지 모르나, 소풍 김밥은 왜 비경 탐험 소설에서 심리 묘사가 중요한지 반증합니다.
비경 탐험 소설들은 주연 등장인물들을 낯선 환경 속에 집어넣습니다.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로운 노동 역할들과 새로운 사회 관계들은 새로운 심리들로 이어질 겁니다. 단편 소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서문에서 어슐라 르 귄은 자신이 심리 묘사를 중시한다고 밝힙니다.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는 비경 탐험입니다. 주연 등장인물들은 낯선 외계 식생을 탐구합니다. 왜 어슐라 르 귄이 비경 탐험 소설을 이용해 심리 묘사를 언급하나요? 낯선 환경과 새로운 역할들이 인간 심리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이르지 네트르발이 <스틱스>를 쓴 것처럼, 낯선 장소, 낯선 상황, 새로운 역할들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심리를 추측해야 합니다.
만약 단편 소설 <스틱스>가 비경 탐험이 아니었다면, 옥신각신 말다툼과 논의는 다소 흥미를 잃었을지 모릅니다. 비경 탐험 소설들과 달리, 애석하게도 여러 외계 개척 게임들은 이런 심리 묘사들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산소 미포함>과 <림월드> 같은 개그 만발 게임들부터 <언클레임드 월드>와 <에이븐 콜로니> 같은 훨씬 진지한 게임들까지, 많은 비디오 게임들은 외계 개척을 보여줍니다. 20세기 후반에 이런 게임들은 많지 않았으나, 이제 게임 플레이어들은 많은 외계 개척 게임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게임들에는 자세한 심리 묘사들이 없습니다. 이런 게임들에서 심리 묘사는 그저 숫자나 단어나 짧은 문장에 불과합니다. '심리'는 가시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심리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외계 개척 게임들은 새로운 장소를 제시하나, 애석하게도 여기에는 구체적인 심리 묘사가 없습니다.]
심리는 추상적입니다. 우리는 추상적인 표현(언어)을 이용해 심리를 파악합니다. 그래서 외계 개척 게임보다 비경 탐험 소설은 훨씬 심리 묘사에 익숙합니다. <언클레임드 월드>는 여러 대사들을 보여주나, 그렇다고 해도 <언클레임드 월드>는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에 미치지 못합니다. 어슐라 르 귄은 <언클레임드 월드>가 단순한 비경 탐험이라고 지적할지 모릅니다. 이건 비디오 게임보다 소설이 반드시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비디오 게임에는 한계들이 있고, 게임 플레이어들이 SF 소설들을 읽는다면, 게임 플레이어들은 이런 한계들을 채울 수 있습니다. (거꾸로 소설이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비디오' 게임을 이용해 가시적인 측면을 충족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