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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왜 고생물학자가 트리세라톱스보다 결혼 문제를 고민하는가 본문

SF & 판타지/비경 탐험

왜 고생물학자가 트리세라톱스보다 결혼 문제를 고민하는가

OneTiger 2019. 9. 6. 19:13

로버트 소여가 쓴 <멸종 (공룡과 춤을)>은 공룡 SF 소설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고생물학자입니다. 고생물학자는 시간 여행 장치를 타고, 백악기로 돌아가고, 공룡들을 연구합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는 시간 여행과 공룡 멸종입니다. 고생물학자로서 소설 주인공은 어떻게 공룡들이 멸종했는지 고민합니다. 로버트 소여가 <멸종>을 쓰는 동안, 로버트 소여는 공룡 멸종 문제를 쓰기 원했을 겁니다. 독자가 <멸종>을 읽는다면, 독자는 이 소설이 공룡 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멸종>은 주구장창 오직 공룡들만 떠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설 주인공이 고생물학자라고 해도, 솔직히 소설 주인공에게 공룡들보다 결혼 생활은 훨씬 중요한 고민 같습니다. 소설 주인공은 아내를 사랑하나, 결혼 생활은 위태롭습니다. 언제든 아슬아슬한 결혼 생활은 파경에 이를지 모릅니다. 소설 주인공은 이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백악기 열대 밀림에서, 인적이 절대 없는 무덥고 울창한 밀림에서 소설 주인공은 아내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괴로워하고, 절망적으로 탄식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너무 괴로워하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이 너무 처절하게 탄식하고 가식을 벗어던지고 진심을 온 몸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 이 장면은 가장 인상적입니다.



어라, 하지만 이건 다소 이상합니다. 제목처럼, <멸종>은 공룡 SF 소설입니다. 영어 제목은 <한 시대의 종말 End of an Era>입니다. 이건 공룡 시대가 끝난다는 뜻입니다. 영어 제목은 공룡 멸종이 핵심 소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한국어 번역 제목 역시 '멸종'일 겁니다. (영어 원작과 한국어 번역 판본에서) 소설 표지 그림은 티라노사우루스입니다. 소설 제목과 소설 표지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멸종>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공룡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고생물학자입니다. 고생물학자는 시간 여행 장치를 타고 백악기로 돌아갑니다. 독자가 이런 줄거리를 읽는다면, 독자는 이 소설에서 공룡 멸종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소재라고 느낄 겁니다.


하지만 소설 <멸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공룡 멸종 문제가 아닙니다. 백악기 열대 밀림에서 소설 주인공이 아내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신에게 탄원하고, 절망적인 진심을 드러내는 동안, 이 장면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됩니다. 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분명히 소설 <멸종>에서 이 장면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소설 후반부에서 소설 주인공은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소설 주인공은 절망적인 비탄에 빠지지 않습니다. 지독한 괴로움 속에서 소설 주인공은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결혼 생활 때문에, 소설 주인공은 몸부림칩니다. 백악기 밀림에서 소설 주인공이 아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동안, 소설 주인공은 훨씬 괴로워합니다.



이렇게 소설 <멸종>에서 아슬아슬한 결혼 생활은 상당히 중요한 소재입니다. 소설 <멸종>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 주인공은 결혼 생활과 아내 문제를 계속 이야기합니다. 이건 너무 이상합니다. 왜 공룡 SF 소설에서 결혼 생활과 아내 문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나요? 심지어 어떤 관점에서 결혼 생활과 아내 문제는 공룡 멸종 논의를 밀어내는 것 같습니다. <멸종>은 <오만과 편견>이 아니고 <안나 카레니나>가 아닙니다. 소설 <오만과 편견>과 <안나 카레니나>에서 결혼 생활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과 <안나 카레니나>가 위선적인 상류 사회, 어긋나는 인간 관계, 허울과 가식과 욕망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재들은 쉽게 결혼으로 이어집니다. 인생에서 결혼에게 무슨 가치가 있나요? 여자와 남자에게 결혼이 똑같은 의미인가요? 상류층과 하층민에게 결혼이 똑같이 경사가 되나요? 인간이 오직 사랑만으로 물질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나요? 결혼이 축복인가요, 아니면 굴레인가요? 여자와 남자가 결혼한다면, 평생 동안 여자와 남자가 오직 서로만 바라봐야 하나요? 결혼 이후, 여자와 남자가 다른 사랑을 만난다면, 다른 사랑이 정말 진정한 사랑이라면, 결혼이 깨져야 하나요? 결혼이 진정한 사랑을 가로막아야 하나요? 아니, 사랑이 반드시 결혼으로 이어져야 하나요? 연애와 섹스, 사랑과 결혼이 동일한가요? 왜 이것들이 동일해야 하나요? 왜 결혼이 사회 제도가 되어야 하나요?



<오만과 편견>과 <안나 카레니나>는 이런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과 <안나 카레니나>에는 티라노사우루스가 없고, 트리세라톱스가 없고, 하드로사우루스 부류가 없습니다. 두 소설 속에는 위선적인 상류 사회, 어긋나는 인간 관계, 허울과 가식과 욕망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결혼 문제로 쉽게 이어집니다. 반면, 티라노사우루스와 트리세라톱스와 하드로사우루스는 결혼 문제로 쉽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트리세라톱스를 바라보는 동안, 사람들은 위태로운 결혼 생활을 고민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소설 <멸종>에서 주인공 고생물학자는 결혼 생활을 고민합니다.


무더운 백악기 밀림에서 고생물학자는 트리세라톱스보다 아내를 훨씬 간절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이 장면에서 <안나 카레니나>보다 <멸종>은 결혼 문제를 훨씬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레프 톨스토이는 세계적인 대문호이나, <안나 카레니나>는 어느 정도 품위와 정도를 지킵니다. <멸종>은 훨씬 솔직하고 개방적입니다. 소설 주인공 고생물학자가 몸부림치고 결혼 문제를 절절하게 토로하는 동안, 많은 기혼 독자들은 여기에 공감할지 모릅니다. 인생의 동반자는 소중합니다. 인생의 동반자는 이른바 '잡힌 물고기'가 아닙니다. 언제든 인생의 동반자는 떠날 수 있습니다.



"나는 잡힌 물고기에게 미끼를 던지지 않아." 밀당 관계가 끝날 무렵, 많은 연인들은 (농담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냅니다. 고백이 연애 관계로 이어지고 짝사랑이 '내 것'이 된다면, 사람들은 연인이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유명한 영화 대사처럼,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이 바뀔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랑은 영원불멸하지 않습니다. 열정적인 결혼 생활이 식는다면, 인생의 동반자는 결혼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소설 <멸종>에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적어도 소설 주인공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고생물학자에게 이것(위태로운 결혼 생활)이 중요한 문제가 되나요? 왜 공룡 SF 소설에게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나요? 왜 무더운 백악기 밀림에서 공룡 SF 소설이 트리세라톱스보다 사랑스러운 아내를 절절하게 토로하나요? 고생물학자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소설 주인공은 고생물학자이나, 고생물학자 이전에 소설 주인공은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소설 주인공은 다른 인간을 사랑합니다. 소설 주인공은 고생물학자이나, 고생물학은 소설 주인공의 전부가 아닙니다. 분명히 소설 주인공은 열정적인 공룡 매니아이고 열정적인 고생물학자입니다. 소설 주인공에게 공룡 멸종 문제는 중요한 고민입니다.



만약 소설 주인공이 이혼한다고 해도, 고생물학자로서 소설 주인공은 계속 살아갈 겁니다. 하지만 소설 주인공은 오직 고생물학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고생물학은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인생에는 오직 한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비단 소설 주인공 고생물학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오직 한 가지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오직 한 가지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소설 <드래곤 라자>가 "인간은 단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은 단수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훨씬 풍부하고,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우리 인생이 풍부하고,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에게는 고생물학 이외에 다른 것들 역시 중요합니다.


심지어 고생물학보다 어떤 것들은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만약 소설 주인공이 아내를 붙잡을 수 있다면, 소설 주인공은 현장 학술 탐사들을 때려치울지 모릅니다. 소설 주인공이 고생물학자라고 해도, 소설 주인공에게 백악기 화석보다 아내는 훨씬 중요할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이 단수가 아니기 때문에, 고생물학자에게 고생물학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소설 주인공이 고생물학자보다 인간이기 때문에, 소설 <멸종>에서 결혼 문제는 가장 처절한 고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단수가 아니기 때문에, 공룡 SF 소설은 오직 공룡 문제만 고민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풍부하고,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공룡 SF 소설은 공룡 문제와 함께 다른 많은 것들을 고민합니다.



소설은 인생을 담습니다. 소설은 인생을 모방하고 반영합니다. SF 소설 역시 소설입니다. SF 소설은 미래학 서적이 아니고 자연 과학 논문이 아닙니다. SF 소설, 미래학 서적, 자연 과학 논문은 겹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사이에는 교집합이 있습니다. 하지만 SF 소설은 미래학 서적 및 자연 과학 논문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미래학 서적 및 자연 과학 서적과 달리, SF 소설은 인생을 담고, 인생을 모방하고, 인생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독자가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문학적인) 사회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독자는 (소설이 반영하는) 인생을 바라봅니다. 독자는 자신의 인생과 소설이 반영하는 인생을 비교하고 대조하고 고민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독자가 <멸종>을 읽은 이후, 독자는 공룡 멸종 문제보다 결혼 문제를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일지 모릅니다. 이런 독서가 잘못인가요? 독자가 공룡 SF 소설을 읽는다면, 독자가 반드시 오직 공룡 멸종 문제만 고민해야 하나요? 그건 아닐 겁니다. <멸종>은 고생물학 논문이 아닙니다. 소설로서 <멸종>은 한 인간의 인생을 담습니다. 인생이 풍부하고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소설이 인생을 반영한다면, 소설 역시 풍부하고 복잡하고 다양해질 겁니다. 소설이 풍부하고 복잡하고 다양한다면, 독자는 수많은 것들을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독자는 오직 특정한 주제에만 치중하지 않습니다. 소설이 특정한 주제를 가리킨다고 해도, 독자는 그것을 다르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학, 소설은 수많은 해석들을 낳습니다. 우리 인생이 풍부하고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소설이 인생을 반영하기 때문에, 소설은 오직 한 가지 해석만 제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수구 꼴통 작가가 소설을 쓴다고 해도, 급진 좌파 독자는 소설을 읽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수구 꼴통 작가가 소설을 쓰는 동안, 수구 꼴통 작가는 인생을 반영할 테고, 인생이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다양한 인생 속에서 급진 좌파 독자는 공감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작가가 특정한 주제를 강조하기 원한다고 해도, 인생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소설이 복잡한 인생을 담기 때문에, 독자는 얼마든지 다양한 것들을 고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설을 읽습니다. 그래서 SF 독자는 미래학 서적보다 SF 소설을 읽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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