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사회주의가 구닥다리라는 오해 본문
[1950년대 SF 소설부터 21세기 초반 현재까지, 언제나 사회주의는 중요했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설 <안드로메다 성운>의 소감문을 찾아보면, 종종 '한물 간 사회주의'라는 말을 듣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은 처참하게 무너졌고,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이제 한물 갔다'라고 생각하죠. 그런 사람들은 <안드로메다 성운>을 과거의 유산 정도로 치부할 테고, 이 소설이 구닥다리 사회주의 사상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생각은 아니겠죠. 다들 '사회주의=소련=일당 독재'라는 초보적인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하지만 정말 사회주의가 한물 갔을까요. 사회주의는 그저 박물관의 골동품일까요. 미국과 유럽과 동아시아의 거대 자본이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미국과 유럽과 동아시아의 기득권이 세계의 전부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거대 자본과 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강대국 안에도 있고, 강대국 밖에도 있습니다. 인도 지역이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은 여전히 사회주의 사상으로 경제 및 군사적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는 중입니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따라 싸우고, 사회주의 사상은 이들에게 아주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비록 이들의 힘은 미약하지만, 이들도 엄연히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한국을 포함해 강대국 사람들은 저런 약자들의 저항을 너무 쉽게 간과합니다. 사람들의 눈은 항상 북미, 유럽, 일본, 중국, 호주 등으로 향합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아요. 동남 아시아, 인도, 중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고 살아가는지 별로 관심이 없죠. 그래서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수 백명씩 죽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일상적인 현상이고, 유럽 해안에서 난민 하나가 죽는 것은 참혹하고 끔찍한 비극이 됩니다.
"어떻게 문명 국가인 유럽의 해안에서 난민 아이가 죽을 수 있는가!" 다들 이렇게 외치지만, 왜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지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깜둥이 자식들'이 죽는 것은 그냥 상투적인 현상입니다. 여기에 '왜?'라는 물음을 붙일 이유가 없어요. 그런 사람들은 왜 내전이 발생하고, 왜 부족들이 갈등하고, 왜 전세계가 그걸 수수방관하는지 묻지 않습니다. 설사 누군가가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그런 관심은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분석에 그치고 맙니다. 그런 관심은 저 깊은 본질까지 파고들지 않습니다. 장 지글러가 고전적인 혁명가들의 이름을 외친 것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죠.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현재의 거대 자본주의 체계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그 거대한 자본 구조가 얼마나 심각한 착취와 수탈을 일으키는지 바라보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거대 자본의 착취를 바라본다고 해도 결국 거대 자본에게서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체계가 착취적이지만, 그래도 대기업이 필요해. 대기업이 있어야 경제가 발전하고 다들 먹고 살 수 있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하지만 이건 나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약소국 시민들을 착취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하고 온건한 지도자를 뽑으면 그 온건한 지도자가 대기업들을 규제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규제는 제대로 먹힌 적이 없습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싸울 때 국가는 최종적으로 자본의 편이고, 그 결과로써 미세 플라스틱, 산업 폐기물, 자극적인 화학 물질 따위가 세상에 널리고 널렸죠. 착하고 온건한 지도자들은 대기업을 규제하지 못합니다. 그런 착하고 온건한 지도자들 역시 "자본주의는 착취적이지만, 그래도 대기업은 중요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도자들 역시 이런 논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합니다.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는 그런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사회주의는 언제나 자본주의 체계에서 벗어날 방법을 수시로 고민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착취를 인정하는 순간에도 사회주의만큼은 밑바닥 사람들과 자연 환경을 바라봤습니다. 사실 그건 사회주의의 본질이기 때문에 사회주의가 착취를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었을 겁니다. 당연히 사회주의는 대안적인 방법을 계속 내놓아야 했습니다. 투쟁적인 혁명과 계획 경제는 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그게 전부라면, 앙드레 고르 같은 양반이 뭐하러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같은 책을 썼겠어요.
물론 이런 생태 사회주의는 <안드로메다 성운>의 전통적인 공산주의 사상과 많이 달라 보입니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핵심 가치를 선보인다는 점에 있어서 <안드로메다 성운>과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 역시 <안드로메다 성운>의 주장이 낡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자연 환경을 멋대로 개조하는 부분은 많은 비판을 받아야 하겠죠.) 하지만 그 핵심 가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체계가 모순을 드러내고 심하게 수탈할수록 저는 사람들이 이런 책을 더욱 중요하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