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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우익 이데올로기 비판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현실 도피

OneTiger 2017. 4. 20. 20:00

"미세 먼지 이야기를 그만 하죠. 너무 갑갑하잖아요." 예전에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미세 먼지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말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냥 잊어버리자는 뜻이죠. 저 말을 듣고, 꽤나 안타까웠습니다. 사고 방식이 너무 현실 도피적이라고 할까요. 사실 저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 진행자는 방송국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자기 일이기 때문에 저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미세 먼지가 아무리 지독해도 저 진행자는 방송국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저 진행자처럼 일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야외에서 일해야 합니다. 아무리 공장 굴뚝과 자동차들이 미세 먼지를 내뿜어도 누군가는 농사를 짓거나 집을 짓거나 해야 합니다. 유치원 교사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마실을 나가야 하고, 공원 도우미들은 공원을 돌아다녀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건물 안에서만 일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미세 먼지를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야외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냥 먼지를 먹고 병에 걸리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건 아니죠. 우리는 더욱 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환경을 오염시키면 안 된다고 강하게 저항해야 합니다.


저런 현실 도피적인 발언이 나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겁니다. 첫째,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둘째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세 먼지가 몰려와도 저 진행자는 방송국 안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숱합니다. 아무리 미세 먼지가 좀비 떼처럼 몰려와도 농부는 밖에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인력 시장의 노동자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고 삽니다.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미세 먼지와 상관없이 그들은 야외에서 일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냥 입을 꾹 다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계속 오염된 환경에서 일하면, 그들은 병에 걸리거나 수명이 줄어들 테니까요. 희망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생존의 문제죠. 그냥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현실에서 도피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저 라디오 진행자가 매일 야외에서 일해야 한다면, 매일 미세 먼지를 먹어야 한다면, 저렇게 쉽게 말하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저 진행자는 그저 자기 위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정말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 고생하는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을 쳐다봤음에도 저렇게 현실을 도피했다면, 글쎄요, 뭐라고 할 말이 없군요.


어슐라 르 귄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서 보이지 않는 밑바닥 사람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도 오멜라스 시민들은 밑바닥 사람의 존재를 압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누가 밑바닥에서 고생하는지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별로 피해를 입지 않기 때문이겠죠. 안전하게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은 위험하게 농사를 짓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겠죠. 사실 농부가 농사를 짓기 때문에 방송국 진행자도 밥을 먹을 수 있지만, 저 진행자는 그걸 생각하지 못했죠. 어쩔 수 없을 겁니다. 개인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할 수 없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 커다란 사건이나 비극이나 정책을 이야기할 때, 항상 밑바닥 사람들과 말 못하는 동물들이 있음을 잊으면 안 될 겁니다. 이 세상의 각계각층을 고려할 수 없다고 해도 오직 하나, 밑바닥 사람들과 동물들만큼을 무조건 고려해야 할 겁니다. 사실 미세 먼지가 몰려와도 여유로운 사람들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저 방송국 진행자처럼요. 중요한 건 그런 여유를 찾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야생 동물들이 미세 먼지 주의보를 알까요. 뒷산의 까치가 그런 걸 알겠습니까. 농부는 미세 먼지 주의보를 알지만, 그래도 밖에서 일해야 합니다.


이건 희망의 문제나 현실에서 도피할 문제가 아닙니다. 강하게 대항하고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환경 오염을 바꾸고 싶다면, 환경을 오염시키는 체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할 겁니다. 우리는 강을 오염시키고, 물고기를 떼죽음으로 몰아넣고, 강 주변의 농부들을 내쫓았습니다. 어떻게 그런 우리가 남들한테 미세 먼지를 내뿜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남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우리부터 바꿔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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