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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사막 행성과 물고기, 환경과 언어 관계 본문

SF & 판타지/머나먼 생태계

사막 행성과 물고기, 환경과 언어 관계

OneTiger 2019. 6. 11. 20:22

소설 <듄> 시리즈에서 신황제 레토 2세는 경호 부대를 거느립니다. 이 경호 부대는 물고기 웅변대라고 불립니다. 물고기 웅변대는 여자들입니다. 레토 2세는 여자들이 생명의 요람이기 때문에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경호 임무(생명을 지키는 임무)에 훨씬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이 옳은가요? 여자가 임신하기 때문에, 여자들은 특별한 존재들이 됩니다. 심지어 물고기 웅변대처럼, 사이언스 픽션과 판타지는 임신을 비일상적인 상상력으로 승화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자체로서 임신이 특별한 사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여자가 임신하기 때문에 여자가 평화롭고 생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여자가 임신하기 때문에 여자를 육아와 살림에 억지로 밀어넣습니다. 에코 페미니즘과 가부장 문화는 모두 임신을 중시하나, 에코 페미니즘은 임신을 이용해 평등을 말하고, 가부장 문화는 임신을 이용해 약자들을 억압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임신이 중요하다고 해도, 훨씬 중요한 것은 임신을 둘러싼 상황, 구조, 환경일 겁니다. 신황제 레토 2세는 이걸 외면하는 것 같습니다. 아주 현명한 레토 2세는 사회 구조보다 성별이라는 정체성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물고기 웅변대는 다소 모순적인 명칭입니다. 신황제 레토 2세의 거점은 아라키스 행성입니다. 아라키스에서 신황제 레토는 멜란지 스파이스를 통제합니다. 아라키스 행성이 유일한 멜란지 생산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귀족들과 세력들은 신황제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신황제는 아라키스 행성을 장악했고, 물고기 웅변대는 이런 신황제를 호위합니다. 문제는 아라키스 행성이 사막 행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듄'이라는 별명처럼, 아라키스는 사막이고, 아라키스 행성에서 수분은 아주 귀중합니다. 아라키스 프레멘들은 시체에게서 물을 짜냅니다. 수분이 너무 귀중하기 때문에, 심지어 프레멘들은 시체조차 낭비하지 못합니다.


사막이 너무 가혹하기 때문에, 프레멘들은 죽은 사람에게서 물을 짜내야 합니다. 다른 행성 사람들에게 이런 행위는 인륜을 어기는 범죄이나, 프레멘들에게 이건 중요한 관습입니다. 프레멘이 시체에게서 물을 짜낸다고 해도, 프레멘은 이게 인륜을 어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시체는 그저 시체에 불과합니다. 시체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닙니다. 이건 비유적인 표현이나, 시체에게는 고귀한 영혼이 없습니다. 시체가 그저 죽은 고기 덩어리에 불과함에도, 흔히 사람들은 시체를 소중하고 경건하게 대합니다.



부관참시는 극형입니다. 누군가가 시체를 훼손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시체 훼손이 인륜을 어겼다고 판단할 겁니다. 사람이 죽은 이후, 영혼이 육체를 떠난다고 해도, 육체가 영혼을 담은 그릇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시체를 경건하게 대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좀비 아포칼립스는 무섭습니다. 죽은 사람이 좀비가 된다고 해도, 우리는 좀비에게서 영혼(을 담았던 그릇)을 봅니다. 좀비는 악마이나, 우리는 영혼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비를 쉽게 처치하지 못합니다. 리처드 매드슨이 쓴 <나는 전설이다>에서 소설 주인공은 좀비들(흡혈귀들)에게서 영혼들을 찾습니다.


소설 주인공이 흡혈귀들을 만날 때마다, 소설 주인공은 한때 흡혈귀들이 담았던 영혼들을 상기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시체가 그저 죽은 고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설 <듄> 시리즈에서 다른 행성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프레멘들이 시체에게서 물을 짜낼 때, 다른 행성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하지만 사막 행성 원주민들에게 이건 그저 관습에 불과합니다. 사막 행성 원주민들이 최대한 수분을 활용할 때,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시체가 그저 시체에 불과하다고 간주합니다. 어쩌면 프레멘들은 좀비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프레멘들이 좀비를 두려워한다고 해도, 프레멘들은 좀비에게서 영혼을 찾지 않을지 모릅니다. 프레멘들이 좀비에게서 영혼을 찾는다고 해도, 한편으로 프레멘들은 좀비가 아까운 수분을 오염시킨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릅니다. 사막 행성은 가혹하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프레멘들은 특정한 사고 방식을 익혔습니다. 다른 행성 사람들은 시체가 영혼을 담았던 그릇이라고 생각하나, 프레멘들은 시체에게 여전히 수분이 있다고 간주합니다. 이건 프레멘들에게 장례 관습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프레멘들 역시 죽음을 경건하게 대하고 죽은 사람을 추억합니다. 하지만 프레멘 장례 관습은 다른 행성들의 장례 관습들과 다릅니다.


특정한 환경은 특정한 사고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사막 행성 환경은 인간이 수분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수분이 아주 귀중하기 때문에, 프레멘들은 익사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프레멘들은 인간이 물에 빠진다고 상상하지 못합니다. 사막 행성에는 물이 너무 부족합니다. 어떻게 인간이 물에 빠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프레멘이 인간이 물에 빠진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까? 만약 인간이 익사한다면, 프레멘은 익사가 행복한 죽음이라고 간주할지 모릅니다. 평생 동안 프레멘은 사막을 봤고, 모든 사고 방식은 사막으로 쏠립니다.



그래서 다른 행성 사람들과 프레멘은 다릅니다. 모욕하기 위해 다른 행성 사람들은 침을 뱉으나, 명예를 표현하기 위해 프레멘은 침을 뱉습니다. 이건 프레멘들이 반드시 사막에 얽매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환경이 모순적일 때, 인간은 모순을 깨뜨리고 상황을 바꾸기 원합니다. 이건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모순적이라고 해도, 환경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모순적인 환경이 지배적인 관념을 만들기 때문에, 인간은 지배적인 관념에 복종하고 모순을 깨닫지 못할지 모릅니다. 인간은 모순이 당연하다고 착각할지 모릅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는 엄청난 모순들이 있습니다.


착취와 폭력과 오염 없이,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반드시 모순으로 이어집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 역시 모순들을 겪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을 따르고 모순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자가 여자를 성 폭행한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구타한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자본가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한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미혼모가 아이들과 함께 자살한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장애인들이 물건이 된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장애인들이 인간보다 그저 병신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핵 발전소가 치명적인 산업 폐기물들을 버린다고 해도, 이건 당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숱한 모순들이 당연하다고 착각합니다. 사람들이 장애인들을 동정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장애인들을 동정하지 않고 오직 빈말로만 장애인을 동정합니다. 사람들은 사회적인 부가 장애인들을 지원하기 바라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사회적인 부를 차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본가 계급이 사회적인 부를 차지하지 못한다면,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극대화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회적인 부를 장애인들에게 분배하기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장애인 인권 운동가들조차 그렇게 생각합니다.


수많은 장애인 인권 운동가들은 장애인들보다 자본가 계급을 편듭니다. 수많은 장애인 인권 운동가들은 자신들이 인권을 옹호한다고 생각하나, 사실 그들은 그저 폭력의 앞잡이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심각한 모순들을 일으킵니다. 자본주의가 너무 심각한 모순이기 때문에, 자본주의 반대 운동들은 처참하게 몰락하거나 극단적인 폭력에 닿습니다. 자본주의가 너무 폭력적이기 때문에, 저항 운동들 역시 폭력에 물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먼저 잘못했고 자본주의가 파생적인 폭력들을 만든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백인들이 인디언들을 학살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걸 용납합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백인들에게 저항할 때, 사람들은 이걸 용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좋은 것이고 파생적인 폭력(을 일으키는 저항 운동들)이 나쁘다고 착각합니다. 흑인 노예들이 백인 주인들을 살해한다면, 사람들은 노예 제도보다 흑인 노예들을 욕할 겁니다. 어떤 노예 해방 운동가들은 극단적인 폭력 혁명을 주장했고, 사람들은 노예 해방 운동가들이 테러리스트라고 비판합니다. 노예 제도, 인종 차별이 옳기 때문에, 노예 해방 운동가들은 테러리스트가 됩니다. 21세기 오늘날에서 형식적인 노예 제도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폭력적인 저항 운동이 나쁘다고 착각하고 저항 운동을 테러라고 규정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폭력적인 저항 운동을 만드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이 반드시 옳다고 착각합니다. 이렇게 모순적인 환경이 지배적인 관념을 퍼뜨릴 때, 사람들은 지배적인 관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는 사회 환경이고, 아라키스 행성은 자연 환경입니다. 사회 환경과 자연 환경은 다릅니다. 하지만 사회 환경과 자연 환경 모두 개인들을 둘러싸는 환경입니다. 특히, 소설 <풀의 죽음>처럼, 가혹한 자연 환경과 억압적인 사회 환경은 맞물릴지 모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사회 환경과 자연 환경을 함께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모순적인 환경에 저항하고, 프레멘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프레멘들은 사막 행성을 바꾸기 원했고, 정말 그들은 사막 행성을 바꿉니다. 이제 더 이상 아라키스는 사막 행성이 아닙니다. 레토 2세가 신황제가 되었을 때, 이미 아라키스 행성에서 사막은 크게 줄어들었고 모래벌레들은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프레멘들은 수분을 귀중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레토 2세의 경호 부대는 물고기 웅변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과거 프레멘들에게 물고기 웅변대라는 명칭은 모순입니다. 수어지교라는 사자성어처럼, 물고기는 물과 이어집니다. 아라키스 행성에는 물이 너무 부족합니다.


아라키스 행성 원주민들에게 물고기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프레멘들이 익사라는 개념을 낯설게 여긴다면, 어떻게 프레멘들이 물고기를 친숙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모래 송어라는 단어에는 물고기라는 흔적이 있으나, 모래 송어에서 물고기라는 흔적은 희미합니다. 제목처럼,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은 시원한 강물과 무지개 송어를 보여줄 수 있으나, 프레멘들이 송어라는 단어를 듣는다고 해도, 프레멘들은 시원한 강물을 쉽게 연상하지 못할 겁니다. 프레멘들은 송어라는 단어에서 모래 송어를 연상할 겁니다. 하지만 테라포밍 이후, 프레멘들은 더 이상 익사가 낯설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신황제 레토 2세의 거점이 아라키스 행성임에도, 레토 2세는 물고기 웅변대를 거느리는지 모릅니다. 물고기 웅변대에는 다른 공식 설정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소설 <듄> 시리즈가 왜 물고기 웅변대가 물고기라고 불리는지 설명하나요? 만약 소설 <듄> 시리즈가 그걸 공식적으로 설명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SF 독자들은 어떻게 환경과 사고 방식, 언어가 관계들을 맺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제 6월 10일 게시글은 프레멘들이 두근거리는 연애와 봄날 나비를 연결하지 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소설 <듄> 시리즈에서 어떤 프레멘들은 연애를 봄날 나비에 비유하는지 모릅니다.


프랭크 허버트는 프레멘이 두근거리고 설레고 콩닥콩닥하는 연애를 봄날 나비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만약 그렇게 프랭크 허버트가 생각한다고 해도, 이건 오해일지 모릅니다. 건조하고 가혹한 사막 행성에는 파릇파릇한 봄이 없고, 봄은 생기를 상징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어떤 프레멘이 설레는 연애와 봄날 나비를 흥얼거린다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사람들이 에코 페미니스트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처럼, 다른 프레멘들은 그 프레멘을 이상하게 쳐다볼지 모릅니다. SF 독자들은 사막 행성, 봄날 나비, 파릇파릇한 새싹들, 두근거리는 연애를 이용해 환경, 사고 방식, 언어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비일상적인 상황을 상상하고, SF 독자들은 환경, 사고 방식, 언어를 훨씬 새롭게 고민할 수 있습니다. 주류 문학은 사막 행성 생태계와 테라포밍과 모래 송어 같은 외계 생명체를 상상하지 못합니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무지개 송어를 보여주는 것처럼, 주류 문학에게 송어는 오직 어류일 뿐입니다. 주류 문학은 새로운 상황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반면, 사이언스 픽션은 새로운 상황을 상상하고 상황을 전복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바뀐다면, 사고 방식은 바뀔 테고, 언어 역시 바뀔지 모릅니다. 흔히 사람들은 원시적인 삼림을 처녀림(處女林)이라고 부릅니다.


처녀림이라는 단어는 가부장적입니다. 코야실 행성의 언폴른 종족과 달리, 삼림은 인간이 아닙니다. 원시 삼림이 인간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구태여 원시 삼림과 처녀를 연결합니다. 사람들이 원시 삼림과 처녀를 연결할 때, 사람들은 개척과 정복을 상정합니다. 인류 문명은 원시 삼림을 개척해야 합니다. 남자는 처녀를 정복해야 합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자는 총각을 정복하지 않습니다. 감히 여자는 총각을 정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시 삼림은 구태여 여자(처녀)로 이어져야 합니다. 장 자크 루소가 쓴 <에밀>부터 인터넷의 수두룩한 3류 포르노 소설들까지, 가부장 문화는 이런 처녀림이라는 개념을 계속 퍼뜨립니다.



<에밀>은 남자(에밀)가 자연을 개척하고 여자(소피아)를 지배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소피아는 에밀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간청합니다. 소피아는 에밀에게 굴복해야 하고, 에밀은 소피아를 지배해야 합니다. 소피아는 자연을 개척하지 못합니다. 소피아와 자연은 똑같이 피지배 존재입니다. 그래서 원시 삼림은 처녀림입니다. 수두룩한 3류 포르노 소설들은 이런 개념을 되풀이합니다. 3류 포르노 소설들은 남자가 여자를 정복하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정복하기 바라고 피학적인 쾌감을 바랍니다. 여자는 남자를 정복하지 못합니다. 원시 삼림이 순종적으로 개척자들을 기다리는 것처럼, 여자는 정복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개척과 탐험은 성 차별과 억압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가부장 문화가 사라진다면, 이런 사고 방식은 사라질 테고, 처녀림이라는 언어 역시 사라질지 모릅니다. 아니면 처녀림은 완전히 다른 것을 가리킬지 모릅니다. 처녀림처럼, 어머니 자연 역시 여자와 자연을 연결합니다. 하지만 처녀림은 지배에 굴복합니다. 처녀림과 달리, 어머니 자연은 번성과 생명력, 돌봄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에코 페미니즘은 어머니 자연을 이용해 가부장 문화를 비판하고 여자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사라진다면, 처녀림이라는 단어 역시 성 차별보다 다른 것을 상징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부장 문화를 타파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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