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아내>와 숲 속에서 흔적을 찾기 본문
[숲(자연)은 아주 방대합니다. 방대한 자연에는 고정적인 경로가 없습니다. 경로는 자유분방합니다.]
반다나 싱이 쓴 단편 소설 <아내>는 숲을 이야기하는 사변 장르입니다. 제목처럼, 단편 소설 <아내>에서 소설 주인공은 아내입니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편이 있는 여자를 아내라고 부르고 아내가 있는 남자를 남편이라고 부릅니다. 단편 소설 제목이 아내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겁니다. 사실 이 단편 소설에서 아내와 남편은 대조적입니다. 아내가 개방적이고 남편이 뭔가를 가두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숲을 서성거립니다. 아내는 숲을 방황하고, 숲에서 아내는 여러 흔적들을 찾습니다.
아내는 어디에서 숲이 시작하고 어디에서 숲이 끝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내는 오직 연이어 숲을 방황할 뿐입니다. 숲은 방대합니다. 숲에는 고정적인 경로가 없습니다. 아내는 계속 왼쪽으로 갈 수 있습니다. 아내는 왼쪽으로, 왼쪽으로, 왼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갈 수 있습니다. 아니면 한동안 아내는 오른쪽으로 가고, 다시 왼쪽으로 가고, 또 다시 오른쪽으로 가고, 결국 왼쪽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서브노티카> 같은 오픈 월드 게임들이 드넓은 자유 경로를 자랑하는 것처럼, 단편 소설 <아내>에서 아내는 수많은 경로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숲은 자연을 대표하고, 자연은 아주 아주 방대합니다.
오픈 월드 <서브노티카>는 자연(외계 해양 환경)을 선사합니다. 방대한 오픈 월드 게임으로서 <서브노티카>는 방대한 자연을 적극적으로 보여줍니다. 비단 <서브노티카> 이외에 수많은 오픈 월드 게임들은 자연 환경을 활용합니다. 자연이 방대하기 때문에, 자연과 오픈 월드 게임은 잘 어울립니다. 심지어 <쉘터 2> 같은 소규모 오픈 월드 게임조차 자연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합니다. 이건 모든 오픈 월드 게임이 반드시 자연 환경을 활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처럼, 오픈 월드 게임들은 얼마든지 도시에 치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흔히 우리는 도시보다 자연이 훨씬 웅장하고 방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시는 인류 문명입니다. 인류 문명보다 자연 환경은 훨씬 원초적입니다. 5억 년 전에 생물 다양성이 엄청나게 번성하기 시작했을 때, 인류 문명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5억 년 전에는 심지어 원시적인 인간조차 없었습니다. 지구에서 바다는 압도적인 면적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도시는 육상 거주 공간입니다. 아직 인류 문명은 해상 도시와 해저 도시를 짓지 못했습니다. 육상 도시들 역시 계속 확장하지 못합니다. 육상에서 울창한 숲이 사라진다면, 도시 역시 커다란 피해를 받을지 모릅니다. 육상에는 방대하고 울창한 숲들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 측면들에서 도시보다 자연은 방대합니다. 오픈 월드 게임들은 방대한 환경을 추구하고, 그래서 오픈 월드 게임들에게 자연 환경은 좋은 배경 무대가 됩니다. 중세 판타지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드루이드는 여러 야생 동물들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초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드루이드는 바다 표범으로 변신할 수 있었습니다. 드루이드가 바다 표범으로 변신하기 때문에, 다른 클래스들보다 드루이드는 더 빨리, 더 깊이, 더 멀리 헤엄칠 수 있습니다. 바다 표범 드루이드는 방대한 해저를 탐험할 수 있습니다. 야생, 자연, 방대함은 잘 어울리는 관계이고, 오픈 월드 게임들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 <아내>에서 아내는 방대한 자연(숲)을 방황합니다. 아내는 고정적인 경로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숲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고정적인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비단 경로만 아니라 다른 것들 역시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숲 속에서 아내는 어떤 흔적들을 찾습니다. 이 흔적들이 무엇을 가리키나요? 왜 숲 속에 흔적들이 있나요? 누가 지나갔나요? 어떤 동물이 지나갔나요? 다람쥐가 지나갔나요? 엄마 살쾡이가 지나갔나요? 사슴이 지나갔나요? 숲 속에서 생태학자가 어떤 미지의 야수를 추적하는 중인가요? 아내는 정답을 알지 못합니다. 아내는 흔적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으나, 고정적인 정답은 없습니다.
아내는 고정적인 경로를 걷지 않고 고정적인 정답을 대답하지 않습니다. 반면, 남편은 아내와 다릅니다. 남편은 어떤 현상을 아주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인간이 뭔가를 설명할 때, 인간은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설명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언어 없이, 우리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언어 없이, 우리는 사랑을 표현하거나 우회적으로 가리킬 수 있으나, 우리가 구체적인 설명을 원한다면, 우리는 언어를 동원해야 합니다. 남편은 언어 속에 개념을 가두기 원합니다.
언어가 개념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가둘 때, 남편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개념은 언어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개념은 언어를 탈출해서는 안 됩니다. 개념과 언어는 1:1 짝을 지어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가 반드시 여자와 남자를 1:1 짝짓기하는 것처럼, 남편은 개념과 언어가 일치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언어에 빈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 활동은 비유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말할 때, 우리는 단어가 가리키는 개념을 우리가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착각입니다. 단어와 개념 사이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우리는 임시적으로 단어와 개념을 연결합니다. 언제든 이런 연결 고리는 끊어질지 모릅니다.
스테고사우루스는 중생대에 살았던 가장 커다란 골판 공룡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단어 스테고사우루스와 중생대 골판 공룡 스테고사우루스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알파벳을 읽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stegosaurus라는 단어를 본다고 해도, 그 사람은 중생대 골판 공룡 스테고사우루스를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할 겁니다. 우리는 stegosaurus라는 단어가 중상대 골판 공룡을 가리킨다고 약속합니다. 이런 약속 때문에, 단어 stegosaurus는 중생대 골판 공룡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약속했기 때문에, 스테고사우루스(동물)는 스테고사우루스(단어)가 됩니다.
만약 인류 문명이 멸망하고 다른 지적 문명이 나타난다면, 다른 지적 문명은 중생대 골판 공룡을 아우라우다바라비라고 부를지 모릅니다. 단어 stegosaurus와 중생대 골판 공룡 사이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이게 그저 약속에 불과하기 때문에, 중생대 골판 공룡은 얼마든지 아우라우다바라비가 될 수 있습니다. 남한 사회에서 생리는 월경을 가리킵니다. 남한 사람들은 월경을 월경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생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월경이라는 신체 현상과 생리라는 단어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남한 사회가 가부장적이기 때문에, 월경이라는 신체 현상은 그저 단어 생리가 될 뿐입니다.
만약 가부장적인 사회가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월경을 생리라고 부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건장한 남자가 울 때, 흔히 사람들은 계집애처럼 찌질거린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계집애, 여자는 연약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여자는 약합니다. 남자는 약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남자는 자신이 강하다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뭔가를 부숴야 합니다. 약자들이 죽어간다고 해도, 남자는 그것을 냉철하게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자는 안타까워해서는 안 되고, 탄식을 내뱉어서는 안 되고, 가슴을 두드리고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남자가 가슴을 두드리고 눈물을 흘릴 때, 남자는 여자, 계집애, 약한 존재가 될 겁니다. 가부장 문화는 절대 이걸 용납하지 못합니다.
남자는 다른 사람을 죽이고, 약자를 짓밟고, 무기를 휘두르고, 여자를 폭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는 폭력이 선이고 저항이 악이라고 단정합니다. 남자가 폭력을 휘두를 때, 가부장 문화는 남자가 잘 한다고 칭찬합니다. 여자가 폭력에 저항할 때, 가부장 문화는 지랄 염병하며 이걸 물어뜯습니다. 여자는 절대 저항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는 약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가부장 문화는 계집애처럼 찌질거린다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가부장 문화가 사라진다면, 이런 차별 표현은 사라질지 모릅니다. 계집애처럼 찌질거린다는 표현은 선천적이지 않습니다. 착취와 수탈을 위해 가부장 문화는 그저 약한 것과 여자를 연결할 뿐입니다. 언어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언어와 개념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습니다.
언어와 개념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는 개념을 가두지 못합니다. 단어 스테고사우루스가 반드시 중생대 골판 공룡을 가리키지 못하는 것처럼, 개념은 언어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개념이 언어를 벗어날 수 있다면, 남편은 이걸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남편은 고정적인 것을 좋아하나, 숲 속에서 아내는 고정적인 것보다 개방적인 것을 따릅니다. 숲 속에서 아내가 어떤 흔적을 찾는다고 해도, 아내는 그게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독자 역시 확신하지 못합니다. 독자가 단편 소설 <아내>를 여러 번 읽는다고 해도, 독자는 정답을 내리지 못할 겁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숲이 갈림길들이 있는 정원이라고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 숲에는 고정적인 경로가 없고, 여행자는 자유분방하게 방향을 고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는 문학 해석이 삼림 여행이라고 비유합니다. 움베트로 에코는 문학 비평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을 썼습니다. 이 문학 비평 서적에서 소설은 숲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독자가 삼림 여행자라고 가정하고 어떻게 삼림 여행자(독자)가 숲으로 들어가고 숲에서 서성거리는지 설명합니다. 숲(소설)이 방대하기 때문에, 삼림 여행자(독자)는 자유분방하게 경로(해석)들을 고를 수 있습니다. 삼림 여행이 자유분방한 것처럼, 소설 해석은 자유분방합니다.
[엄마 동물이 자유분방하게 숲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독자는 소설을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단편 소설 <아내>에서 결국 남편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남편은 우리(cage)에 어떤 동물을 가두기 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물은 우리를 빠져나가고 숲으로 탈출한 것 같습니다. 아내는 발톱 자국을 찾고 숲 냄새를 맡습니다. 우리(cage)는 동물을 고정하지 못합니다. 동물은 자유분방하게 숲으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삼림 여행(소설 해석)은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독자가 작가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작가이고, 작가는 소설입니다. 작가와 소설은 똑같고, 독자는 작가와 소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설의 숲으로 여섯 발자국>은 작가와 소설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분명히 작가는 소설을 썼고, 작가는 중요한 해석 기준이나, 독자는 오직 작가에게만 의존하지 못합니다. 소설과 작가가 다르기 때문에, 독자는 작가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건 현실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독자가 현실 지식(백과 사전 지식)을 이용해 소설을 해석한다고 설명합니다. 소설 해석이 자유분방한 삼림 여행이라고 해도, 이건 독자가 소설을 아무렇게나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독자가 소설을 아무렇게나 해석하고 싶다고 해도, 결국 독자는 현실을 참고해야 합니다. 소설, 작가, 독자 모두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 속에서 작가는 현실을 이용해 소설을 쓰고, 독자는 현실을 이용해 소설을 해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