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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생태주의

<빼앗긴 자들>은 굶주리는 유토피아 소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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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자들>은 굶주리는 유토피아 소설

OneTiger 2017. 9. 25. 20:00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아마 누구나 이런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그만큼 뭔가를 먹는다는 행위는 우리 인류에게 중요합니다. 아니, 저런 문구를 들먹이지 않는다고 해도 뭔가를 입에 집어넣는 행위는 수많은 동물들에게 중요합니다. 영양분을 섭취한다는 행위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중요합니다. 뭔가를 먹지 않으면,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대부분 생명체들은 생존하지 못합니다. 자연 생태계는 수많은 에너지가 흐르는 상호작용이고, 그만큼 수많은 생명체들이 먹고 살기 위해 하나의 체계를 꾸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뭔가를 먹는다는 행위는 다른 행위와 비교되지 못할 겁니다. 옷이 없거나 집이 없는 사람도 우선 뭔가를 먹어야 합니다. 뭔가를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이토록 먹고 사는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유토피아 소설들은 굶주림이 없는 사회를 묘사했습니다. 유토피아 소설들은 많고 많으나, 그런 소설들은 공통적으로 굶주림이 없는 사회를 묘사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굶주린다면, 그 소설은 유토피아 소설로서 자격을 잃을 겁니다. 나랏님도 가난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나, 유토피아 소설은 굶주림을 없애야 합니다.



고전적인 <붉은 별>부터 모던한 스페이스 오페라 <플레바스를 생각하라>까지, 여러 SF 소설들 역시 굶주림이 없는 사회를 묘사합니다. 특히 SF 소설들은 기술적인 유토피아를 중시합니다. 과학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하면, 생산량 역시 엄청나게 늘어날 겁니다. 생산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다면, 생산물들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적어도 누군가가 굶주리지 않을 겁니다. 사실 산업 혁명 이후 엄청나게 생산량이 늘어났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분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산업 혁명 같은 기술적인 혁신이 계속 등장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분배를 받을 테고 굶주림이 사라질지 모릅니다. 만약 기술적 특이점이나 인공 지능이나 유전자 조작 작물이 그런 혁신으로 승화한다면, 인류는 굶주림이 없는 문명을 이룩할 수 있을지 모르죠. 이안 뱅크스나 스티븐 백스터나 켄 맥레오드는 그런 기술적인 유토피아를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생산량이 홍수처럼 넘치기 때문에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누구나 굶주리지 않습니다. 반면, 생산량이 극단적으로 모자라고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굶주린다면? 별로 유토피아 소설처럼 보이지 않겠죠.



하지만 그런 소설들 역시 존재합니다. 빈약한 생산력과 굶주림이 만연한 유토피아 소설 역시 존재해요. <빼앗긴 자들>이나 <홍수>가 그런 사례입니다. <홍수>보다 <빼앗긴 자들>이 굶주림을 훨씬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군요. <빼앗긴 자들>에서 사람들은 우라스 행성과 아나레스 위성에서 살아갑니다. 주인공은 아나레스 위성에서 살아갑니다. 이 아나레스 위성은 꽤나 초라하고 삭막한 환경입니다.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풍부한 반면, 지상은 황무지입니다. 바다에는 어마어마한 물고기 떼가 돌아다니나, 지상은 쓸쓸하고 황량합니다.


문제는 아나레스 사람들이 아직 물고기들을 식량으로 삼지 못하고 지상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점입니다. 작물들은 삭막한 환경에서 제대로 자라지 않고, 그래서 아나레스 위성은 풍족하다는 단어와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뭔가가 항상 모자랍니다. 환경 자체가 빈곤해 보입니다. 그래서 다들 굶주리고, 심지어 대기근까지 찾아옵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희한한 풍경이 나타납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은 함께 굶주립니다. 허드렛일을 하는 하급 노동자부터 과학 기술을 연구하는 지식인까지, 아나레스 사람들은 함께 굶주립니다. <빼앗긴 자들>은 굶주리는 유토피아 소설입니다.



굶주리는 유토피아 소설은 꽤나 모순적입니다. 함께 잘 먹고 잘 사는 공동체가 아니라 함께 굶주리는 공동체를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빼앗긴 자들>은 <붉은 별>이나 <뒤 돌아보며>와 전혀 다릅니다. 이런 고전적인 유토피아 소설들은 사회주의 체계를 이용해 다들 잘 먹고 잘 사는 광경들을 보여줍니다. 반면, <빼앗긴 자들>은 사회주의 체계를 이야기하나, 등장인물들이 불쌍할 만큼 굶주리는 광경들을 강조합니다. 아나레스 위성은 전혀 유토피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옆에 있는 우라스 행성이 유토피아 같습니다. 이 행성은 아름답고 풍부한 자연 생태계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우라스 행성에 도착한 이후 두 눈을 둥그렇게 떴습니다. 그런 풍부한 자연 생태계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역설적이게도 주인공의 연인은 생태학자입니다. 척박한 위성에서 살아가는 생태학자죠.) 우라스 행성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생산량을 자랑합니다. 겉모습을 따진다면, 분명히 우라스 행성이 아나레스 위성보다 유토피아 같습니다. 어마어마한 생산량은 빈곤을 없앨 테고, 그래서 우라스는 유토피아가 될 자격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사실 현실 속에서 여러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어마어마한 생산력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가 엄청난 생산량을 창조했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두 사람은 만약 사람들이 그런 생산량을 제대로 분배한다면, (따라서 모두가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면) 굶주림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창조한 막대한 생산량은 공산주의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르스크와 엥겔스는 사회주의가 성공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류 역사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는다면 생산량을 늘리지 못하고, 생산량이 늘어나지 않으면 제대로 분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엄청나게 폭력적이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생산적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순차적인 역사 발전을 강조했고, 인류 역사가 사회주의로 가기 위해 반드시 자본주의를 거쳐야 한다고 예상했습니다. 아나레스 위성은 그런 역사 발전 단계에서 한참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풍부한 생산력 따위는 없습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꿈도 꾸지 못합니다. 대기근이 닥친다면, 하급 노동자와 고급 지식인 모두 함께 굶주려야 합니다.



하지만 '하급' 노동자와 '고급' 지식인이라는 표현은 잘못일지 모릅니다. 노동자와 지식인이 함께 굶주린다는 뜻은 하급이나 고급 같은 계급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계급을 없앤다는 이야기는 그저 공동 생산이나 공동 소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계급을 없앤다는 이야기는 공동 생산보다 더 나가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고난을 겪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공동 생산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공동 생산은 계급을 없애는 중요한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본 소득이나 추첨 민주주의나 협동 조합 같은 제도는 공동 생산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될 수 있으나, 결국 계급을 정말 타파하고 싶다면, 인류는 공동 생산으로 가야 할 겁니다.


문제는 분배와 생산력입니다. 만약 생산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모두가 원하는 만큼 먹고 살지 못한다면? 도대체 '충분한 생산력'은 뭐를 뜻할까요. 얼만큼 사회 전체가 생산해야 충분한 생산력이 될까요. 충분한 생산력은 얼만큼 범주가 넓을까요. 어디까지 생산력이 늘어나야 충분한 생산력이 될 수 있을까요. 이런 물음들은 현대 사회를 좌우합니다. 하지만 아나레스 사람들은 이런 충분한 생산력에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함께 굶주려야 한다면, 그저 함께 굶주릴 뿐입니다.



아나레스 사람들과 달리, 현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생산력에 매달립니다. 생산력이 늘어날 수 있다면, 사람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독재자처럼 보이는 인물이나 진보적으로 보이는 인물이나 똑같이 생산력에 매달립니다. 아무리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찾아와도 함께 굶주려야 한다면, 사람들은 그런 공동체를 외면할 겁니다. 억압이 존재하고 폭력이 존재해도 일단 뭔가를 입에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독재자는 인기를 얻습니다. 독재자가 생산량을 많이 늘려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폭력적인 전쟁을 용인합니다. 일단 자신이 뭔가를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역시 그런 사고 방식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이 먼저라고 외치는 대통령은 베트남에서 양민들을 학살하고 돈을 벌었다고 자랑합니다. 저는 그 말이 정치적 립서비스라고 생각하나, 어쨌든 대통령이라는 인간이 양민 학살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양민 학살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생산력이 늘어난다면, 베트남 양민들이 죽든 말든 한국 사람들은 목구멍에 뭔가를 넣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산력이 먼저입니다. 그래야 먹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충분한 생산력'이라는 조건은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나, 한편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충분한 생산력이라는 범주를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성장해야 하나요? 얼마나?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경제 성장만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걸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지 모릅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에서 양민들을 학살하고 돈을 번 것처럼 충분한 생산력은 다른 모든 것을 짓밟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핵 폐기물이나 4대강이나 새만금이나 설악산 케이블카 산업은 여러 생명들을 짓밟거나 짓밟으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저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분명히 놀라운 생산력을 자랑하고, 저는 인류가 그걸 바탕으로 사회주의 체계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흐름을 고려한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옳을 겁니다. 기술적인 혁신은 분명히 인류를 사회주의 체계로 안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아나레스 사람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겁니다. 어쩌면 그 어마어마한 생산력은 언젠가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충분한 생산량이 위기에 빠진다면?



저는 인류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맞이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수없는 위기들에 직면했으나, 문명은 한 번도 붕괴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총체적인 문명은 붕괴하지 않았죠. 작거나 약한 문명들이 붕괴해도 강한 문명들은 꾸준히 유지를 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는 그렇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인류 문명이 영원히 찬란할 수 있을까요? 정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재난이 인류 사회를 덮친다면? 그래서 생산량이 붕괴한다면? 그 누구도 수치와 범주를 측정하지 못하는 '충분한 생산력'이 감소한다면?


인류는 사회주의 체계에서 벗어나고 다시 야만적으로 다른 생명들을 짓밟아야 할까요? 충분한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누군가를 짓밟아야 할까요? 어쩌면 미래에 엄청난 위기가 닥쳤을 때, 누군가가 한국 사람들을 짓밟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베트남 양민들을 학살한 것처럼 누군가가 우리를 학살할지 모릅니다. 그 학살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겠죠. "다른 방법이 없다. 충분한 생산력을 위해 한국 인민들은 죽어야 한다." 뭐, 우리는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우리도 그랬기 때문에. 만약 북한 김정은이 '충분한 생산력을 위해' 남한을 침략해도 남한은 별로 할 말이 없을 겁니다. 남한 역시 그랬기 때문에.



충분할 때는 나누기 쉽습니다. 하지만 생산량이 총제적으로 붕괴한다면, 누군가는 소유권을 차지하기 위해 애쓸 겁니다. 그건 권력으로 이어질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나레스 사람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충분한 생산력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비단 SF 소설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미 피에르 클라스트르 같은 인류학자가 원시 공동체들은 충분한 생산력과 사유 재산에 매달리지 않는다고 말했죠.


그렇다고 해도 인류 전체가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인류가 미래에 사회주의 체계로 이행한다면, 함께 굶주릴 수 있는 인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주의 체계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주의적 인간들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압도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찾아온다고 해도 사회주의적 인간들은 함께 재난을 맞이하고 함께 굶주릴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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