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생태주의
<빼앗긴 자들>과 자본주의, 가부장 문화의 관계 본문
어슐라 르 귄이 쓴 <빼앗긴 자들>에서 소설 주인공은 노동자 평의회 사회에 속합니다. 소설 주인공이 자본주의 국가로 건너간 이후, 사회주의자로서 소설 주인공은 여러 모순들을 경험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계급 차별이 아무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빈부 격차는 당연합니다. 당연히 누군가는 엄청난 부를 차지해야 하고, 당연히 누군가는 굶주려야 합니다. 자본주의 학자들은 소설 주인공에게 비참한 가난들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학자들은 오직 부유하고 화려한 것들만 보여줍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소설 주인공은 몰래 탈출해야 했습니다.
현실 속의 자본주의 강대국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현실을 왜곡하고, 자본주의가 저지르는 범죄들을 감추고, 오직 좋은 것들만 보여줍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자본주의가 식민지들을 수탈한다고 실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강대국들은 식민지 수탈을 은폐하고 흑인들과 인디언들과 원주민들을 비하합니다.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왜 아프리카 흑인들이 가난한지 절대 밝히지 않습니다. 강대국들은 그저 깜둥이들이 무식하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건 제국주의 논리입니다. 이런 제국주의 논리가 지배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심지어 시민 운동가들조차 여기에 동조합니다.
시민 운동가들은 왜 아프리카 흑인들이 가난한지 묻지 않습니다. 시민 운동가들은 그저 부유한 자본주의 국가가 열등하고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를 도와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구호 광고들은 그저 흑인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돈타령할 뿐이고 식민지 수탈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은 제국주의 논리에 동조합니다. 숱한 시민 운동가들은 제국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 운동은 이런 시민 운동과 충돌합니다. 사회주의 운동은 시민 운동과 대립해야 합니다. 페미니즘 운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페미니즘 운동 역시 제국주의에 충성하는 시민 운동과 공존하지 못합니다.
페미니즘은 종속 관계를 깨뜨리고 해방을 추구해야 합니다. 시민 운동이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페미니즘 운동은 시민 운동을 없애고 지배적인 관념을 밀어내야 합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도 소설 주인공은 비단 계급 차별만 아니라 성 차별을 겪습니다. 소설 주인공이 자본주의 국가에 도착하기 전에 우주선에서 이미 소설 주인공은 성 차별을 듣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학자들과 시민들은 성 차별이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부유하고 매혹적인 여자들 역시 성 차별에 복종합니다. 그들은 성 차별을 타파하지 않고 해방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비단 극심한 계급 차별만 아니라 극심한 성 차별이 있습니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 성 차별이 있나요? 시장 경제, 임금 노동 제도, 상품 판매 같은 요소들은 자본주의를 구성합니다. 그래서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와 대립합니다. 사회주의 운동처럼, 성 해방 투쟁이 자본주의를 비판해야 하나요? 시장 경제, 임금 노동 제도, 상품 판매가 성 차별을 부추기나요? 만약 시장 경제가 성 차별로 이어진다면, 이게 우연인가요, 아니면 필연인가요? 흔히 성 해방 투쟁은 가부장 문화를 공격합니다.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가 다른가요? 만약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가 같다면, 성 해방 투쟁은 자본주의를 반드시 공격해야 합니다.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가 무슨 관계를 맺나요?
크리스 하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는 가부장 문화가 공허한 개념이라고 주장합니다. 크리스 하먼은 저항 운동이 가부장 문화 같은 공허한 개념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는 실체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마리아 미스는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가 긴밀하게 얽혔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가부장적이고, 그래서 성 해방 투쟁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뒤엎어야 합니다. 누가 옳은가요? 왜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소설 주인공이 계급 차별과 성 차별을 함께 목격했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 차별과 성 차별이 똑같은 원인에서 비롯하나요?
우리가 가부장 문화를 정의할 때, 우리가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나요? 가부장 문화를 완전하게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언제나 이런 용어 정의가 그러는 것처럼, 용어를 완전하게 고정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주 중요한 요소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건 사회적인 재생산을 포함하는 돌봄 노동입니다. 사회적인 재생산 없이, 인류 문명은 스스로 유지하지 못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람들은 노동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은 자연을 가공하고 식량을 비롯해 재화들을 생산해야 합니다. 자연을 가공하기 위해 인류 문명은 노동력들을 투입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노동력들이 비롯하나요?
하늘에서 노동력들이 뚝 떨어지나요? 공기 중에서 노동력들이 뿅~ 생기나요? 그건 아닙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낳고, 돌보고, 키웁니다. 아이들은 성장하고 어른들이 되고, 어른들은 노동력들을 제공합니다. 노동력들은 돌봄 노동에서 비롯합니다. 사회적인 재생산은 노동력들을 배출합니다. 문제는 가부장 문화가 돌봄 노동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가부장 문화가 '가부장' 문화라고 불리나요? 가부장은 남자 어른입니다. 전통적으로 가부장은 돌봄 노동보다 다른 것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에서 어떤 늙은 남자 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가부장은 침략, 정복, 탐험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남자 어른, 가부장은 돌봄 노동에 참가하지 않습니다. 남자 어른, 가부장은 침략, 정복, 탐험에 참가합니다. 중요한 것은 돌봄 노동보다 침략과 정복과 탐험입니다. 돌봄 노동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돌봄 노동은 보조적입니다. 남자 어른은 여자를 돌봄 노동에 밀어넣습니다. 남자의 근력보다 여자의 근력이 약하기 때문에, 여자가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기 때문에, 가부장은 여자가 돌봄 노동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자가 돌봄 노동을 맡을 때, 돌봄 노동이 보조적이기 때문에, 여자 역시 보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여자는 돌봄 노동을 맡으나, 돌봄 노동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 자체로서 여자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여자가 남자를 보조할 때, 여자가 남자에게 뭔가를 줄 때, 여자는 중요해집니다. 그 자체로서 여자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남자를 위해 여자는 존재해야 합니다. 아담의 갈비뼈에서 이브가 비롯한 것처럼, 이브보다 아담이 선천적인 것처럼, 아주 오래 전부터, 고대부터 현재까지, 가부장 문화는 남자를 위해 여자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그 자체로서 여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자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여자보다 남자가 중요하기 때문에, 남자를 위해 여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지배하고 정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부장 문화는 수많은 성 폭행들을 쏟아붓습니다.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을 무시합니다. 여자가 돌봄 노동을 맡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여자를 무시합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는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고 오직 남자에게만 의존해야 합니다. 어떤 사회가 돌봄 노동을 무시하고 여자를 돌봄 노동에 밀어넣는다면, 우리는 이 사회가 가부장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가부장적인가요?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추구합니다. 자본가 계급은 계속 이윤을 늘리고 축적하기 원합니다. 자본가 계급에게 이윤 이외에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심지어 이윤을 위해 자본가 계급은 얼마든지 사람들을 학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본가 계급에게 이윤은 지상 목표이나, 어디에서 이윤이 비롯하나요? 하늘에서 이윤이 뚝 떨어지나요? 많은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돈이 돈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아, 돈이 생명체입니까? 와, 이건 정말 대단한 논리입니다. 돈이 생명체라면,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잘못 썼을 겁니다. 레이첼 카슨은 <바다의 가장자리>를 잘못 썼을 겁니다. 하지만 돈이 돈을 낳는다는 사고 방식은 망상입니다. 사람들이 노동하기 때문에, 노동은 가치를 만들고, 가치를 편리하게 교환하기 위해 화폐는 존재합니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사고 방식은 비유가 아닙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정말 돈이 돈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노동이 가치를 만든다는 노동 가치 이론을 무시합니다. 온갖 경제 뉴스들은 얼마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멍청하게 헛소리들을 늘어놓는지 보여줍니다. 돈은 돈을 낳지 않고, 하늘에서 돈은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노동할 때, 노동은 가치를 만듭니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이 임금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댓가를 지불하나요? 아니, 자본가 계급은 과잉 노동 시간을 이용해 이윤을 만듭니다. 자본가 계급은 절대 임금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댓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자본가 계급이 임금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자본가 계급은 돌봄 노동에게도 댓가를 지불하지 않을 겁니다. 넷째 문단이 설명한 것처럼, 돌봄 노동이 노동력들을 배출함에도, 댓가 없이 자본가 계급은 노동력들을 이용합니다. 결국 자본가 계급은 돌봄 노동을 착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가부장적입니다. 자본주의는 경제학적으로,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반드시 가부장적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자들이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착해진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부장 문화가 사라지나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가부장 문화가 경제 현상이기 때문에, 성 해방 투쟁은 경제 구조를 뒤엎어야 합니다.
성 해방 투쟁은 시장 경제, 임금 노동 제도, 상품 판매를 없애야 합니다. 성 해방 투쟁은 사람들이 생산 수단을 평등하게 공유해야 한다고 외쳐야 합니다. 크리스 하먼은 이걸 지적하지 못했습니다. (크리스 하먼은 비단 이것만 아니라 여러 오류들을 드러냅니다.) 가부장 문화는 공허한 개념이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가부장 문화는 돌봄 노동들을 착취했습니다. 17세기 이후, 가부장 문화는 자본주의와 결합하고 시장 경제를 이용해 돌봄 노동을 착취합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는 이런 관계를 맺습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가부장 문화 사이에는 느슨한 관계나 우연적인 관계가 아니라 필수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운동은 가부장 문화를 공격해야 하고, 성 해방 투쟁은 자본주의를 공격해야 합니다. 소설 <빼앗긴 자들>은 이걸 설명하지 않습니다. <빼앗긴 자들>이 노동 문제에 치중하기 때문에, 이 소설은 어떻게 가부장 문화와 자본주의가 얽혔는지 자세히 파악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빼앗긴 자들>이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도, 독자는 왜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자가 성 차별을 겪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빼앗긴 자들>은 여성적인 사회를 주장하지 않으나, 인류 사회는 가부장 사회에 저항하는 여성적인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성적인 사회는 사회적인 재생산과 돌봄 노동을 중시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독자는 계급 차별, 성 차별과 함께 환경 오염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소설 주인공의 연인이 해양 생태학자임에도, 소설 <빼앗긴 자들>은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환경 오염을 저지른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이 오직 이윤 극대화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정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환경 오염은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환경 오염들을 일으켜야 하고, 자본주의는 기후 변화 같은 행성급 환경 오염을 일으킵니다. 여성적인 사회는 이윤 극대화보다 돌봄 노동을 중시하고, 이건 환경 오염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이 자연을 바라볼 때, 인류 문명은 '여성적으로' 자연 환경을 바라봐야 합니다.
자연과 여자가 똑같이 생명을 낳고 먹이기 때문에, 흔히 사람들은 여자가 자연과 비슷하다고 간주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가부장 문화 역시 얼마든지 어머니 자연을 주절거릴 수 있을 겁니다. 이건 너무 얄팍한 어머니 자연 개념입니다. 심지어 얄팍한 어머니 자연 개념은 돌봄 노동 착취를 뒷받침할 겁니다. 이건 진정한 어머니 자연 개념이 아닙니다. 자연처럼 여자가 생산적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는 '여자=자궁'이라는 단순한 등식을 만듭니다. 가부장 문화에서 임산부는 아이를 밴 인간이 아니라 생체 인큐베이터가 됩니다. 여자가 인간보다 자궁이기 때문에, 임산부가 아이를 밴 인간보다 생체 인큐베이터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여자(임산부)는 존재하지 못합니다.
여자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지배 계급은 여자를 통제하고 지배하고 정복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자신의 자궁을 통제하는) 임신 중절 권리는 장애에 부딪히고, (사회적으로 재생산하지 못하는) 동성애 결혼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여자는 (억지로) 돌봄 노동에 종속됩니다. 가부장 문화가 '여자=자궁' 등식을 만들기 때문에, 성 해방 운동가들은 성급하게 여기에 반발하고 '여자≠자궁' 공식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게 옳은 공식인가요? 자궁은 여자의 전부가 아니나, 분명히 여자에게 자궁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마리아 미스 역시 '여자≠자궁' 공식이 너무 성급한 반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여자=자궁'과 '여자≠자궁'은 모두 단순합니다. 이건 모 아니면 도라는 흑백 논리, 이분법에 기반합니다. 단순한 이분법에 맞서기 위해 성 해방 투쟁이 단순한 이분법을 들이댄다면, 결국 가부장 문화처럼 성 해방 운동은 오류에 빠질 겁니다. 우리는 총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제 5월 25일 게시글이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 이유 없이 반다나 싱 단편 소설들은 어머니 행성을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 알았어. 난 행성이야. 여자, 아내, 어머니 그런 거 말고.” 이렇게 단편 소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는 말합니다. 동시에 이 단편 소설은 행성이 새로운 생명체들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소설 모음집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에는 여자와 번성과 자연을 연결하는 다른 단편 소설들이 있습니다. 여자는 여자가 아니고 아내가 아니고 어머니가 아니고 행성입니다. 행성은 새로운 생명체들을 낳습니다. 그래서 행성은 어머니가 아니고 동시에 행성은 어머니입니다. 만약 정말 어머니라는 개념이 중요하지 않다면, 왜 여자가 다른 뭔가가 아니라 (생명체들을 낳는) 행성이 되었나요? 여자가 우주로 떠나고 싶다면, 행성보다 별똥별이나 다른 뭔가가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건 하나의 해석입니다. <자신을 행성이라고 생각한 여자>를 읽는 다른 해석들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에는 근거가 없지 않아요.
허접한 가부장 문화 같은 단순한 이분법에게 이건 논리적인 모순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이건 모순이 아닙니다. 이건 총체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고 방식이 여자를 바라볼 수 있나요? 여자는 자궁이 있는 인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방점을 찍고 다시 '자궁'에게 방점을 찍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비단 이것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 자연과 문명, 쾌락과 고통, 인간과 비인간, 근대화와 근대 이전 같은 여러 가지를 총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자연 역시 총체적인 사고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인류 문명이 여성적으로 자연을 바라볼 때, 어머니 자연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환경 운동가들이 정말 자본주의와 가부장 문화를 연결하고 비판하나요? 많은 사람들은 4월 22일을 외치고 지구 그림에 여자 그림을 덧붙입니다. 이런 그림들이 가부장 문화를 제대로 비판하나요? 아니, 이른바 어스짱(earth-chan) 모에화 그림처럼, 4월 22일 기념 그림들은 우스꽝스러운 모에화 그림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스짱 같은 모에화는 추잡하고 지랄 맞은 씹덕질들로 이어집니다.) 행성급 환경 오염이 들이닥침에도, 고작 모에화 따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어설픈 모에화 그림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 구조에서 어머니 자연은 살아숨쉬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