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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인 상상력: <산소 미포함>보다 <지상의 여자들> 본문

SF & 판타지/유토피아

생태적인 상상력: <산소 미포함>보다 <지상의 여자들>

OneTiger 2019. 9. 26. 20:14

박문영 작가가 쓴 <지상의 여자들>은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이야기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자들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는 유구한 격언(?)처럼, 남자들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지상에는 오직 여자들만 있습니다. 남자들이 사라지기 때문에, 여자들이 (상대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은 사고 방식과 사회 구조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어떻게 사고 방식과 사회 구조가 바뀌는지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지상에 오직 여자들만 남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상적인 여자들만의 공동체를 이룩할지 모릅니다.


여자들은 21세기 아마조네스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 유토피아들이 이야기한 것처럼, 여자들만의 공동체에서 돌봄 노동은 가장 중요한 노동이 되고, 모성은 종교가 될지 모릅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이런 변화를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소설 속에서 여자들은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들은 가부장 문화를 비판할 수 있으나, 그들은 가부장 문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변화를 느끼나, 그들은 어떻게 여자들이 변화를 이용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여자들은 무엇이 옳은지 논의하고, 싸우고, 심지어 서로 모욕합니다.



어떤 독자들은 소설 속에서 여자들이 멍청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여자들에게 기회가 있음에도, 그들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기회를 소모하고, 엉뚱하게 화풀이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욕합니다. 소설 속에서 여자들이 싸우기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여자의 적이 여자라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이게 사실인가요? 정말 여자의 적이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엉뚱하게 기회를 소모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욕하나요? 문제는 너무 오랜 동안 가부장 문화가 여자들을 길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들은 가부장 문화를 보고, 듣고, 느끼고, 고민하고, 배웁니다.


가부장 문화가 지배적인 체계이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 속에서 여자들 역시 가부장적인 인간이 됩니다. 아무리 페미니즘 운동권이 급진적이라고 해도, 가부장 문화 속에서 운동권은 페미니즘을 배워야 합니다. 개인보다 사회 구조는 훨씬 거대합니다. 사회 구조는 개인을 압도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개인이 사회 구조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 있나요? 이게 가능한가요? 크고 작은 측면들에서 사회 구조는 개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은 지배적인 관념을 받아들입니다. 여자들이 어릴 때부터, 여자들은 21세기 초반 자랑스러운 수구 꼴통 가부장 국가 대한민국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것 때문에,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중들이 혁명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당장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억압적인 사회 구조가 인간 성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혁명 정부는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낮은 단계 공산주의를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였으나, 두 사람은 공산주의 인간이 아니었을 겁니다. 두 사람이 공산주의 인간이라고 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낮은 단계 공산주의 인간이었을 겁니다. 두 사람은 높은 단계 공산주의 인간이 절대 아니었을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이오시프 스탈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억압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그들이 혁명가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그들이 전복적인 주장들을 떠든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지배적인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합니다. 심지어 로자 룩셈부르크는 프롤레타리아의 망치질이 시기상조와 기나긴 투쟁, '한 번 이상의 패배'를 반드시 거친다고 설명합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반드시 패배해야 합니다. 한 번에 민중 혁명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당장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루 아침에 혁명 정부는 모든 것을 바꾸지 못합니다.



19세기 공산주의자들은 하루 아침에 세상이 바뀔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전위적인 혁명가들이 시청으로 돌진하고, 시청 옥상에 붉은 깃발을 꼽고, 혁명 정부를 위해 땡땡땡~ 종을 울린다면 당장 세상이 바뀔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이건 너무 순진한 망상입니다. 분명히 19세기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열정적인 신념이 있었고, 이런 신념은 존경스러우나, 그들은 너무 순진한 망상을 꿈꾸었습니다. 당장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지배적인 관념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건 오랜 기간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지상의 여자들>에서 당장 여자들은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저 왜 가부장 문화가 문제인지 말할 뿐입니다. 비록 이게 획기적인 혁명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은 말하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목소리들입니다. 여자들은 목소리들을 높이기 시작합니다. 비록 이런 드높은 목소리들이 욕설이 되고, 싸움이 되고, 비방이 된다고 해도, 이런 과정은 왜 가부장 문화가 문제인지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 <지상의 여자들>은 남자들을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것 같습니다. 지상에서 놈팽이들이 소리를 꽥꽥 지르고, 다른 사람들을 두들겨패고, 윽박지르고, 때리고, 짓밟고, 죽이지 않기 때문에, 여자들은 목소리들을 높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 유토피아 문학들보다 이런 설정은 훨씬 논리적일지 모릅니다. 여자들만의 공동체,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다양한 역사들을 자랑하나, 우리가 정말 이상적인 미래 사회를 그릴 수 있나요? 우리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100년 이후, 200년 이후, 500년 이후, 페미니즘 유토피아가 정말 나타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게 무엇인지 예언하지 못합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서 레베카 솔닛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룩하는 세상은 페미니즘 세상이 아닐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건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나, 이런 미래는 공산주의 세상이 아닐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언자가 아님에도, 어떻게 우리가 미래 청사진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나요? 그래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주의 세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레프 트로츠키는 해저 노동자 회관을 언급하나, 이건 그저 웅장한 로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저 현실 속의 여러 모순들에 저항할 뿐입니다. <리얼 유토피아>에서 에릭 올린 라이트가 나침반을 언급하는 것처럼, 공산주의는 완벽한 GPS 장치보다 대략적인 나침반입니다. 공산주의는 유토피아를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과학적인 사회주의를 주장합니다.



이건 유토피아 문학들이 반드시 공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암울한 절망 속에서 유토피아 문학들은 새로운 시점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 킴 스탠리 로빈슨은 유토피아 장르에 무슨 가치들이 있는지 강조합니다. 엘리너 아나슨 역시 킴 스탠리 로빈슨을 참조하고 미래를 위한 희망, 유토피아 장르를 말합니다. 아무리 현실 속의 모순들이 중요하다고 해도, 언제나 우리가 오직 디스토피아, 포스트 아포칼립스만 읽는다면, 우리는 절망 속으로 깊게 빠질지 모릅니다. 거자일소(去者日疏)라는 사자성어처럼, 몸이 멀어진다면, 마음 역시 멀어질 겁니다. 사실 로맨스 장르에게 이런 소재는 아주 친숙합니다. 그래서 로맨스 장르는 시간 여행 설정을 빌립니다.


종종 로맨스 장르는 '시간을 거스르는 진정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시간 여행 장르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SF 독자들은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가 사이언스 픽션인지 헛갈립니다. 만약 거자일소가 사실이라면, 몸이 가까워질 때, 마음 역시 가까워질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언제나 오직 디스토피아만 읽는다면, 우리는 희망보다 절망으로 기울어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엘리너 아나슨은 미래를 위한 희망을 강조할 겁니다. 문제는 유토피아 장르가 현실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 자체로서 유토피아를 맹신한다면, 우리는 근본주의 토라 해석자들과 다르지 않을 테고, 유토피아 장르는 저항 수단보다 보수적인 근본주의가 될 겁니다.



그래서 <지상의 여자들>이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는다고 해도, 이건 단점이 되지 않습니다. 박문영 작가가 "나는 이상적인 사회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고 해도, 이건 논리적인 대답입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으나, 이 소설은 여자들의 목소리들을 들려줍니다. 가부장 문화가 전쟁, 침략, 정복, 학살을 우대하기 때문에, 가부장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배웁니다. 남자들은 전쟁, 침략, 정복, 학살이 중요하다고 배웁니다. 심지어 여자들조차 여기에 동조합니다. 남자들이 꽥꽥거리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동안, 여자들은 가부장적인 편견이 옳다고 고개들을 끄덕입니다.


가부장적인 남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동안, 그들의 세계관은 전쟁, 침략, 정복, 학살로 흘러갑니다. 가부장적인 남자들에게 가장 커다란 미덕은 때리고, 죽이고, 부수고, 짓밟고, 윽박지르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윤리와 도덕을 외친다고 해도, 결정적인 길목에서 그들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전쟁, 침략, 정복, 학살을 찬양합니다. 이런 광경들은 너무 흔합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이런 광경들을 해체합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가부장적인 편견들을 허공으로 날려버리고, 너무 흔한 광경들을 지우고, 새로운 목소리들을 부릅니다. 이 소설은 일상을 지우고 비일상을 늘어놓습니다.



만약 소설이 일상을 지우고 비일상을 늘어놓는다면, 이런 소설은 사이언스 픽션이 될 겁니다. 그래서 <지상의 여자들>이 SF 소설인가요? 언뜻 <지상의 여자들>은 SF 소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에서 사람들은 외계인들이 남자들을 납치한다고 수군거리나, 이건 그저 추측에 불과합니다.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외계인들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외계인들을 수군거리지 않는다고 해도, 사건 전개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겁니다. <지상의 여자들>에 외계인이라는 단어가 절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사건 전개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어떻게 남자들이 사라지는지 과학적으로 검증하지 않습니다.


작가 후기에서 박문영 작가는 이런 설정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SF 소설이 아닌가요? 하지만 <지상의 여자들>은 신화와 전설, 마법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어떻게 남자들이 사라지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런 현상은 신화와 전설, 마법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사라 스콧이 쓴 소설 <천년 홀>과 달리, <지상의 여자들>에서 신은 여자들을 거두지 않습니다. <지상의 여자들>에서 남자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이런 현상이 신화와 전설, 마법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은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이 소설에서 성 해방 운동은 근대적인 사고 방식을 따릅니다.



이 소설에 마법이 없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성 해방 운동이 근대적인 사고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은 판타지보다 사이언스 픽션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고전 <Moving the Mountain>부터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 같은 여러 페미니즘 문학들을 (우회적으로) 계승합니다. <지상의 여자들>과 <Moving the Mountain>부터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 사이에는 여러 근본적인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이런 여러 페미니즘 문학들은 사이언스 픽션입니다. <Moving the Mountain>은 사이언티픽 로망스이고,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는 본격적인 우주 탐사물입니다. <지상의 여자들>이 이런 소설들을 (우회적으로) 계승하기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은 SF 소설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하위 장르를 물어볼 수 있습니다. 사이언스 픽션은 상위 장르입니다. SF 독자들이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를 혼동하고, 타임 슬립 로맨스가 SF 장르로 들어가는 것처럼, 상위 장르로서 사이언스 픽션에는 여러 하위 장르들이 있습니다.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하위 장르입니다. <Moving the Mountain>과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처럼,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페미니즘 SF 장르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 오직 페미니즘 유토피아 특징만 있나요? 작가 후기에서 박문영 작가는 죽은 맹금들과 환경 오염을 언급합니다. 죽은 새들. 환경 오염. 이런 언급은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분위기를 풍깁니다.



소설 속에서 주연 등장인물은 환경 운동과 동물 권리를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물 속에서 주연 등장인물은 자신이 돌고래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주연 등장인물에게 동물 권리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상의 여자들>이 SF 소설이고, 주연 등장인물이 환경 오염을 인식하기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이 생태학 SF 장르에 들어갈 수 있나요? 생태학 SF 장르는 시대 격차와 근대 과학을 이용해 생태적인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바이오스피어 우주선, 환경 아포칼립스, 삼림 도시, 개조 생명체, 소행성 버블월드, 우주 고리 생태계, 거대 괴수는 생태학 SF 장르에 속할 수 있습니다. 비디오 게임 <산소 미포함>을 보세요.


이 게임은 우스꽝스러운 코믹 SF 장르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산소 미포함>은 시대 격차와 근대 과학을 이용해 생태적인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꿀꺽 물고기, 해치, 빛벌레, 드레코가 개그 만발에 우스꽝스럽다고 해도, 이런 동물들은 생태적인 상상력, 생태학 SF 설정입니다. 이런 동물들은 주변 환경, 수분, 공기, 영양분 순환에 영향을 미치고, 게임 플레이어는 환경과 생태계를 관리하고 조절해야 합니다. 반면, <지상의 여자들>에는 새로운 생명체가 없습니다. 이 소설은 바이오스피어 우주선을 날리지 않고, 삼림 도시를 짓지 않고, 소행성을 테라포밍하지 않고, 거대 괴수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런 게임과 달리, 비록 외계 동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지상의 여자들>은 중요한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아무리 <지상의 여자들>이 SF 소설에 가깝거나 SF 소설이라고 해도, 소설 속에서 주연 등장인물이 환경 운동과 동물 권리를 의식한다고 해도, 작가 후기가 <침묵의 봄>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도, <지상의 여자들>이 생태학 SF 장르에 들어갈 수 있나요?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새로운 사고 방식이 새로운 자연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소설 <Moving the Mountain>에서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채식을 선호하고, 사냥을 추방하고, 동물원을 없앱니다.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함부로 삼림을 파헤치지 않습니다. 이건 비일상적인 상황입니다.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동물원보다 드넓은 야생 삼림을 선호합니다.


현실에서 심지어 과학자들조차 동물원을 옹호하나, 페미니즘 유토피아는 동물원을 없애고 야생 삼림을 보호합니다. 현실 속의 야생 자연과 소설 속의 야생 자연은 다릅니다. 이건 생태적인 상상력입니다. 이건 생태학 SF 설정입니다. 소설 <Moving the Mountain>과 달리, 소설 <지상의 여자들>은 여자들만의 공동체가 동물원을 없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 역시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여자들이 목소리들을 새롭게 높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여자들>이 <Moving the Mountain>을 (우회적으로) 계승하기 때문에, <지상의 여자들>에게는 생태학 SF 장르가 되기 위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오히려 <산소 미포함>보다 <지상의 여자들>은 훨씬 중요한 생태적인 상상력일지 모릅니다. <산소 미포함>은 사회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반면, <지상의 여자들>은 사회 구조가 바뀔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해치와 드레코보다 여자들의 새로운 목소리들은 훨씬 중요한 생태적인 상상력일지 모릅니다. 비디오 게임 <서브노티카: 빌로우 제로> 동영상이 남극 생태계를 이용해 외계 극지 생태계를 묘사하는 것처럼, 현실 속에서 자연 생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사이언스 픽션은 생태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생태학 SF 장르에게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는 생산 조건입니다.


외계 구근부터 거대한 생체 나무 우주선까지, 생태적인 상상력은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를 가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작물 내부와 외부가 단절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평론가가 '창작물 외부'를 언급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평론가가 창작물로서 창작물을 평가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겁니다. 하지만 오직 창작물로서만 창작물이 존재할 수 있나요? 그 자체로서 창작물이 오롯하게 존재할 수 있나요? 우리가 소설을 읽고 만화를 보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동안, 현실 개입 없이, 초월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나요?



이건 망상입니다. 우리가 '창작물 외부'를 외면한다면, 심지어 우리는 무엇이 창작물인지 결정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거센 태풍이 할리우드 창고를 때리고, 거센 태풍 속에서 우연히 필름 조각들이 뒤섞이고 영화 <조커>가 만들어진다면,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이 '영화'에 황금 사자상을 수여해야 하나요? 누가 황금 사자상을 받아야 하나요? 황금 사자상을 수여하기 위해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주술사에게 태풍을 불러달라고 요청해야 하나요? 누가 예술을 예술이라고 규정하나요? 왜 예술이 예술이 되나요? 평론가들은 이런 '영화' <조커>가 예술이 되는지 열심히 키배를 뜰 겁니다. 이렇게 현실은 중요합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창작물은 번쩍 나타나지 않습니다. 생태학 SF 장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외계 구근부터 거대한 생체 나무 우주선까지, 현실 속의 자연 생태계에서 생태적인 상상력들은 비롯합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자연 생태계는 심각한 위협에 부딪힙니다. 심각한 위협은 가부장적인 세계화 자본주의입니다. 현실 속에서 가부장적인 자본주의가 바뀌지 않는다면, 자연 환경은 커다란 재앙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지상의 여자들>은 사회 구조 변화와 환경 운동을 함께 이야기하고, 그래서 드레코보다 여자들의 목소리들은 중요할지 모릅니다. 비록 이런 목소리들이 그저 비방에 불과하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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